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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 안고 50년간 과학연구에 정진해온 과학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3월25일 10시49분    조회: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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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박동욱


우리 나라 저명한 응용화학가 박동욱교수

2001년은 우리 나라 저명한 응용화학가이며 전 중국건강연구중심 조직공정연구소 소장이며 박사생도사인 박동욱교수가 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한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70세에 퇴직하였지만 그의 하루일정은 여전히 긴장하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그의 두뇌는 연구분야에서 고회전하고있다. 맑스는 “인간은 의식여부를 떠나 그에 따르는 과업과 사명을 맡게 되며 이러한 사명은 각자의 수요와 객관적세계의 관련속에서 산생한다”고 말했다. 박동욱교수에게 있어서 50년 동안의 연구생애는 사명감에서 비롯됐다고 해야 할것이다.

(1)
1933년 그해 4살인 박동욱은 한국 강원도 울진군에서 중국 길림성 영길현 강밀봉으로 이주했다. 큰물피해로 페농이 된 일가는 친척연분으로 중국에 이주했다. 그러나 실농군인 아버지는 륵막염으로 앓고 1년 반후 세상을 하직했다. 병마에 시달리던 부친은 동욱이에게 한글과 일본어 그리고 천자문을 가르치고야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병상유치원에서 글을 익혔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고맙고 그립다.”

일제가 투항한 1945년 8월 당시 동욱이는 소학교 5학년생이였다. 리대만, 황순명 등 중국공산당 지하공작원들이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기간 그는 애사기의 《사회발전간사》 등 유물론서적을 접촉하며 그의 사상은 심각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어 리환형교원의 유도하에 돋보기를 빌어 현미경을 만들기 시작하며 2년후 출시된 “뚝배기” 현미경은 현지에서 대사건으로 남았다.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기간 동욱이일가는 전에 없었던 생활난에 부딪쳤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당시 그는 단연히 학교를 그만두고 품팔이에 나섰다. 땅파기, 가마니짜기, 나무하기… 어머니의 고달픔이 가슴에 닿아왔던것이다. 힘든 나날이지만 나어린 품팔이소년은 푸른 꿈을 접지 않았다.

일본어로 된 대수, 기하, 화학 교과서는 저녁시간마다 탐독하는 책이다. 그중 화학은 그가 흥미를 갖는 내용이였다. “ 공부하고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으므로 어머니는 공부를 해야 앞으로 사무직에 종사할수 있다고 타일렀다.

(2)
품팔이하던중 동욱은 길림성 룡정지역의 사립학교인 인민중학교와 시립학교인 룡정중학교를 찾아갔다. 그러나 학비나 잡비로 엄두를 못 내고 등을 돌렸다. “그때 룡정중학교 교장선생님은 학교에 올수 있으나 남아도는 걸상과 책상이 없으니 책상과 걸상을 사가지고 오면 입학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책상과 걸상을 살 돈이 있을리 만무했고 어머니와 형님에게 큰 부담을 안기고싶지 않았다…”

그후 반공반독의 소문을 듣고 찾은 학교는 조선 청진제강소의 야간공업전문학교였다. 조선 상삼봉에서 회령까지는 120리 길이였다. 고생을 마다하고 떠난 딱친구 셋은 구학길에 평생 잊을수 없는 밤을 보냈다. “그날밤 처음으로 범의 눈을 보았다. 어둠속에서 범의 화등잔 같은 눈이 멀지 않은 곳에서 번뜩이는것을 분명히 보았다.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 멈출것만 같았다.”

청진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경솔한 행동을 자책했다. 조선의 출생증이나 공민증이 없이는 입학할수 없었던것이다. 박동욱의 인생은 길림성 개산툰팔프공장에서 중요한 전변을 가져왔다. 실험원모집시험에 통과한 그는 중산대학, 사천대학을 나온 동료들을 접촉하게 됐다. “세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의 눈에는 모두가 훌륭한 스승이였다.

1954년, 그는 꾸준히 자습을 견지한 보람으로 할빈외국어학원에 입학해 로어를 공부했다. 1956년 연변대학 화학 및 화학공학 학부로 전학하면서 그는 꿈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대학기간 그는 과학연구과제를 선택해 연구하고 완성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한다. 이것은 후날 과학연구사업에 토대를 마련했다.

연변대학에서 공부하던 1960년 박동욱은 연변대학을 대표해 제17차 전국학생대표대회에 참가하고 주석단성원으로 당선됐다. 1960년 6월 11일 중국청년신문은 연변대학 학생대표 박동욱의 발언을 게재했다. 발언에서 박동욱은 “세계과학문화의 고봉을 향해 만전을 기할것이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을것이다”라고 표했다.

이는 과학고봉을 정복하려는 대학생의 장엄한 도전장이였다. 대학졸업후 박동욱은 모교에서 2년간 교편을 잡았고 그후 길림성 지방공업연구소 (석유화학공업 연구원과 화학섬유연구소 전신)로 전근했다. 이곳에서 그는 안해 함은숙연구원을 만나고 본격적인 연구생활을 시작한다.

(3)
박동욱의 연구사업은 길림성지방공업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곳에서 그는 근 20년간 사업했다. 그의 연구분야는 합성섬유재료의 연구개발이다. 당시 경공업이 락후한 국내실정을 볼 때 석유에서 옷감원료를 뽑는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그러나 연구라 해야 고작 연구성과를 모방하는 수준이였다.

박동욱소속연구팀은 비날론연구제조임무를 맡았다. 당시 비날론연구제조수준이 중국을 앞선 조선을 따라배우기 위해 박동욱은 조선의 비날론전문가 리성기박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기간 그는 합성섬유 연구개발에서 중요한 성과를 이룩했다. 소속연구팀의 합성섬유의 연구는 제조기술의 실용화를 실현하며 그중 신형락하산재료와 전기전도성섬유는 생활, 공업, 군사 등 면에 리용됐다.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면서 박동욱은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다. 당시 일본 교도섬유대학은 세계적으로 선진적인 섬유기술실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1979년부터 1982년까지 기간 박동욱은 방문학자로 일본 교도섬유대학과 교도대학에서 고분자화학 및 의학용고분자 기초연구를 진행했다. “오히려 공휴일이 좋았다. 다들 휴식해서 실험실이 조용하고 맘대로 실험할수가 있었기때문이다.”

류학과정에 당시 세계적으로 흥기한 의학용고분자학과와 생물의학공학은 박동욱의 흥미를 자아냈다. 그러나 연구방향을 바꾼다는것은 46세인 그에게 한차례 모험이 아닐수 없다. 사꾸라다 이찌아지로교수는 한창 갈등에 모대기는 박동욱을 발견한다. 비날론의 발견자인 사꾸라다교수는 일본의 노벨상—일본문화상을 수상한 일본 고분자학과의 권위이다.

사꾸라다교수는 “중국에 필요한것은 박사학위수여자가 아니라 학과의 리더이다. 필요한것은 학술적원견과 독립적수행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박선생이 앞으로 이러한 학자가 되길 바란다”고 귀띔했다. 이로써 고분자 히드로켈(水凝胶), 고분자 표면갱질과 체내분해 흡수성 등 생물의학공학분야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포생물학, 분자생물학 등 낯선 분야를 포섭한다는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일본류학기간 그는 일본측연구일군과 함께 플라즈마반응장치를 설계연구하고 9편의 수준 높은 론문을 완성하면서 학계의 중시를 받았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박동욱은 선후로 북경 화학섬유연구소와 방직화학연구원 합성섬유연구소의 부총공정사와 연구대상 책임자로 나서면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이기간 그는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저온 플라즈마 상태 화학적진단방법을 제기하고 인정을 받는다. 한편 그는 신형고분자재료 “흡수수지”를 연구제작했다. 자체무게의 500~800배 달하는 물을 흡수할수 있는 “흡수수지”는 토양보수제로 전국의 가뭄지구에 보급했다. 농업과학원의 통계수치에 의하면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농작물 흡수수지는 2000만원의 경제효익을 창출했다.

관련 과학연구성과는 1989년 방직공업부 과학기술진보 2등상을 수상했다. 중국건강회복연구쎈터에 전근하면서 박동욱은 모립강을 만난다. 현재 모립강은 중국조직공정분야에서 일역을 담당하는 전문가이다. 모립강의 회억에 따르면 중국건강회복연구쎈터 토목건축착공당시 고분자연구실은 북경 영정문기차역부근에 있었다.

15평방메터되는 작은 방이 사무실이고 실험실이였다. 55세인 박동욱은 매일 자전거를 타고 왕복 60리를 오가면서 출근했다 한다. 1988년 6월, 박동욱과 모립강은 통현의 한 기업으로 원료와 견본을 가지러 떠났다. 자전거로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는 오전 10시가 넘었고 일을 끝내고나니 12시가 가까와왔다.

북경의 8월은 무더위의 날씨였다. 모립강은 박동욱을 집에 돌아가 휴식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박동욱은 실험실로 돌아왔고 퇴근시간이 되여서야 자전거를 타고 퇴근했다.

(4)
1988년부터 1990년 사이 박동욱의 지도밑에 실행된 국가방직공업부의 중점연구항목 “흡혈섬유실험”과 중국 장애자련합회의 중점항목 “SS의료용 인공해면 중간실험”은 큰 성과를 이룩했다. 흡수기능이 약하고 면부스레기가 많은것으로 안과수술에서 구식소독면은 많은 실패를 초래했다.

박동욱교수가 연구제조한 의료용 인공해면은 안과수술 특히는 백내장환자의 복명수술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고 국외의 기술독점을 타파하고 수입에 의존하던 국면을 돌려세웠다. 현재 이 제품은 국내수술분야는 물론 국외에 수출되고있다.

그리고 표면층 이온화 원리와 방법으로 개발한 SS형 의학용 합성해면제품은 이미 대량으로 백내장 시력회복, 근시교정 등 안과수술과 기타 현미외과수술에 응용되고있으며 그 계렬제품은 국내외시장에서 각광을 받고있다. 그리고 그리코리드 단량체(交酯单体)는 이미 대량으로 국외에 수출되고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성공한 고강도 히드로켈 탄성재료인 “의학용 랭동보존재료”제품은 이미 생산에 투입되였고 “자체 윤활형 의료용도관”은 이미 중국과 미국의 발명특허를 취득했다. 그외 PET인공혈관, 각막상피보호제, 흡수성봉합선, 흡수성 점착방지막, 히드로켈형 인공연골, 흡수성 골절내부 고정기, 인공뼈—연골복합체 등 일련의 의료기구와 인공기관 연구개발에서 성과를 이룩했다.

관련 제품은 이미 림상효과성과 안정성도 확인됐다. 그가 이끄는 연구팀은 선후로 4차나 성급, 부급 과학기술진보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1년 첫진으로 국가원에서 발급하는 정부특수수당금 수상자로 됐다. “응용개발연구는 목표가 뚜렷하고 기초연구는 탐색성연구에 속한다. 기초연구는 그 무엇을 발명하는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밝히는것이다”. 그의 주장은 분명했다.

일찍 20세기 80년대말기 박동욱교수는 “고분자재료는 인체조직의 재생을 도울수 있다”는 새로운 리념으로 신경재생과 중추신경재생의 조직공학연구 및 체내 분해히드로겔과 신경세포와의 상호작용 메카니즘의 연구를 진행했다. 1994년 그는 또 “재생의학회복”의 새로운 개념을 제출했다. 1998년 박동욱교수는 환절동물행위에 대한 형모(形貌)학 의존성연구를 통해 조직재생의 형모 방생의 새로운 관점을 제출했다.

이 관점에 근거해 또 기송마칭(时空匹配)의 세포 스켑홀드(支架)의 새로운 모델을 제출했다. 과학계에서는 화학적요인이 신경생장을 지배한다고 인정했다. 박동욱교수는 화학적요인을 포함해 환경적요인도 존재할것이라고 가설했다. 만일 이 견해가 성립되면 신경생장에서 화학적요인을 포함해 환경의 형태적요소도 중요한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경재생에 리롭게 설계된 인공조직은 신경재생을 다그칠수 있게 될것이다. 박동욱교수는 “고분자재료의 인체와 동물 조직 재생추진리론”을 내놓은 중국의 첫 과학자이다. 1997년부터 박동욱교수는 학과간의 협조를 목적으로 조직공학연구소를 세우고 국내 최초의 전국조직공학세미나를 기획조직했다. 2000년 그는 중국생물의학 공학학회의 주최하에 “조직공학 학과조”의 제1임 조장을 담임했다.

(5)
장기적으로 과학연구 제1선 지도사업을 담당하고있는 박동욱교수는 현대과학연구는 여러 분야 사이의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며 집단지혜에 의존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수십년간 박동욱교수는 일터와 연구팀이 여러차례 바뀌는 상황을 마주했으나 시종 연구성원들과 밀접히 협력해 뛰여난 성과를 따냈다.

20년간 그는 선후로 중국과학원, 일본 교도대학, 카나다 토론토대학, 중국 약품생물제품검사소, 한국 서울대학, 북경리공대학, 청화대학, 북경과학기술대학, 중국의학과학원, 수도의과대학, 중국군사의학과학원, 중국 방직과학연구원 등과 긴밀히 합작해 효과적으로 공동연구와 학술교류, 인재양성 등 사업을 추진했다.

현재 박동욱교수는 여전히 몇개 대학과 연구소의 객원교수와 박사생지도교수로 활약하고있으며 중국화학회 고분자전업위원회 회원, 일본 고분자학회 통신회원, 중국방직공정학회 리사, 북경화학섬유학회 리사, 중국항공학회 생물의학 재료전공위원회 위원을 담임하고있다.

과학을 위한 그의 언약은 수십년의 끈질긴 노력으로 드디여 세인의 인정을 받았다.

( 중앙인민방송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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