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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예술의 한떨기 꽃 함순녀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4월12일 09시24분    조회:6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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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함순녀


외태머리소녀 전국인대 대표로 되기까지

공식석상에서 늘 빛갈고운 한복차림이였던것과는 대조적으로 인터뷰시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은 함순녀(48세)한테서는 차분한 카리스마가 풍겼다. 현재 연변가무단 부단장이자 연변무용가협회 주석인 함순녀는 오로지 민족예술에 대한 끈질긴 추구로 정열의 땀방울을 민족예술무대에 휘뿌려왔다.

예술의 전당을 노크하다
늘씬한 체격에 외태머리를 곱게 땋아드리운 얌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함순녀는 유치원시절부터 춤을 잘 춰 동네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정도로 무용가의 자질을 타고났을뿐만아니라 학습성적 또한 우수해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연길시제1중학교에 추천생으로 입학했다.

1978년, 함순녀가 초중 2학년때였다.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서는 “10년 대동란”이후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하게 되였는데 학생모집범위는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학생들이였다. 1964년에 출생한 함순녀는 시험을 칠 생각도 않고있는데 어머니가 말했다 “래년에 칠 시험에 대비해서 올해 미리 상황파악을 해두면 좋을것 같구나.”

어머니한테 등을 떠밀리워 시험장에 도착한 함순녀는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연변 각지에서 몰려온 수험생들로 시험장은 발디딜 틈조차 없었던것이다. 수험생들가운데는 어려서부터 무용을 전공해온 학생들도 적지 않았는지라 그는 합격에 대한 하등의 기대도 없었다. 하지만 50명만 뽑는 1차 시험에 덜컥 합격을 해버릴줄이야. 함순녀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날듯한 기분도 잠시, 학교측에서는 합격생들로 무용강습반을 조직한후 2차 시험을 친다고 통지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무용강습반 통지서는 왜서인지 바다에 돌을 던진 격이였다. 기다리다 지친 함순녀는 어느날 무용강습반이 끝났다는 소식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쳐 깨났다. 꿈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딸에게 당장 예술학교를 찾아가보라고 재촉했다.

학교로동에 참가하려고 로동복차림에 삽까지 멘 함순녀는 연길시제1중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둔 연변예술학교문앞에서 한참을 서성대다가 끝내 마음을 다잡고 예술학교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복도에서 무용교원 박용원선생님과 마주쳤다.

“왜 이제야 왔어, 강습반이 끝난지도 이슥한데. 모두들 니가 보이지 않아 얼마나 아쉬워했다구.”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교 담임선생님이 공부를 잘하는 함순녀가 아까와 무용강습반 통지서를 몰래 감춰뒀던것이다.

박용원선생님은 함순녀를 무용련습실로 데려갔다. 이윽고 함순녀 한명을 위한 특수한 보충시험이 시작됐다.

선머슴같이 짧은 헤어스타일에 낡은 꽃적삼을 입고, 하의는 학교 교원의것을 림시로 빌려입은 함순녀의 모습은 촌스러웠지만 몸짓은 우아했다. 전문적인 훈련도 거치지 않은 소녀가 그토록 동작을 정확하게 구사하고 표현력까지 구비했으며 더욱 중요한것은 만에 하나가 날가말가한 무용수의 몸매를 가졌다는 사실이 시험관들로 하여금 만장일치로 손을 들게 했다.

“합격입니다.”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의 문이 그를 향해 활짝 열리는 순간, 14살의 녀자애는 드디여 덧이를 드러내며 쌩긋 웃었다. 꿈을 향한 드팀없는 외고집이 우여곡절을 제치고 그로 하여금 예술의 전당으로 향한 첫발자국을 떼게 한것이다.

“금은 언제든지 빛을 발한다”
1.58메터에 35킬로그람밖에 안되는 가냘픈 몸매의 소유자인데다 나이도 가장 어렸던 함순녀는 자신이 다른 동학에 비해 많이 뒤처져있음을 잘 알고 이를 악물었다. 아침엔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저녁엔 남들보다 늦게 돌아갔다. 동이 늦게 트는 겨울에도 어슬새벽에 일어나서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가 발볌발볌 문을 나서서 불도 켜지 않은 어둑어둑한 무용실에서 땀흘려 련습하곤 했다. 반년후, 한차례 실기시험에서 학급담임인 장영순선생은 동학들이 서로를 평가하게 했다. 그런데 너나없이 모두 함순녀를 잘한다고 짚을줄이야. 그제야 함순녀는 어깨를 펼수 있었다. 그리고 꿈을 향한 그녀의 질주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4년 동안 해마다 3호학생으로 당선됐고 졸업식에서는 동학들중 유일하게 “우수졸업생”이란 칭호를 수여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서는 이 “우수졸업생”을 학교에 남기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연변가무단의 최옥주선생님이 종주먹을 쥐고 함순녀를 찾아왔다. 최옥주선생님은 함순녀에게 해방군예술학원에 연수를 보내 발레무용을 전공시키겠다는 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 함순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황차 함순녀도 무대에 서서 자신의 기량을 맘껏 뽐내보는것이 꿈이였던지라 최옥주선생님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1981년 8월, 연변가무단에 출근한지 며칠 안되는 함순녀는 파격적으로 해방군예술학원에 가 발레를 연수받게 되였다. 그리고 얼마뒤 가무단 지도부에서는 또 상해무용학원에서 조직하는 무용배우연수반에 함순녀를 추천하기로 했다. 이같은 조직의 배려에 함순녀는 더욱더 련습에 매진했으며 연수를 받는 기간 체계적으로 현대무용, 고전무용, 민간무용, 발레무용 등을 높은 성적으로 수료하였다. 50명 연수생가운데서 모든 학과목에서 최고점수인 5점을 따낸 연수생은 함순녀뿐이였다. 함순녀에게 중국고전무용을 가르친 동기운은사는 함순녀더러 학교에 남으라고 극구 설복했지만 함순녀의 마음속에는 꼭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뿐이였다. 자신에게 배움의 기회를 준 연변가무단 지도부는 그가 언제든지 기댈수 있는 울타리이고 연변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활무대라 생각했기때문에 아무런 미련 없이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벅찬 희망에 부풀어 돌아온 그였지만 정작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나이도 어리고 무대경험도 없는 그에게 좀처럼 주역을 맡을 기회가 차례지지 않았기때문이였다. 20살도 채 안되는 애된 처녀는 의기소침해 련습이 끝나면 늘 뒤자리에서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선생님이 그를 불렀다.

“기회는 준비된자에게 언제든지 찾아오는 법이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꼭 볕을 볼 날이 있을것이다.”

짧은 말이였지만 함순녀는 용케도 알아들었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묵묵히 주어진 배역을 소화하면서 다시 “련습벌레”로 돌아갔다.

그러던차 전 주 중청년무용배우콩클이 있게 된다는 통지가 내려왔다.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제대로 펼쳐보일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후에 남편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 김광희씨를 찾아가 발레의 파트너가 되여달라고 제안했다.

누가 재촉해서 하는 련습도 아니였지만 함순녀는 강도 높은 련습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대수 응수하던 김광희씨도 함순녀의 모습에 감화를 받아 련습에 깊이 몰입했다. 드디여 경연이 있는 날 그들 둘은 발레극 “돈끼호떼”의 한단락을 열연하여 그번 콩클에서 2등상을 수상했다. 이는 연변무용사상 처음으로 발레를 무대에 올린것으로 된다. 이듬해 함순녀는 무용 “장고춤”으로 “전 주 중청년무용배우콩클”에서 단연 1등상을 따냈으며 “전 성 중청년무용배우콩클”에서 2등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6년초, 당시 룡정시문공단에서 안무가로 활약하고있던 리승숙선생님이 함순녀를 찾아와 자신이 창작한 독무 “수양버들”에 출연해달라는 제의를 해왔다. 이 작품은 1986년 10월 북경에서 개최하는 “제2차 전국무용콩클”에 내놓을 작품이였다. 조선족의 무용은 흔히 물동이, 부채, 장고 등 소도구를 쓴다. 그러나 “수양버들”은 소도구가 아닌 순 신체적언어로 표현하는 무용으로서 더욱 높은 기교를 요했다. 함순녀는 단 하루의 휴식일도 없이 10개월간 꼬박 무용련습에만 몰두하였다. 강훈련끝에 완성된 무용 “수양버들”은 “제2차 전국무용콩클”에서 창작 3등상, 표현 3등상이라는 좋은 성적을 따냈다. 발레무용과 조선민족무용을 올곧게 배운 함순녀는 발레무용의 섬세함, 과학적인 기교와 조선민족무용의 부드러움과 끈기를 조화시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샘물의 흐름처럼 가장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중국조선족녀성의 외유내강의 정신세계를 표현하였다. 이로써 함순녀는 자신의 립지를 보다 든든히 굳히게 되였다.

어느새 거의 모든 극의 녀주인공배역이 함순녀를 기다리고있었다. “금이면 언제든 빛을 발한다”고 굳게 믿고있던 그의 다년간의 노력이 가져다준 결실이였다. 극의 스토리를 리해할줄 알고 손짓, 몸짓에 미묘한 감정을 실어낼수 있으며 깊이있는 인물을 부각해낼수 있는 기량을 갖춘 배우라는 평이였다.

무대뒤로 이어진 무대
거의 20년을 민족의 무대에서 함순녀는 자신의 무용사업에서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가 무용리드를 담당한 “장백의 정”은 문화부의 최고상 “문화대상”, “5가지 하나”프로젝트상을 수상했으며 제6회 중국예술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 종목은 제2회 중국무용 “련꽃상” 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춘향전” 또한 문화부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다년간 함순녀는 일본, 미국, 한국, 조선, 향항 등 나라와 지구에서 중국조선족의 무용을 선보여 관중들의 열렬한 갈채와 전문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0년, 그는 국가1급배우로 평의됐으며 2002년에는 “길림성우수전문가”, “길림성기능형인재령역전문가”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함순녀는 자신의 무대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그것은 절강성 녕파에서 제2차 전국 “련꽃”컵 무용콩클에 참가할 때였다. 리허설을 하고있는 그에게 이번 시합을 끝마치고 돌아가면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발레무강의를 하도록 배치되였다는 조직의 통지가 전해졌다. 그때 37세였던 함순녀는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무대임을 느꼈다.

고비에 맞띠울수록 더더욱 랭정하고 침착해진다는 함순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르는 그번 공연에서 몰입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오며 20년 동안의 배우생활에서 익힌 모든 기량을 남김없이 보여준 자신에게 그것으로 됐다고 안위를 했다. 그의 열연은 관중들의 공명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번에 “장백의 정”은 대형무용시부문 은상을 수상하고 함순녀는 “녀주역우수표현상”을 수상했다.

무대를 떠난 뒤 함순녀는 2001년 10월부터 2007년까지 약 6년간 연변대학 예술학원 객원교수로 예술학원 무용학부의 학생들에게 발레를 가르쳤다. 2006년, 함순녀가 가르친 제자 최령은 전국 “복숭아”컵 무용콩클에서 발레로 결승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 상해, 료녕, 북경에 있는 예술대학에만 발레무용학과가 있었고 그들이 발레콩클의 모든 상을 싹쓸이하던 상황이였다.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그것도 발레슈즈를 신은지 반년도 안되는 학생이 결승전에 진출하자 무용계의 전문가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최령은 후에 북경무용학원 입학시험에서 100명가운데서 9등이란 높은 성적으로 합격됐다.

2009년 1월, 함순녀는 조직의 배치에 따라 무용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형조선족가무 “장백산아리랑”중의 남녀군무 “학춤”의 창작을 그가 맡았는데 이 “학춤”은 2009년말 “전 주 예술절”에서 창작 1등상을 수상했다.

2011년, “전국소수민족회보공연”을 맞아 연변가무단에서는 “장백산아리랑”을 새롭게 개편, 함순녀는 남녀쌍무 “정연”의 창작임무도 훌륭하게 완성해내며 창작면에서의 재능을 려과없이 보여줬다.

2009년 6월부터 함순녀는 연변가무단 부단장직을 맡고 무용부문과 대외련락부문을 책임졌다. 현재의 연변가무단 무용부에는 56명의 끌끌한 젊은 무용배우들이 활약하고있다. 함순녀는 이 방대하고 업무자질이 높은 배우진영의 기량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련습방식을 고안했다. 예전에는 배우들끼리 기량을 련습하던 방식으로부터 업무자질이 높은 로배우들이 신진들을 이끌도록 했으며 또 새 작품을 련습할 때 안무선생님들이 직접 요구하는 기량을 기본공훈련교수에 편입시켜 배우들을 훈련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취하도록 했다. 경쟁속에서 진보가 생긴다고 배우들의 열성도 전례없이 높아져 난방설비도 없는 곳에서 겨우내 련습하였지만 누구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2011년 새로 개편된 대형조선족가무 “장백산아리랑”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연변가무단의 대외련락을 책임진 함순녀는 국내외 문화교류 및 공연시장진출면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성재정청으로부터 300만원의 자금을 쟁취하여 가무단의 악기를 갱신함으로써 연변가무단 교향악단을 건립할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연길시담배공장과 손잡고 “장백산”브랜드를 홍보함으로써 매년 100만원이라는 공연수입을 올리고있다.

연변가무단은 얼마전 북경에서 열린 제4회 전국소수민족 문예축전에 성내 유일한 대표로 참석, 150여명 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대형창작가무 “노래하노라 장백산”으로 축전의 최고상인 극종목(剧目) 금상을 획득했다. 동시에 최우수연출상, 최우수극본상, 최우수무대예술상, 최우수배우상, 최우수종목상, 최우수신인상 등 6개 상을 싹슬이했으며 길림성대표단은 우수조직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함순녀는 말한다. “현재의 연변가무단도 훌륭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새시대의 발걸음에 맞추려면 전통문화의 토대우에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춘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 시대성, 예술성이 결합된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여야 군중들의 날로 늘어나는 문화수요를 만족시킬수 있다.”

2010년 8월, 함순녀는 주문련 무용가협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연변무용가협회는 지난 시기 조선족무용의 저력과 연변을 만방에 알리는데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아직도 여러 면에서 부진상태에 있음을 감안한 함순녀는 무용대오의 자질제고와 신예무용대오양성 등을 협회사업의 돌파구로 삼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2011년 저명한 무용가 최옥주선생을 모시고 무용창작강습을 개최했으며 주교육국과 손잡고 전 주 유치원, 소학교 교원 무용강습반을 조직했다. 활동마다 높은 참여률을 보이면서 그들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꾸려나갈 계획을 잡고있다.

2010년 8월에는 중국무용가협회가 주관하는 “중국당대조선족무용 포럼 및 전시”대형시리즈활동을 연변무용가협회에서 주최하여 원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대회는 국내외 무용대가들을 모시고 연변무용의 현황과 나아갈 방향을 진맥받았으며 중국조선족무용사상 빛나는 한페지를 장식한 대형행사로 기록되였다.

부여받은 신성한 권리 행사
함순녀는 예술가로서 빈틈없는 자세를 보여왔을뿐만아니라 사상각오면에서도 시종일관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해왔다. 일찍부터 공청단중앙 제12기 대표 겸 주석단 성원, 성청년련합회 상무위원, 전국청년련합회 위원, 주청년련합회 부주석을 력임했으며 제10기, 제11기 주정협 위원, 제10기, 제11기 성인민대표대회 대표,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됐다.

올해까지 다섯번째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한 함순녀는 인민이 부여한 신성한 권리를 알차게 행사하고있다. 4년 사이 중국조선문출판물 공공서비스체계와 열람플랫폼을 건설할데 관한 제의, 사법시험개혁에 관한 6가지 건의, 도문—청도행 기차를 운행할데 관한 건의, 연변지역에 한국어능력시험 인원수를 늘여줄데 관한 건의, 일반고중학생모집행위를 규범화할데 관한 건의, 연변지역출판분야 기술인원의 초급, 중급 직업자격시험에서 조선문을 사용할데 관한 건의 등 실질적인 문제들을 제기했고 그가운데 연변지역에 한국어능력시험 인원수를 늘여줄데 관한 건의 등이 해결을 보았다. 전국적으로 조선족이 제일 많이 집결되여있는 연변에 2008년에 한국어능력시험인원수가 천명밖에 차례지지 않아 모두들 불편을 겪었지만 2009년에 6천명이란 인원수를 할당받아 고향에서 시험을 치를수 있는 혜택을 향수했다. 2011년에는 조선족들의 인당 도서열람량이 전국평균수준에 비해 매우 낮은 상황을 감안해 “중국조선문출판물 공공서비스체계와 열람플랫폼을 건설할데 관한 건의”를 제기하여 관련 부문의 중시를 받고있다.

일찍 녀자일생중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민족예술무대우에서 꽃피운 함순녀는 오늘날 과거를 돌이켜보면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마음가짐을 바로했으며 자신에게 부끄러움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예술학교 시험에 합격되던 날부터 자신의 모든것을 무용에 걸기로 한 어린 녀자애는 오로지 민족예술의 활무대에서 배우로서 꽃피기 위해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올곧게 달려왔으며 오늘날 정녕 화사한 한떨기 꽃으로 민족예술무대에 활짝 피였다.

연변일보 리련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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