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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음악가 정률성과 불멸의 선률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4월19일 08시40분    조회:5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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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정률성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8)


2012년 7월 29일, 북경합창협회 8.1건군절경축 정률성군가작품음악회의 한장면.
중국 최고의 3대 음악가로 섭이, 선성해와 나란히《새중국 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쌍백인물》)에 오른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상 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으로,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있다.
음악도의 망명과 혁명
20대의 정률성.
정률성(아명 정부은,郑富恩)은 1914년 7월 7일, 한국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의 한 애국가정에서 5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형들은 모두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고있었다. 어릴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장끼를 갖고있는 그였지만 나라잃은 망국자에게 진정한 자유의 노래는 없었다. 1933년 그는 조선혁명간부학교 학생모집을 나온 셋째형을 은페시켜주어 일본경찰들의 감시대상이 되자 아예 형을 따라 경찰들의 눈을 피해 부산, 일본,상해를 거쳐 중국남경에 이르렀다.
남경에서 그는 《의렬단》에서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정치경제학과 맑스레닌주의를 배웠으며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지하항일비밀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상해를 오가면서 러시야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크리노와교수는 그의 음악천부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동방의 카루소》라고 하였다.
1936년 5월 1일, 정률성은 진보적인 항일구국조직인 《남경 5월문예사》 설립대회에 참석하여 음악이 가지는 혁명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대회에서 발기인 추취도(항일민주인사)는 7언시 《5월의 노래》를 읊었는데 정률성은 이 시에 곡을 붙여 그 자리에서 목청껏 노래불렀다. 대회장은 삽시에 뜨겁게 달아올랐고 이 노래는 《5월문예사》의 사가로 남경의 애국청년들의 항일열조를 고조시켰다.이는 그의 첫 처녀작으로 된다.
당시 정률성은 5월문예사의 인맥으로 중국 신흥음악의 창시자이고 항일구국가곡의 창시자인 선성해를 만나 그의 신작 《구국군가》를 열창하였다. 《총구는 침략자를 향해, 발맞춰 앞으로 나가자/... 중화민족 지켜내자, 영원한 자유인 되자.》선성해의 항일음악은 이 음악청년의 항일의지를 격발시켰고 정률성 음악형성과 창작방향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1937년 7.7사변으로 중국인민들의 전면 항전이 고조되였다. 그는 상해에 가서 중국공산당원이고 상해부녀구국회 지도자이며 조선혁명가 김성숙의 안해인 두군혜의 영향하에 거리에 나가 민중들에게 항일구국가요를 가르치며 항일정신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조선독립과 중국혁명의 승리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있으며 중조 두나라 인민의 공동의 원쑤 일본침략자를 물리치고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는 사업에 헌신하리라 작심한다. 그는 두군혜의 도움으로 결연히 중국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떠나게 된다.
혁명 성지 연안에서

1937년 10월,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메고 《세계명곡집》을 품에 넣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연안에 도착하였다. 혁명의 격정으로 들끓는 연안의 학습과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큰 충격을 주었다. 연안은 일제의 강점구와 국민당통치구에서는 전혀 볼수 없었던 새로운 기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던것이다. 그는 연안에서 중국해방의 희망을 보았으며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의 미래를 보았다. 섬북공학을 거쳐 로신예술학원에서 음악공부에 정진한 그는 졸업후 항일군정대학 선전과 음악지도로 사업하면서 음악창작의 고봉기를 맞는다.
1938년봄, 연안문예만회에서 정률성은 만돌라를 치면서 녀가수 당영매와 함께  《연안송》(막야 작사 정률성 작곡) 열창하였다. 모주석과 주덕 등 당중앙지도자들을 비롯한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노래는 나래돋친듯 섬감녕변구로부터 적통치구, 아세아 전역에 전파되였으며 억만 인민들의 마음속에 연안에 대한 흠모의 정을 불러일으켰고 광범한 애국청년들의 항일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이어 그는 《연수요》, 《육탄용사》, 《항전돌격운동가》, 《시월혁명행진곡》, 《팔로군대합창》 등 50여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이 시기 창작된《팔로군행진곡》은 오늘도 억만인민의 심금을 울려주고있다. 《전진 전진 전진! /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 조국의 대지우에 섰다/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 힘 막을자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두려움없이 굴함 없이 용감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밖으로 몰아내자/아,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혁명격정과 전투적기백이 넘치는 이 노래는 근거지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었고 군민들속에 널리 류전되였다.해방전쟁시기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으며 인민군대의 필승불패의 영원한 상징으로 되였다.


1939년 1월 10일 정률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는 드높은 열정으로 대중음악활동을 조직, 지도하면서 항일군정대학 녀학생대 대장 정설송(丁雪松)과 만난다. 열아홉살나는 사천처녀 정설송은 뛰여난 조직력과 미모로 연안에서 소문높은 인기인물이였다. 그녀는 《연안송》의 작곡자 정률성을 몹시 숭배하였다. 같은 리상, 같은 가치관을 그들은 행복한 련인으로 되였다.
하지만 정률성의 과거 지하혁명내용이 조직심사에 걸려 둘의 사랑은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마침 당중앙지도자들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있는 팔로군포병퇀 퇀장 조선인 무정장군이 섬감녕변구참의회에 참가하러 연안에 도착하여 정률성의 과거에 문제없다고 전적으로 담보하고나섰다. 하여 이 두 이국적 청춘남녀는 시련을 거쳐 혁명동지로, 평생의 반려로 1941년말 혁명성지에서 드디여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딸 정소제(郑小提)가 태여났다.
 
비발치는 탄우속으로
1943년 8월, 정률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팔로군전선지휘부와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진동남 태항산근저지로 가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당시 심한 페결핵을 앓고있던 정률성은 죽어도 전선에서 죽겠다며 항일전쟁의 최전선인 태항산근거지에 이른것이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대적무장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생산운동에도 앞장섰으며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치면서 혁명고동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시기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혁명가》등은 화북과 동북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속에서 널리 불려졌고 항일전장에서도, 해방전장에서도 이 노래는 우리 민족 전사들이 용감히 적진으로 돌격하는 나팔소리로 울리였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률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다. 정률성은 평양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 인민군협주단 단장 등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다. 몇 년사이 그는 《조선인민군행진곡》,《조중친선,》《조국의 아들》,《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을 창작하여 새 조선의 건설과 중조 두나라 인민의 친선을 위해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중 《조선인민군군가》의 작곡으로 하여 그는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류례없는 기록을 남긴다.
1950년 10월 조직의 결정에 근거하여 북경에 돌아온 그는 정식 중국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는 1951년 다시 중국인민지원군을 따라 항미원조전선에 나갔다. 그는 치렬한 전쟁터에서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영광스런 지원군》,《친애하는 군대 친애하는 사람》 등 가곡을 창작하여 지원군전사들을 고무하고 그들을 노래하였다.
새 중국 건설현장에서

소수민족지역에서 민요수집을 하고있는 정률성.
1952년부터 정률성은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사업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직접 기층현장에 내려가 체험하면서 작품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사품치는 민강을 찾아가 배군들과 함께 밤낮을 지내면서《강위의 노래》를, 운남, 대리 등 소수민족지역에 가 민요수집을 하면서 대형가극 《망천운》(望天云)을, 대흥안령 벌목공들과 함께 생활하면서《흥안령에 눈이 내리네》를, 농촌농민들과 함께 하면서《행복한 농장》등 가곡을 창작하였다. 그는 또 소년아동을 위하여《우리는 행복해요》,《푸른빛조국》《평화의 비둘기》등 작품을 창작하여 새중국어린이들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며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감지하게 하였다.
그는 또한 인민군대에 대한 두터운 감정을 지니고 친히 전투기에 올라 체험하면서《인민공군앞으로》,《비행사의 노래》등 공군가곡을 창작하였다. 거기에 해군가곡《강대한 함대 바다에서 행진하네》《해안초병》《해군전가》등 가곡을 조합하여《해방군조가》를 묶어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중국인민해방군의 불멸의 선률, 영원한 노래》로 평가되였다.

 

정률성의 최후인생 10년은 동란기에 처해있었다. 그도 창작자유를 박탈당한채 중국음악가협회에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창작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모택동시사 34수에 대한 작곡을 완성하였고 진의원수의 《매령 3장》에 곡을 붙였으며 가극 《망부운》을 창작해냈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4인무리가 분쇄되면서 창작의 봄을 맞이한 그는 주은래총리를 노래한 대합창과 중국인민해방군창립 50주년교향곡 등 창작계획을 주밀히 짜고 구상을 무르익혀나갔다. 그러던 12월 7일 정률성은 북경서북교외의 창편운하에서 머리를 식히며 고기그물을 던지다가 갑자기 뇌익혈로 쓰러졌다. 그때 그는 62세였다.
정률성은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하여 중국혁명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걸출한 작곡가이며 혁명가인 정률성은 중국신음악운동의 선구자 및 군사제재음악 개척자의 한사람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 력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했다.그가 남긴 장쾌한 선률은 오늘도 래일도 중화인민공화국 창공에 영원한 메아리로 울려퍼질것이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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