전영범
솔직히 그에게 “책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묻고 나서 괜한 질문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사찰에 가서 스님에게 뜬금없이 “경문이라는 게 뭔가?” 하고 우문(愚問)을 드린 양상이기 때문이다.
전영범의 인생경력은 말 그대로 순백의 책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 퇴직하게 되는 지금까지 장장 35년동안 책 하나만 만들었던것이다. 그의 이런 경력은 업계에서 내노라고 하는 민족출판사에서도 단연 첫손에 꼽힌다.
사람들은 흔히 저작등신(著作等身)으로 저술한 서적의 부피를 비유한다. 자기의 키만큼 많은 저술을 한다는것. 그러나 그에게 도대체 그간 만든 책이 얼마 되는가 하는 물음 역시 우문이 아닐지 싶었다. 이보다 수상작 등신(等身)이라는 어휘가 더 타당하고 적절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가 민족출판사 조문실 주임으로 있는 기간 기획하고 출판한 도서는 400여종, 그 가운데서 10%를 차지하는 40여종의 책이 “중국도서상”, “중국민족 도서상”, “동삼성(북경) 조선문도서상” 등 각급 여러 가지 도서대상을 수상했다.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는 단연 중국 도서의 최고의 대상인 “중국출판 정부상”을 수상하였다.
그러고 보면 전영범은 출판계에서 너남 없이 공인하는 “상아탑”을 쌓아올린것이다. 그래서 전영범은 2010년 “전국 민족사무위원회 계통의 선진사업인원”으로 선정되였으며 2011년에는 “국무원 정부특별수당금 수혜자”로 되였다. 정부특별수당금은 1990년부터 국무원에서 특출한 기여를 한 전문가, 학자에게 발급하는 특별대우이다. 중국 출판업계에서 정부특별수당금 수혜자는 전영범이 조선족으로 유일무이하다.
인생이 한권의 책이라면 전영범은 그야말로 수십년의 페이지의 향기로운 “책”을 쓴 셈이다.
1950년대의 가족사진, 흑백사진에 색칠을 해서 컬러사진으로 만들었다 그 시기에는 고급사진이었다 앞줄의 왼쪽 두번째 애기가 전영범이며 뒤줄 왼쪽 중년사내가 부친이다
향기를 풍기는 책
좋은 책 한권을 만드는 과정 역시 한알의 씨앗처럼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펼치며 나중에 망울을 터뜨려 향기를 풍기는 성장의 진통을 겪는다.
그의 책궤에 줄느런히 꽂힌 책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느 책 어느 페이지를 먼저 펼쳐야 할까… 전영범은 희비가 엇갈렸다는 그 책의 이야기부터 꺼내는것이였다.
그때는 중국 대륙에서 한류가 붐을 이루던 지난 세기 90년대였다. 산동 등 연해지역을 고찰하던 전영범은 현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열기를 체감하게 되였다. 오랜 출판인으로서 그는 대뜸 “한국어 배우기” 책을 만들면 잘 팔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는 벌써 흥행을 노린 “한국어 배우기” 책자들이 연신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책자들에는 한국어의 토나 철자는 물론 습관용어의 사용에서 틀린게 적지 않았다. 중문출판사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였다.
(우리글의 책을 만드는건 우리 조선족 출판인의 우세인데…)
전영범은 곧바로 대학가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교과서 “한국어”(1~4권)를 개발한다. 책 원고를 마무리 지을 때는 대학교 개강일이 눈앞에 박두하고 있는 시점이였다. 교과서는 조선문 교열만 통과하고 즉각 인쇄에 들어갔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 이번에는 교과서에서 한국어가 아닌 중국 글에 틀린 곳이 줄줄이 나타났던것이다. 어림잡아 수십여곳이나 되였다. 수천권의 책을 전부 파기해야 했다. 보물덩이처럼 생각했던 도서가 졸지에 애물단지로 전락한것이다. 전영범은 산더미 같은 책을 종이공장에 파지로 버리면서 하마터면 애들처럼 눈물을 떨어뜨릴 뻔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점에 다시 등장한 “한국어”는 드디어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열독서로 되였다. 그때부터 “한국어”는 지금까지 무려 23차나 재판되어 민족출판사 사상 단일 품종의 도서로는 재판 차수가 제일 많은 도서로 되였다. 이에 따라 책은 수입이 짭짤해서 금덩이를 낳는 “황금거위”로 떠올랐다.
이 책과는 달리 조선족 신진작가들의 작품집 출판은 시초부터 파격적이였다. 그때 문단에서 금방 두각을 내밀 시작한 신진작가들은 작품집을 내려면 적어도 몇년씩이나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책을 내려고 시도하는 신진작가들에게 헛수고를 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공연한 걸음을 걷지 말게. ‘민족출판사’는 문턱이 아주 높네.”
그러나 출판사라면 작가들의 아지트는 물론 산원(産院)으로 되어야 한다는게 전영범의 좌우명이었다. 그는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부터 조문실 문예도서조 조장으로 있으면서 중진작가들의 작품집에 모를 박는 한편 신진작가들의 육성에 정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당시 로작가였던 김철의 시선집, 설인의 시선집은 물론 신진작가였던 김훈과 리광수, 류재순의 단편소설집, 리혜선의 중편소설집이 연이어 출판되였다. 이들 신진작가는 훗날 모두 조선족문단의 중견으로 성장하였다. 그때 내린 결단은 이런 인물들의 새별 같은 문단등장에 사닥다리를 놓아주었던것이다.
책에 깃든 이야기는 너무나 많았다. 책장에서 손에 닿는 대로 뽑아든 대형 화첩 “당대중국조선족”은 그가 편집 작업에 참가하고 편집위원, 북경소조 부조장을 담임했다고 한다. 이 화첩은 중국조선족의 100년 력사를 반영, 중국 조선족의 발전사에 대한 권위적인 해독(解讀)으로 되고 있었다. 또 그가 기획에 참여하고 심사위원, 원고심열위원을 담임한 “중조대사전”은 더구나 중국과 조선, 중국과 한국 문화교류의 교량으로 되고 있으며 사전류 도서의 권위적인 모델로 되고 있었다.
서고(書庫)에 명물로 오른 이런 책들은 저마다 전영범의 인생경력을 “책”의 향기로운 페이지로 풍미하고 있는것이다.
세상을 편집하는 책
책은 원예사가 화원의 꽃을 가꾸듯 출판인의 편집, 가공작업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출판인의 시각과 능력의 여하에 따라 책의 모양새가 다르게 된다.
전영범은 조문실 주임 직무를 맡은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 직원들에게 다소 이색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공부를 하세요, 다들 학자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출판업계의 경쟁은 결국 인재의 경쟁이라는것이다. 그는 직원들이 모두 대학 졸업생들이었지만 여기에 연연하지 말고 계속하여 연구생 공부를 하라는 지청구를 입에 달고 다녔다. 직원이 연구생 공부를 하게 되면 부서에서 학비의 일부를 지원했다. 선후하여 4명이 재직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명이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문실은 이로써 민족출판사에서 석, 박사가 제일 많은 편집실로 되었다. 이처럼 자체로 연구생을 육성한건 전국 출판업계에서 특이한 사례로 꼽힌다.
조문실은 직원들이 지면에 작품을 발표할 경우 편당 3백원, 논문은 편당 7백원을 장려했다. 작품이 수상되면 또 액외의 장려금을 주어 글을 지은 사람을 격려했다. 훗날 이런 장려금 제도는 부서에서 글을 쓰는게 일상으로 되면서 옛말로 멀어졌지만 연구생과정 수료를 격려하는 제도와 마찬가지로 직원들의 실무능력 향상에 명실공한 디딤돌이 되였던것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전영범은 한시기 부편심 직함과 편심 직함 정원을 다른 사람에게 거듭 양보하여 출판사의 미담으로 되였다.
그가 당지부서기를 세번 련임한 기간 조문실 당지부는 무상헌혈과 재해구지원 등 행사에서 번마다 출중한 모습을 보였으며, 따라서 2005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진기층당조직”으로 선정되였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순풍에 돛 단 배”처럼 그렇게 순조로운건 아니였다. 한때 조문실은 경제난의 시달림을 받았다. 출판사는 조문실에 해마다 단지 수십만원의 경비를 조달하였는데 이 경비에는 조문실 약 20명 직원의 로임과 30여종 도서의 출판이라는 막중한 과업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때 따라 황홀한 녀신은 연이어 세번이나 등극하여 자기의 궁전으로 전영범을 유혹했다. 그것인즉 상부의 부장 비서로 전근하고 부유한 연해지대로 부현장급 대외무역 간부로 발탁되며 국가급 려행사의 책임자로 전근하는것이였다. 와중에는 별장과 승용차를 지급하고 로임을 원래의 10배로 인상하는 혜택까지 들어있었다.
종국적으로 전영범은 그냥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 남았다. “책의 애착이라고 할까요? 제 적성에 제일 맞는게 도서출판이라고 생각되였습니다.”
시장성 도서를 기획하게 된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한다. 조문실은 조선족 학술계와 문학계, 교육계의 전문가, 학자들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우세를 리용하여 팔리는 책들을 만드는데 힘을 넣었다.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총서”(전 11권), “연변아리랑”, “연변인민항일투쟁사”, “흑룡강연수현조선족백년사” 등 품위가 높고 학술가치가 높은 민족출판사의 조선문도서는 사회적 효과와 경제효과에서 모두 질적인 비전을 가져왔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책이 잘 나갈 때 제일 기쁘지요.” 침체기에 벗어나던 그때가 새삼스러운듯 전영범은 얼굴에 함박꽃과 같은 웃음을 피워 올린다.
마치 꿀벌이 꽃을 떠날수 없듯 책은 어느덧 그의 전부로 되고 있었던것이다.
책의 향기로운 만남
“책이요? 책은 저에게 등대와 같았습니다.” 전영범은 책에 대한 물음에 일고(一考)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렇게 단마디로 대답한다.
그가 고향인 왕청현에서 중학교 2학년에 다닐 무렵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난데없는 큰아버지의 역사문제는 그림자처럼 내내 어린 전영범의 뒤를 따라다녔다. 이 때문에 그는 그토록 자랑스러웠던 “홍위병”에서 축출되었고 훗날에는 또 그토록 부러웠던 군대모집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전영범은 본의 아니게 자주 또래의 무리에서 홀로 떨어지게 되였다. 그는 고독을 달래기 위해 도서관에 남몰래 들어가서 늘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파란 많은 세상에서 한 떨기의 낙엽처럼 정처 없이 헤매는 그에게 책은 유일하게 마음을 의지할 곳으로 되었다. 붉은 기발과 구호, 수령초상이 수풀을 이룬 바깥세계와는 전혀 다른 오색의 세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장편소설 “낙타 샹즈”, “집”, “지원군의 하루”, “려량영웅전”, “연안보위”…
그때 전영범은 처음으로 “민족출판사”라는 이 이름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그런 재미있는 책들을 거개 ‘민족출판사’에서 펴낸 거예요. 그래서 ‘민족출판사’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1974년, 그는 책과 더 가까이 그리고 더 깊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였다. 현지에서 추천을 받아 연변대학 어문학부 조선어과에 입학하게 되였던것이다. 그에게 정말로 오매불망 그리던 책의 “천당”이 나타난것이다. 비록 그때 “조선어문은 무용지물”이라는 론조가 휩쓸고 있었지만 워낙 글쓰기와 독서를 즐겼던 그는 짬나는 대로 원고지에 자주 볼펜을 긁적거렸다. 그럴지라도 책의 “등대”가 나중에 그를 “민족출판사”라는 옛 꿈속의 대안에 인도할줄은 정말 뜻밖이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였다. 학급에는 문득 모범인물의 사적기사를 써내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전영범은 평소 책 더미에서 갈고 닦았던 기예를 발휘, 한편의 기사를 멋지게 엮어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북경 민족출판사의 입사 후보들을 선정하기 위한 필기시험이였다. 책과의 끈끈한 인연은 그렇게 연변 오지의 이 시골뜨기를 마침내 수도의 출판사까지 이르게 했던것이다.
그때부터 몇십년동안 책으로 쭉 편집을 해왔던 세계를 전영범은 퇴직한후 직접 두발로 뛰고 피부로 느끼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바야흐로 책과 또 다른 향기의 만남을 시작하게 되는것이다.*
김호림
중국민족 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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