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걸출한 초기 공산주의 리더 리동휘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4월7일 08시45분    조회:632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동휘

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 백인》(5)

 
성재 리동휘선생

리동휘선생은 조선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태여났고 호는 성재(誠齋)이다. 선생의 아버지 리승교(李承橋)는 연해주 대한인로인단의 대표로 3•1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등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선생이 부친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평생을 공산주의운동에 투신할수있었던 것은 이러한 집안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의 소개로 18세 때 단천군수의 통인(通人)이 된 선생은 1895년에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 입학하여 신식무관교육을 받고 강화진위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선생은 1907년 일제의 구한국군 군대 강제해산에 분개하여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05년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는데 그 방편으로 기독교를 수용하고 특히 구국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세우고 국학 및 근대학문과 군사교육을 병행하여 구국인재양성의 요람으로 활성화시켰다. 또한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리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련루되여 또다시 투옥되였다.

1911(또는1912) 년 리동휘선생은 가족과 함께 중국 동북지방 북간도로 망명했다. 여기에서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의 결성(1912), 라자구무관학교(羅子溝武官學校)의 설립(1914)에 참가했다가 일본관헌의 추적을 받고 마침내 1915(또는 1913)년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로 옮겨갔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 권업회(勸業會) 활동에 참가한 그는 일본측 모함으로 제정 로씨야로부터 독일의 간첩으로 몰려 한때 체포되였으나 로씨야 혁명후 석방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뒤덮고있던 20세기초, 인류사상 가장 큰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1917년 부패한 짜리 로씨야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일어나 첫 무산계급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10월혁명의 승리는 각국 무산계급 투쟁을 고무하여 주었고 세계 피압박 인민과 피압박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허덕이던 아시아 민족해방운동도 고조되였다. 조선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그리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은 전례없이 고조되였다. 하지만 각국의 비폭력적 해방운동은 세계 렬강의 비정한 외면과 제국주의, 봉건주의의 피비린 탄압을 받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수많은 선각자들이 새로운 민족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부 의사들은 폭탄 투척을 감행하고 일부 의사들은 일제 괴수와 추종자들에 대한 암살을 목적으로 한 의렬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강대국에 환상을 품고 외교적인 노력을 하였고 더욱 많은 선각자들은 중국 동북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무력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시기 로씨야 10월 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아시아 각국에 맑스주의 리론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진보적 인사들도 공산주의 리론을 접하고 또 이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로씨야의 10월혁명 성공에 고무된 리동휘선생은 특히 일본의 씨비리아 출병문제와 관련하여 로씨야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곧 조선독립 달성의 길이라 생각하게 되였고, 1918년 김립(金立)• 류동렬(柳東說) 등 로씨야에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 및 김알렉산드라•오하묵(吳夏默) 등 귀화한 조선인들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1919년 상해에는 688명(조선인 총수) 우리 민족 선각자들이 맹활동하고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철혈단, 구국모험단, 애국부인회 등 수많은 단체들을 결성하여 반일투쟁의 길을 모색하고있었는데 그해 9월 조기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 도착한후 리동휘는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한편 공산주의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20년 5월 그는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과 손잡고 공산주의소조를 건립하고 1921년 1월에는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된다. 그리고 려운형과 김립(金立), 안병찬(安秉瓒) 등이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들은 상해에 《유신인쇄공장》을 세우고 맑스주의 저작을 번역, 출판하고 직접 진보적인 잡지도 꾸리면서 맑스-레닌주의를 적극 전파하였다.

한편 리동휘는 김하규 등을 연변에 파견하여 공산주의소조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변에 첫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룡정의 대성중학교, 광흥중학교, 은진중학교 학생들속에 건립되였다. 조기 공산주의자들은 로농혁명의 길, 로씨야 혁명의 길을 선전함으로써 적지 않은 선진인물들이 협애한 민족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회혁명을 지향하게 되였다.

민족주의사상에 제한되여있던 구춘선을 대표로 한 국민회의 많은 지도자들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연변에는 1300여명 조선족이 조기 공산주의단체들에 가입하였다. 이사이 리동휘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 제2차대표대회에 출석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인 레닌을 만나 자금지원을 받기도 했다.

상해 림시정부 수립후 군무총장을 맡았던 리동휘는 1920년 국무총리로 나섰지만 좌우익간의 치렬한 대립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쏘련에서 보내온 지원금 40만루블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겨 리동휘를 위수로 한 고려공산당은 상해림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리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1923년 동북의 녕고탑(寧古塔)에서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적기단(赤旗團)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적기단은 《우리들은 민족혁명과 무산계급 공산혁명의 어느 것도 구애되지 않는다. 조선민족의 혁명이라면 추진하는 것이다, 돕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과 같이 민족혁명과 공산혁명의 동시 수행을 표방한 무장투쟁단체였다.

이 선언에는 넓게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좁게는 리동휘의 혁명로선이 함축되여 있다고 할수있을 것이다. 적기단은 중국 동북지방의 몇곳에 무장단체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 무장단체에는 리동휘의 영향아래 있는 무장군인들이 쏘련령 이만지방으로부터 옮겨와 배치되였다. 안도현 내두산에 있었던 150명과 액목지방에 있었던 200명의 무장부대가 그 대표적인 경우였으며 그중에서도 오성륜(吳成崙)부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다.

리동휘는 만년에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는 설도 있었으나 아들 리영일이 쓴 《리동휘전기》가 전해짐으로써 1927년 이후 그가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에서 활동했음이 밝혀졌다.

《리동휘전기》에 의하면 1927년에100여명의 공산당원이 검거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울라지보스또크의 교포사회가 개최한 군중대회에서 리동휘는 《이 혁명운동의 전선에서 투쟁하는 전사는 되지 못해도 이 전선에서 용감히 투쟁하다가 희생된 세계 자본국가 감옥에서 고통받는 혁명자들을 위해 MOPR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려고 결심했다》고 연설한 후 울라지보스또크시의 MOPR 시간부 조직지도원이 되여 1929년까지 이 조직에서 활동했다.

이후 1930~35년에 그는 쏘련의 변강(邊疆) MOPR에서 간부로 활동했는데, 그 당시 원동(遠東) 변강의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도시나 농촌은 물론 어장, 탄광, 목재소 등에서까지도 MOPR의 회원이 되여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리동휘선생은 1932년 10월 MOPR에서의 열성적 활동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리동휘선생은 1935년 1월, 사업시찰중 심한 눈보라속에서 독감에 걸렸다.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新韓村)의 자택으로 옮겨졌다가 1월 31일 세상을 하직하였다, 2월 4일 울라지보스또크 피르바 야레츠카 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였으며, 뛰여난 풍모와 지도력을 갖춘 리동휘선생은 애국계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서 탁월한 기여를 한 초기 공산주의자였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편집자 주: 흑룡강신문한국지사를 통하여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한 조선족 동포 이 강씨의 취업 성공기이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연마하면서 적지 않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으나 결국은 본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 회사 임원들의 감동을 이끌어 냈고,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 2013-05-09
  • 청도주꾸지수산물유한회사 김대룡리사장 민족력사대형가무극 기획 10만원으로 교육기금회 설립  조선족문화원을 세워 민족문화를 고양할터 청도주꾸지수산물유한회사 김대룡리사장의 일가견이다. 연변대학졸업후 돈화시 공상은행의 책임자로, 길림시교통국의 간부로 몸담갔던 김대룡씨가 하해한건 1996년,  섬서...
  • 2013-05-08
  •  편집자 주: 흑룡강신문한국지사를 통하여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한 조선족 유정초 씨의 취업 성공기이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연마하면서 적지 않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으나 결국은 본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 회사 임원들의 감동을 이끌어 냈고,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
  • 2013-05-07
  • 20여년간의 복장경험으로 도전에 나선 녀성 리영실 브랜드평민화로 시장을 개척 복장가계와 복장업체가 군림한 청도에 자기가 직접 디자인한 복장으로 대기업의 틈새를 파고드는 녀성이 있어 화제다. 연길태생인 리영실(1967년생)은 복장재단에 소문 높은 어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재봉기술을 배웠고 21세 때에는 연길시 번...
  • 2013-05-06
  •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13)   각 책들에 다르게 실린 리홍광의 초상사진. 《우리의 하늘에 높이 걸려서 승리의 군기(軍旗)를 비춰주는 홍광 돌격하라! 우리의 제1로군! (高悬在我们的天空中 普照着胜利军旗的红光 冲锋呀我们的第一路军)》 항일전쟁시기 동북인민혁명군의 총지휘였던 양정우장군(19...
  • 2013-05-06
  • 연길 박리문화용품상사 리성룡사장 창업스토리     리성룡 – 그가 벌인 사업은 규모가 작지 않다. 그렇다고 구멍가게처럼 작은것도 아니다. 연길 서시장의 한 모퉁이 300여평방메터가 되는 면적에 박리문화용품상사(溥利文化用品商社)를 차려놓았다.   “제가 젊었을 때 엄청 어렵게 살았어요. ...
  • 2013-05-06
  • 연길 서시장부근 ‘소리나라’음반가게의 허봉남사장   20년간 줄곧 음반산업이란 한 우물만 판 사나이-허봉남사장에 대해 주위에서는 연변조선족음반역사의 산증인이라 칭한다. 화룡에서 태어난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어떻게 하면 가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고민하던 중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장사...
  • 2013-05-03
  • 엄광철 월드옥타 제10통상위원장 인터뷰 지난 4월 16일부터 19일까지 부안에서 열린 월드 옥타 세계대표자대회 둘째 날 저녁, 만찬과 함께 ‘회원 친교의 밤’이 시작됐다. 각 지회별로 춤과 노래로 저마다의 장기를 뽐냈다. 대련지회 차례가 됐을 때 전 지회장인 엄광철 제10통상위원장이 무대에 올라와 신나게...
  • 2013-05-03
  • 남만 중국공산당조직 최초의 조직자 리동광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12) 리동광동지는 남만 중국공산당조직의 최초의 조직자이고 지도자이며 항일련군 제1군과 남만항일근거지 창설자의 한사람이다. 리동광(李東光)은 양정우, 리홍광과 함께 남만유격대를 창건하였으며 남만의 《5.7》봉기를 조직하고 지...
  • 2013-05-02
  • 청도야미화장품유한회사 총경리 최림 저자세관리모식으로 -수출형기업에서 내수형기업전환에 성공 청도위방에 있는 는 불경기로 부도직전까지 갔던 회사로서 종업원들을 한가족처럼 뭉쳐놓았기에 재생한 경험을 갖고 있다. 연변재무학교를 졸업하고 무역회사 등 다양한 업종에서 몸을 담았던 최림(1962년생)씨는 1999년도에...
  • 2013-04-2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