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생화학분야의 유명한 조선족학자 윤종주교수
40여년 동안 대학교수로, 생화학학자로 생활해왔던, 그래서 조금은 고리타분한 느낌일거라는 기자의 선입견은 인터뷰 시작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76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열에 차넘쳐 근 반세기에 걸쳐오는 자신의 의학자생애를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윤종주교수, “우리 조선족의 저명한 과학자, 교육자”라는 항간의 평가가 허투로 나온 말이 아님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수십년간 인류의 암정복과 건강한 삶을 위해 하루와 같이 학문을 갈고 닦아온 생화학계의 대가다운 그의 세심하고 빈틈없는 모습에서 진정 “준비된 학자”란 무엇인지를 한눈에 알수가 있었다.
"어머니 은혜는 하늘 같고 나라의 은혜는 바다 같다"
윤종주는 1935년 1월 길림성 연길현 조양천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가 11살 나던 해에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면서 4남매를 키우는 중임이 어머니의 가냘픈 어깨에 놓이게 되였다.
“그때 막내동생이 3세밖에 안되였는데 어머니는 매일 막내동생을 업고 일하러 다니면서 어떻게든 아버지가 없는 저의 형제들을 공부만은 꼭 시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셨지요…”
그때 학교에 가려면 수풀이 우거진 산길을 거쳐 근 20여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지만 어머니가 하냥 아들의 손을 잡고 수풀이 끝난 어귀까지 바래다주었기에 윤교수는 차디찬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도 초신을 신고 20여리 등교길을 한달음에 달려갈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윤교수는 겨울에도 베치마바람으로 길거리에서 자신을 바래다주며 어서 학교에 다녀오라고 손짓하던 어머니의 그 모습을 잊을수가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뼈빠지게 일해 공부시키는데 어머니께 보답하는 길은 공부를 잘하는것밖에 없다.” 어린 마음에도 윤종주에게는 이런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한후에는 학교에 갔다 와서는 어머니를 도와 밭일을 하는 한편 “등꼬쟁이”를 켜놓고 밤새도록 공부했다.
가을철이 되면 그는 또 어머니를 도와 소수레를 몰고 감자실으러 산으로 오르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하군 하였다. “종주야, 공부를 하는건 수레를 끌고 산으로 오르는것과 같단다. 땀을 흘리지 않고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 산으로 오를수 없듯이 공부도 마찬가지란다…” 어머니의 이 말씀은 먼 후날에도 윤교수의 힘들고 어려운 과학탐구의 길에서 하냥 분발하라고 힘을 북돋아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였다고 한다.
1950년 3월, 윤종주는 높은 성적으로 연변고급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고중에 입학하여 룡정에 하숙집을 잡게 되면서 달마다 하숙집에 6말씩 쌀을 내야 했는데 어머니는 달마다 어김없이 의란에서 룡정까지 소수레를 몰고 쌀을 싣고 와서는 하숙집에 부리워놓고 돌아가군 했다. 그럴 때마다 송구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섬약한 뒤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군 했던 윤교수는 하늘같은 어머니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는지 잘 알고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윤종주는 고중시절부터 조학금을 받을수 있었고 공부를 잘해 해마다 장학금도 타게 되였다.
“나라에서 돈까지 대주면서 공부를 시키는데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꼭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거라”,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였다. 윤종주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나라에 보답하는 길은 공부를 잘하는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대학입학시험이 다가왔다. 장남인 자기를 바라고 열심히 살아오시는 어머니를 두고 멀리 갈수 없었던 윤교수는 연변에서 무엇을 하면 가장 출중하게 해낼수 있는지 깊이 고민하였다. 문득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당시 연변에서 가장 이름있는 학자로 손꼽히고있었던 연변대학 의학부의 로기순박사가 떠올랐다. 또 38세 나이에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로박사 계시는 의학부를 지망하자. 그분의 학생으로 되여 나도 앞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덜어주는 출중한 의학자가 되자.”
그리하여 윤종주는 1952년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때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의학부의 제1기 학생당지부서기로 활약하기도 했다. 졸업시 우수졸업생으로 뽑혔던 그는 모교의 생화학 강좌교원으로 남게 되면서 생화학학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농민의 아들이 벽지에서 반짝이는 의학박사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대학교 강사로 교단에 오르던 날을 윤교수는 언제나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있는 첫 교수안을 수시로 펼쳐보면서 수십년간을 의학자로, 교육자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햇내기대학졸업생이 대학생을 잘 가르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가, 교수안을 학생들이 알아듣기 쉽게 재미있게 짜는가 하면 모든 강의내용은 외우고 또 외워 멋진 강의를 학생들에게 선물하였다.
1958년, 햇내기대학교 교원인 윤종주에게 북경의과대학 생화학강좌에 가 1년간 연수할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였다. 북경의과대학에서 윤종주는 중국생화학분야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중국과학원 원사 류사직교수와 영양생화학자 장창영교수 그리고 효소전문가 정연개교수 등 명망있는 학자들의 지도밑에 생화학리론, 과학연구방법과 교수법을 체계적으로 배워 진정한 의학자의 길은 어떤것인지,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향후 과학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깨우치게 되였다.
50년대말부터 연변의 부분적지구에 극산병, 대골절병, 지방성갑상선종 등 지방병들이 만연되기 시작하였다. 지방병으로 고통에 모대기는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윤종주는 우선 고향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는것이 한 의학도로서의 응당한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하고 60년대부터 지방병연구소의 일원으로 동료들과 함께 연변의 산간지대를 돌기 시작하였다. 삭풍이 뼈를 에이는 엄동설한에도 윤종주는 목에 청진기를 걸고 심전도를 메고 산간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며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지방병의 발병사와 류행병학의 법칙을 조사연구하였다. 또 수년간의 조사연구로 그는 지방병연구소조의 성원들과 함께 연변지역극산병류행병학 조사보고에 관한 7편의 론문을 써내여 연변지역 극산병예방치료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문화대혁명기간 의학원의 모든 연구사업이 정지상태에 있을 때에도 윤종주는 학문을 계속 연구해나가야 한다는 신념만은 꺾지 않았다. 그는 로소3대가 살고있는 17평방메터의 작은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 12시가 넘도록 학술서적을 탐독하면서 다발성질병의 연구를 위해 “젖산탈수소효소아이소자임의 림상의의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실험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반복적인 실험을 얼마나 하였을가…드디여 그는 한천전기영동법으로 혈청젖산탈수소효소 아이소자임을 분리해냈고 유르꾜프씨의 방법을 개량하여 직접 비색정량법으로 우리 나라 정상인과 여러가지 질병환자의 혈청젖산탈수소효소 아이소자임을 분리측정해냈다. 그후 그는 또 건강한 성인의 혈청 젖산탈수소 아이소자임 그라프와 그정상치에 대한 탐구, TNT중독, 간장질환, 극산병, 류행성출혈열환자의 혈청젖산탈수소효소연구에서 성과를 따내여 길림성과학기술성과상을 받아안았다.
1978년,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외국에 첫패의 류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윤종주는 우수한 성적으로 류학시험에 통과돼 일본으로 류학가는 배움의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의 렬악한 환경에서도 과학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윤종주에게는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는셈이였다.
윤종주가 류학간 곳은 일본 히로사끼대학 의학부 생화학강좌였다. 이곳에서 윤종주는 사도 가요미교수의 지도하에 간암발생과정중에서의 해독계통효소의 변화와 그 림상의의”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엿다. 이 항목은 아직 세상에서 누구도 해보지 않은 미개척지 과제로 모든것을 자기 스스로 모색하고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해야 했다. 근 2년간의 연구를 거쳐 드디여 “큰쥐간암발생과정에서 유도되는 UDP—그루크닐트란스페라제의 정제와 그 성질”에 관한 박사학위론문에서 간암 발생과정에서 해독계통효소의 일종인 UDP—그루크로닐트란스페라제가 배태형변이를 발생하고있다는것을 천명하고 이 효소를 분리해내고 제출함으로써 종양효소학분야에서 새로운 공백을 메웠다. 이렇듯 탁월한 연구성과로 윤종주는 일본 히로사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윤종주의 지도교수인 사도 가요미씨는 의학박사라는 빛나는 이름을 받은 윤종주에게 “연길과 히로사끼에도 반짝이는 별이 있다는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벽지에서 함께 노력하자”고 감명깊은 말을 남겼다. 사도교수의 의미심장한 이 말은 향후 윤교수의 학술연구에 더없는 동력과 힘이 되였다고 한다.
인류의 암정복과 건강한 삶을 위해 한획을 긋다
1982년 2월 귀국한 윤종주는 교수로 파격승진했다. 당시, 연변대학 의학부에는 박사학위를 가졌던 사람은 건국전 로기순박사 한분밖에 없었다. 류학생제도회복으로 의학부에는 윤종주를 포함하여 처음으로 3명의 박사가 탄생했던것이다.
그만큼 이들한테 거는 기대도 컸다. 윤종주는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신들메를 조이고 종양의 표식효소에 관한 연구에 달라붙었다. 그는 또길림성과학기술위원회 중점연구과제, 길림성위생청의 중점연구과제, 국가위생부의 중점연구과제들도 맡아 진행하였다.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 그의 학문연구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부 종양표식효소가 소화계통종양과 암전이병리 변화조직에서의 발현, 림상의의에 대한 계렬연구를 하였는데 이 가운데서 “새로운 간암표식효소와 그 성질에 대한 연구”는 1987년 국가교육위원회 과학기술진보 2등상을 수상했고 종양표식효소에 관한 계렬연구는 1991년 길림성고등학교 과학기술진보 개인상을 획득했다.
1995년, 윤종주는 연변대학 의학원과 한국 생명공학연구의 공동연구과제를 위하여 한국으로 갔다. 한국에서의 7개월간의 긴장한 연구를 거쳐 윤교수는 장백산의 “불로초”로 불리는 초종용에서 네가지 화합물을 분리, 정제해내고 그 구조를 밝혔는데 3가지는 새로 발견된것이다. 그는 또 동물실험을 통해 초종용의 항암, 항염증, 항산화, 항피로, 항로쇠 작용을 확인함으로써 초종용을 항암제, 항염증제뿐만아니라 건강식품으로도 개발할수 있음을 제시했다. 이 연구성과로 윤종주는 2002년 길림성과학기술진보 2등상을 수상했다. 또 윤종주의 장백산진주매의 화학성분과 약리작용에 관한 연구는 2005년 길림성과학기술진보 3등상을 수상했다.
근 반세기를 거쳐오는 생화학연구분야에서 윤종주교수는 국내외학술지와 국내외학술회의에서 20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였으며 전문저서와 번역서 5권을 출판하였다. 생화학분야에서의 뛰여난 그의 연구성과는 국가 해당부문은 물론 국외생화학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92년, 그는 국무원으로부터 특별수당금을 향수받게 되였고 1994년에는 전국변강지구 우수의학과학기술일군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제8기, 9기 인대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나라에 보답하기 위해 시작한 의학연구가 하면 할수록 빠져들어 반세기가 흐른 오늘에도 멈출수가 없게 됐다는 윤교수, 심장이 멎는 날까지 학문을 연구하는것이 그의 가장 큰 바람이라고 한다…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학자로 남고싶어
윤종주에게 있어 40여년간의 교수생애는 그의 학문연구 못지 않게 깊은 애정과 심혈이 깃들어온 분야이다. 한치의 오차나 실수도 허용치 않는 의학공부에서 학생들에게 옳바른 학습방법과 자세를 가르치고 공부에 대한 취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윤종주는 언제나 국내외 과학기술동태를 수집하여 새로운 강의안과 교수법을 연구하였다.
평소에는 자상하던 윤교수는 실험실에만 들어가면 학생들한테 시험관을 쥐는 방법 하나 틀려도 여지없이 혼을 내는 “엄격한 교관”이 되기도 하였다.
40여년간의 교수생애에서 그는 2500여 수업시간에 달하는 강의를 하였고 1985년부터는 석사연구생 지도교수로 되여 수많은 연구생들도 가르치게 되였다.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는 의학자의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60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실험실에서 손수 실험하면서 관찰하고 보고서를 밤늦게까지 쓰기도 한다.
한교연실에 있던 애제자들이 스승이 퇴직을 앞두고 자기의 모든 강의안과 론문을 책으로 묶어 생화학분야의 연구는 물론 생화학교수의 귀중한 자산으로 고이 간직하는것을 보는 순간 윤종주교수는 우리 나라 로세대 저명한 생화학학자이며 연변대학 의학부 초대 학부장 겸 제1대 생화학교수였던 자신의 스승 로기순박사의 귀중한 유산을 찾아내는것이야말로 생화학분야의 후배와 제자들에게 가장 값진 선물이라고 생각하였다. 10년동란기간 로기순박사의 박학위론문은 물론 그외의 귀중한 학술자료도 모두 소실되였던것이다. 그때부터 윤교수는 1920년 후반부터 30년 상반기에 출판된 미국, 일본 등 생화학관련 저작과 의학잡지들을 세계 각지에서 찾아 열독하여 끝내 1932년 로기순박사가 일본규수대학에서 독일어로 발표한 박사학위주론문 3편과 참고론문 1편 도합 4편의 귀중한 유산을 찾아냈다.
요즘 윤교수는 밤늦게까지 독일어공부에 푹 빠져있다고 한다. 로기순박사 론문을 찾기 위해 배운 독일어를 인제는 스승인 로기순박사의 인물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다시 시작했다는것이다. 제자들, 후배들의 좋은 귀감이 되고 좋은 본보기가 되는 로기순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사명감을 안고 또다른 도전을 펼치고있는것이다.
스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76세 나이에도 독일어를 배우며 인물전기에 도전하는 윤종주교수, 탐구와 도전으로 인류의 암정복과 건강한 삶을 위해 큰 획을 그은 의학자 윤종주의 아름다운 인생은 오래도록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반짝이는 별이 될것이다.
연변일보 장연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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