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태어나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한 랑랑이 2010년 발매된 ‘랑랑 라이브 인 비엔나’ 앨범 수록곡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 소니뮤직]
‘랑랑 이펙트’. 미국 NBC 투데이쇼가 4000만 명의 중국 어린이들이 랑랑(31)을 롤모델 삼아 피아노를 배우는 기이한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만든 용어다. 이 신드롬에 기인해 출시된 ‘랑랑 피아노’는 스타인웨이사 150년 역사상 최초로 아티스트의 이름을 딴 피아노로 중국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연주, 2009년 노벨 평화상 시상식 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축하연주 등 랑랑의 공연은 지구촌의 가장 큰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영국 런던에서는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콘서트가 열렸다. 엘턴 존,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등 전 세계 최고의 뮤지션들이 출연한 행사에서 랑랑은 유일한 클래식 아티스트이자 동양인이었다.
필자는 지난해 2월 옥스퍼드 유니언 부회장 때 중국 친구의 권유로 랑랑을 초청하게 됐고, 그의 연설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랑랑 이펙트’의 일부가 돼 있는 기분이었다. 특히 랑랑의 인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기는 매년 옥스퍼드 유니언에 다녀가는 200명 이상의 연사 중 가장 열광적 지지를 받았던 조니 뎁의 인기에 버금갔다.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겸손하고 소탈한 인간미였다. 많은 유명 연사는 바쁘다는 핑계로 지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데 반해 랑랑은 5시간씩이나 일찍 와서 직접 연설 대본을 고치며 연습을 했다. 게다가 그는 연설 후 식사 때도 자리를 옮겨다니며 40여 명의 학생과 일일이 대화를 나눴다. 헤어진 뒤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게 “오늘 나한테 너무 좋은 기회를 줘서 고마워:)”라는 깜짝 문자를 보내준 그에게 나는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나는 다소 고리타분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 장르의 아티스트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 궁금해졌다. 그걸 가능케 한 그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이 알고 싶었다. 1년 만에 독일의 한 호텔에서 다시 그를 만나 1시간 반가량 인터뷰를 했다. 오랜만의 재회에 어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그의 두 팔 벌린 다정한 포옹에 눈 녹듯 사라졌다.
만화 ‘톰과 제리’ 보며 피아노에 흥미
독일 만하임의 한 호텔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랑랑(왼쪽)과 함께 포즈를 취한 이승윤씨.
“다섯 살 때 고향인 선양에서 첫 독주회를 열게 됐죠. 너무 긴장해서 공연 전 화장실을 10번 갔던 게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런데 이상했던 게 수백 명의 관객 앞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자마자 긴장은 온 데 간 데 없고 모든 게 편안해졌습니다. 아니, 무대 위에 있는 순간을 정말 즐겼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죠. 제 자신이 인공위성이 된 기분이었어요. 세계 모든 사람에게 제가 전파를 쏘는 거예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거죠. 음악을 통해 제 자신이 변하고 모든 사람과 감정을 공유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묘한 기분이더라고요. 평소의 저보다 10배 더 큰 사람이 된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피아니스트를 꿈꿨습니다.”
랑랑이 9세 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살하라고 협박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중국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넘어 세계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만들기로 결심했고, 경찰관 직업까지 버리고 아들의 피아노 교육을 위해 상경했다. 베이징 최고의 음악학교인 중앙음악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랑랑이 ‘분노의 교수님’이라고 말하는 피아노 선생님은 랑랑이 음악원에 합격하기도 전에 그를 제명시켰다.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소식을 듣자 아버지는 그만 정신을 잃었고, 랑랑에게 자신과 동반자살을 하자고 협박했다. “이제 너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이성을 잃은 아버지는 강한 항생제가 담겨 있는 통을 건네며 무조건 다 삼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발코니로 도망치는 어린 랑랑에게 아버지는 “뛰어내려 죽어”라고 쏘아붙였다. 최근 BBC는 이런 믿기 힘든 랑랑의 역경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영국 전역에 방영했는데 제목이 ‘Do or Die’였다.
- 죽으라고까지 한 건 좀 심했다 싶어요. 5세 이후 새벽 5시45분부터 밤늦게까지 연습시킨 것도 도가 지나치다 싶고요. 어떻게 견딘 거죠.
“아버지는 똑똑한 분이십니다. 아버지가 그때처럼 미친 것은 딱 한 번이에요. 그리고 자기 자신도 문제가 많다는 걸 깨달았죠. 제게 엄할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 자신도 스스로를 다스리기 시작했어요.”
- 아버지도 그날 일을 후회하시는 거군요.
“제겐 한 번도 그렇게 인정한 적은 없어요. 그래도 그 사건 이후 얼마나 변하신지를 알기 때문에 분명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랑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심각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내 아버지가 ‘놀지 말고 계속 공부하라’고 혼내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죽기를 자청했던 나의 철없던 반항 얘기를 들려주자 랑랑이 웃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저는 음악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도 엄하긴 했지만 꿈은 같았어요. 월드클래스 피아니스트가 되는 꿈이었죠. 불행히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엄청난 연습과 집중력,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면 고통을 마법처럼 망각하게 됐어요. 축구선수도 똑같을 겁니다. 뛰다 보면 수없이 맞고 다치겠지만 그 순간엔 아무 생각도 안 날 거예요. 음악인도 똑같습니다.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따르지만 피아노 치는 순간만큼은 그 고통이 안 느껴지죠.”
- 그래도 엄청 힘들었을 텐데.
“누구도 8시간씩 앉아있는 건 힘들 거예요. 하지만 제 주위엔 저처럼 열심히 피아노를 연습하는 친구들이 적잖았어요. 아마 동양문화의 영향도 클 거예요. 한국에서 왔으니까 존도 잘 알지 않습니까. 동양인에겐 사실 흔한 것입니다. 에이미 추아의 『타이거 마더』를 읽어봐도 알 수 있죠.”
- 아버지의 엄한 교육방식이 옳았다고 보나요.
“그 시대, 중국은 상당히 뒤처져 있는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요. 베이징도 아닌 지방도시에서 월드클래스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건 사실 허무맹랑한 꿈이죠. 당연히 어느 정도 대가가 있었어야 했을 겁니다.”
- 솔직히 어렸을 때부터 천재인지 알았습니까.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 거짓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해주세요.
“제가 잘하는 건 알았지만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부모님이 현명하셨던 것 같아요. 한 번도 제가 자만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제게 최고가 되라고 했지, 제가 지금 최고라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 재능이 먼저인가요, 노력이 먼저인가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재능과 노력이 항상 상호 작용을 합니다. 재능이 있어야 노력을 하게 되고, 노력을 해야 재능도 살아납니다.”
천재에서 ‘르네상스 맨’으로
지난해 2월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강연 중인 랑랑(왼쪽)과 이승윤씨(사진 위). 랑랑이 지난해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연주하고 있다.
“미국에 도란 교수님이란 분이 계셨어요. 친구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미국식 사교 스킬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죠. 미국에 와서 정말 한 인간으로 성장한 것 같아요. 다양한 사람들을 두루 만나며 저만의 인적 네트워크를 시작했죠.”
열두 살 나이로 독일 에틀링겐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랑랑은 이듬해 일본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도 1등을 거머쥐었다. 월드클래스가 항상 꿈이었던 아버지는 미국행을 결심하게 됐고, 랑랑은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피아노만 알았던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르네상스 맨’으로 성장하게 된다.
- 이런 사회생활이 음악에 도움이 됐나요?
“당연하죠. 아티스트는 대중과의 공통분모가 많아야 합니다. 저는 변호사든, 과학자든, 사업가든 누구의 얘기든 경청하려고 하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식견을 높이려 노력합니다. 제게 특히 큰 영감을 준 것은 셰익스피어 문학이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어스 시저, 햄릿 등을 닥치는 대로 공부했죠. 셰익스피어가 아시아 밖의 세계와 문명에 눈을 뜨게 해줬습니다. 중국인으로서의 저의 뿌리에 서양의 관념과 문화를 더하게 되면서 세계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어떤 평론가들은 랑랑이 너무 대중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동서양 문화의 이해, 특유의 붙임성과 사교성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나온 그의 ‘대중적’ 습성이 강력한 무기가 되는 건 아닐까.
- 세계적인 콩쿠르를 계속 휩쓸고 싶었을 텐데 스승인 게리 그래프먼 교수는 1등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콩쿠르 자체를 못 나가게 했다는데, 이게 어떤 도움을 줬나요.
“어렸을 때 저는 정말 승부욕이 강했습니다. 피아노 연주만큼은 무조건 1등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교수님은 콩쿠르에서 이기는 뮤지션이 아니라 훌륭한 뮤지션이 되기 위한 자질들을 가꾸는 데 집중하라고 하셨어요. 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군사력뿐 아니라 경제력도, 좋은 의료보험도 필요합니다. 이런 게 없으면 잠시 1등 국가라고 할 순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죠. 교수님 조언대로 영어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문학·역사·정치학 등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습니다. 콩쿠르에서 이기기 위한 소수의 몇 곡뿐 아니라 중요한 협주곡들은 다 연마하게 됐죠.”
- 장기적 안목을 갖게 됐다는 뜻이군요.
“콩쿠르에서 우승했다고 해봐요. 많아야 10곡 정도 연마할 것입니다. 10곡 가지고 길어야 2년 버팁니다. 내가 아무리 잘난 피아니스트인들 2년이 지나면 뭐합니까? 연주곡목이 고갈되고, 그때부터 새로운 곡들을 다시 배워야 하는데 그새 어린 피아니스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자리를 잃게 되죠.”
- 아직도 음악이 경쟁처럼 느껴지나요?
“이제 다른 의미에서 음악을 통해 경쟁을 합니다. 미국에 왔을 때 저의 승부욕은 다 이기겠다는 제 자존심에 기반한 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의 가장 큰 상대는 저 자신입니다. 항상 배우고 향상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죠.”
랑랑의 음악에 베토벤은 없고 랑랑만 있다. 모차르트는 없고 랑랑만 있다. 너무 자유롭고 강한 감성으로 모든 음악을 랑랑화시킨다. 이런 평론가들의 비판에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모두가 한 사람의 스타일에 공감할 순 없습니다. 음악에 대한,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가 있을 겁니다. 예술은 100m 달리기처럼 단순히 가장 빠른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닙니다. 보수적으로 연주하든, 자유롭게 연주하든 이견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클래식 음악의 정통을 따르고 있다고. 저는 게리 그래프먼,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등 동시대 최고의 음악인들에게서 클래식을 전수받았습니다. 그들 또한 과거의 최고 음악인에게 배웠고요. 이렇게 전통을 배우고 난 뒤엔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 개성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사기계가 돼버리고 말죠.”
-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음악인으로 꼽히는데, 랑랑이 대중을 쫓아가는 건가요. 대중이 랑랑을 쫓아오는 건가요.
“우선 저는 대중의 입맛을 모르고, 알 방법도 없습니다. 어차피 알 수 없는 걸 쫓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죠. 오직 음악 고유의 원리와 저의 논리를 결합시키며 제가 할 수 있는 해석을 할 뿐이죠.”
"한국 팬들 아시아에서 가장 열정적"
랑랑은 장르를 불문하고 여러 뛰어난 대중적 음악인들과 협연했다.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 R&B 스타 엘리샤 키스, 영국 록의 전설 폴 매카트니, 그리고 비스트와 에일리 등 국내 가수들과도 컬래버레이션을 했다. 싸이도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그는 상류층 냄새가 풍기는 클래식 음악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콧대 높은 분들이 싫어할 만하다.
- 기부활동도 열심히 한다면서요.
“2004년 유니세프 대사 자격으로 아프리카에 갔는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음악을 통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됐어요. 말라리아와 에이즈로 고통받는 아이들이었는데 피아노 자체를 처음 봤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음악을 연주하니까 노래도 부르며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감동적이었죠. 그때부터 200번쯤 기금모음 행사를 다닌 것 같아요.”
- 랑랑 국제음악재단도 그렇게 세우게 됐나요.
“네. 제 네트워크와 제가 가진 걸 통해 경제적으로 힘든 아이들, 재능이 있지만 마땅한 무대를 못 찾는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돕고 있어요. 그 친구들과 콘서트에서 같이 연주도 하죠. 이런 아이들에게 기회와 미래를 주고 싶어요. 2007년 여름을 바렌보임 선생님이 이끄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와 보냈는데, 기독교인과 무슬림·유대인들이 음악을 통해 모두 친구가 되는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어요. 정말 아름다웠죠.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 중국은 랑랑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중국은 제 고향입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유념할 점은 우리 모두 세계시민이란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젠 자신의 문화만으론 아무것도 못합니다. 존도 동양인으로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을 맡으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지만 한국에 있었다면 이 정도 성취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 모두 특정한 국가에서 왔고 모국을 사랑하지만 이젠 전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 먼 미래의 자신을 어떻게 상상하나요.
“계속 피아노 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 한국 팬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한국의 팬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클래식 음악을 정말 즐길 줄 압니다. 올해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 연주와 11월 서울 공연 등 두 차례 방한이 예정돼 있습니다.”
이 잘나가는 형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나를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회장 일은 어땠는지, 공부는 잘돼가는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베를린 관광지까지 상세히 설명해준 그는 상하이로 갈 짐을 챙기러 간다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단지 천재적 피아니스트, 중국 젊은이들의 롤모델, 클래식 음악 홍보대사를 뛰어넘어 책임 있는 ‘세계시민’으로 자신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 남자, 전 세계 대중에게 사랑받을 운명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
만하임(독일)=이승윤 대학생 객원기자 leeseungyoon199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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