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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 중공조직 최초의 조직자 리동광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5월2일 13시47분    조회: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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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동광
남만 중국공산당조직 최초의 조직자 리동광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12)


리동광동지는 남만 중국공산당조직의 최초의 조직자이고 지도자이며 항일련군 제1군과 남만항일근거지 창설자의 한사람이다.

리동광(李東光)은 양정우, 리홍광과 함께 남만유격대를 창건하였으며 남만의 《5.7》봉기를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그는 선후로 중공반석중심현위원회 서기, 남만특위 서기 등 직을 맡았으며 1936년 7월에 동만과 남만의 당조직이 합하여 중공남만성위원회로 되자 성위의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였다. 리동광은 항일련군 제1로군의 창건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으며 남만성위원회의 대부분 실제사업을 도맡아하였다. 1937년 6월 그는 료녕성 신빈현 황토강 대와자구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리동광의 본명은 리상순이고 별명은 손세현이며 혁명에 참가한 후부터는 리동일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4년 1월 23일(음력)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의 한 보통농가에서 태여났다. 1918년 14살나던 해 부모를 따라 훈춘시 대황구로 이주하여왔다.

1922년에 리동광은 룡정 사립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연변의 문화중심이였던 룡정에는 일부 맑스-레닌주의 경전저작과 사회주의를 소개한 책들이 들어왔었고 리동광은 이러한 책들을 접촉하면서 혁명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했다. 1923년 9월 리동광은 동흥중학교에서 사화과학연구독서회 등 비밀단체에 참가하고 맑스 –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연구하면서 인류의 해방을 위하여 종신토록 분투하려는 위대한 리상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종교적인 의의를 걸치고 나온 반동적인 학교당국에서는 리동광 등 진보적인 청년들이 맑스주의를 연구하는것을 발견하고 학적을 취소하는 등 그들의 활동을 백방으로 저애했지만 리동광 등은 《교육과 종교는 분리되여야 한다》는 기치를 들고 학교당국과 맞서 싸웠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진보적인 청년들의 압력에 학교당국에서는 마침내 학생들의 요구를 접수하였으며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승리를 취득하였다. 동흥중학교의 반종교투쟁의 승리는 기타 중학교의 학생투쟁도 크게 고무하여주었는데 대성중학교의 사생들도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승리하였다.

리동광 등 진보적인 청년들은 방학기간이나 과외시간을 리용하여 룡정주위의 농촌에 내려가 로농대중을 협조하여 청년회거나 친목회 같은 군중단체를 조직하고 맑스-레닌주의와 로씨야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승리경험을 열정적으로 선전하였다.

1925년 리동광은 가정의 경제난으로 잠시 학업을 중지하고 훈춘 대황구로 돌아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리동광은 광범한 학생과 농민들에게 진정 우리 민족이 민족독립을 이룩하고 근로대중의 해방을 쟁취하자면 모두 일떠나 반제, 반봉건 투쟁을 진행해야 한다는 혁명의 도리를 널리 선전하였다.

1926년, 리동광은 동흥중학교에 되돌아와 공부를 하면서 계속 학생운동에 종사하였다. 1927년 5월 1일에 연변조선족인민들은 룡정 화룡일대에서 5.1국제로동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세호대한 반제애국시위운동을 진행했다. 5월 30일에는 리동광 등 진보적인 청년학생들의 발동과 조직하에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를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대규모적인 시위행진을 단행하였으며 리동광은 시위행진대오의 앞장에서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전 세계 무산자는 련합하여 제국주의 봉건주의를 타도하자》 등 구호를 소리높이 불렀다.

리동광의 반제애국활동은 일본령사관의 주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였다. 그리하여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때 체포되여 룡정일본총령사관 감옥에 갇히였다. 그해 10월에 탈옥에 성공한 리동광은 연변을 떠나 남만 반석일대로 활동지점을 옮겼는데 반석모범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계속 군중들에게 혁명사상을 전파하였다.

1928년 여름에 중공반석현위에서는 몇명의 조선족공산당원을 반석에 파견하여 지하공작을 하게 하였는데 리동광은 이들과 가장 일찍 접촉한 사람의 하나였다.그들의 방조와 교양하에 리동광은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에 대해 심각한 인식을 갖게 되였고 공산당을 따라 끝까지 혁명하기로 결심하였다. 1929년에 리동광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 8월에는 중공 반석현 구위서기직을 담임하게 되였다. 그는 만주성위의 지시에 쫓아 공고한 반동항일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해 농민들을 령도하여 항조항량(抗租抗粮)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반동지구에 농민협회, 부녀회, 아동단 등 군중조직을 건립하고 대다수의 농민들을 반일투쟁에로 인도하였다.

1931년 9.18사변이후에는 반만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리홍광동지를 협조하여 로농적위대 즉 주구숙청대를 건립하였다. 이 주구숙청대는 남만에서 당이 령도하는 첫 반일무장력량으로 성장했으며 항일련군 제1군의 기초로 되였다. 1932년 4,5월에 리동광은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양림동지의 령도하에 리홍광과 함께 반석로농의용군을 창건하였다. 로농의용군은 창건된 후 짧디짧은 두달사이에 농민들을 령도하여 6차례의 쌀빼앗기투쟁을 진행하였고 반동지주 3명을 처단하였으며 세 백가장 수하에 있는 지주무장을 격파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함으로써 항일무장의 위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적들의 적대시와 불안도 자아내게 되였다.

1933년 봄, 적들은 항일무장에 대하여 대거 진공을 시작했는데 리동광은 양정우, 리홍광과 함께 유격대를 령도하여 각지를 전전하면서 적들의 4차나 되는 대규모적인 토벌을 분쇄했고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홍석랍자를 중심으로 주위가 몇십리나 되는 유격근거지를 창설하였다.

1933년 5월 7일, 반석현중심당위 제4차 련석회의에서 리동광은 중심현당위 서기로 당선되였다. 리동광이 령도하는 현당위의 정확한 령도하에 인민군중들이 충분히 발동된데서 반석현 각지의 반일무장투쟁은 점차 심도있게 발전되였으며 대오는 부단히 확대되였다.

1933년 9.18사변 2돐 기념일에 반석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건립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치위원을 담임하였다. 동북인민군 제1군 독립사는 건립된 후 반석중심현당위와 양정우의 령도밑에 휘발하 량안 광범한 지구의 항일군대, 산림대와 광범히 련합하여 공동으로 항일하였으며 적들의 대규모적인 동변도추기, 동기대토벌을 련속 분쇄하고 중대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1934년 11월 5일, 림강현 사도이차에서 중공남만당 제1차 대표대회가 열렸는데 리동광은 이 대회의 지도사업에 참가하였고 중공반석중심현위를 대표하여 사업보고를 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남만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리동광, 양정우, 기유림 등 동지들로 구성된 특위 상무위원회를 세웠다. 리동광이 특위서기를 맡았다. 회의에서는 또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창건할데 관한 의제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1월 7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창건되였다. 이때로부터 양정우와 리동광은 남만의 당과 군대의 조직자와 지도자로 되였다.

1934년 겨울과 1935년 봄에 일본군은 1만명을 헤아리는 병력으로 남만에 대한 제3차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리동광은 남만의 군민들에게 놈들의 포위토벌을 짓부실것을 호소하였다. 그의 창의하에 남만의 당정군 기관간부 훈련반이 열렸고 지방사업에서의 당의 지도적역할이 더욱 강화되였다. 적들은 1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리동광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리동광은 위험을 무릅쓰고 1935년 7월부터 10월까지 약장사군으로 가장하고 림강, 금천, 류하 등지로 직접 내려가 지도사업을 하였는데 적들의 포위토벌도 순조롭게 물리쳤을뿐만아니라 각지의 당조직과 군중조직은 더욱 발전장대해졌다. 1935년 10월까지 남만의 56개 지방에서 선후로 인민정부를 세웠다.

1936년 봄, 동북인민혁명군과 각 항일무장부대는 중공중앙의 8.1선언의 정신에 근거하여 동북항일련합군으로 재편성되였다. 1936년 여름부터 1937년 6월까지 리동광은 제1군과 함께 관전, 환인, 신빈, 집안 등 현들에서 활동하면서 여러차례 전투를 지휘하여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침략자들은 1936년 6월부터 위만군을 주력으로 이른바 만군독립토벌을 감행하였는데 동원된 병력은 1만 6000여명이였다. 리동광은 양정우와 합작하여 유격전을 벌여 매복유인전술로 적들의 이 포위토벌을 분쇄하였다.

1937년 6월,제1군 군부는 심해철도를 통과하는 일본군의 군용렬차를 습격하는 임무를 맡고 신빈현 영릉부근의 황토강을 지나다가 몇배에 달하는 적의 수비대와 맞다들게 되였다. 리동광은 바로 이 전투에서 양정우장군을 도와 싸움을 지휘하다가 적의 흉탄에 맞아 희생되였다. 당년 리동광은 33세밖에 되지 않았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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