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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인민의 마음속 영원한 주장 주덕해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5월13일 16시42분    조회: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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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주덕해
주덕해(1911-1972), 그의 원명은 오기섭(吴基涉),그는 1911년 음력 3월 5일, 로씨야 원동 연해주 우쑤리스크부근의 산간마을에 한 가난한 조선족농민의 아들로 태여났다.

1920년 3월부터 길림성 화룡현 수동촌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청년기부터 선후로 흑룡강성의 동녕, 동경성, 림구, 밀산 등 북만일대에서 항일에 투신하면서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흑룡강성 녕안현 동경성 우가툰공청단 특별지부 서기, 밀산현 전촌 당지부서기로 사업하다가 1933년 서대림자지부서기,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항일련군) 제3군 신편2퇀 류수처당지부 서기를 맡아하면서 후날 항일련군출신이라는 금빛경력을 쌓았다.

그후 주덕해동지는 연안으로 돌아와 8로군 359려 718퇀 특무련 지도원이 되며 1942년 항일군정대학과 연안해외연구반에서 학습하고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43년 연안조선혁명군정대학 당위위원, 교무위원 겸 총무처장을 담임. 당시 섬감녕변구의 극심한 경제곤난시기에 직면하여 당의 호소에 따라 황무지를 개간하고 석탄을 캐고 벽돌공장, 사탕공장을 꾸리며 《대생산능수》로 거듭났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후 연안을 떠나 동북으로 진출하며 동북민주련군 의용군 3지대 정치위원을 담임하고 할빈해방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48년 4월 동북행정위원회 민정부 민족사무처 처장을 담임하며 후에는 동북행정위원회 부주임으로 되였다. 이 시기 동북지구 조선족인민들의 생산과 생활실제에 근거하여 민족교육,민족문화, 민족정책 선전 등 사업을 밀고나갔다.

주덕해동지가 중시한 인재양성과 인민생활

1949년 봄, 주덕해동지는 중공연변지위 서기 겸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전근하였다. 당시 그는 연변에서 조선족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것이 인재양성이라고 여기였다. 주덕해동지는 민족구역자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대학건설을 기획하였다. 비록 건국전이긴 하지만 그가 일찍 이런 거창한 계획을 구상하고있었다는것이 참말로 대단했다.

당시 연변의 많은 지식인들이 조선반도에 나가다보니 인재가 부족했다. 주덕해동지는 동북3성의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흡수하여 연변대학에 와 교편을 잡도록 하였고 또 외지에 파견하여 연수하는 경로를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중국에서 처음으로 소수민족대학을 창설했다. 몇해사이에 연변대학에서는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연변의 당정기관 특히 문화, 교육분야의 간부 대부분은 연변대학 졸업생들이였다.

그리고 주덕해동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속히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청사진을 계획하고 실시하였다. 건국초기 길림성당위의 령도하에 연변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제를 회복하기 시작, 몇년동안의 노력을 거쳐 농업이 발전하고 공업이 일떠섰으며 인민생활이 큰 개선을 가져왔다.

조선전쟁이 폭발하면서 그 불길이 연변에까지 뻗쳤다. 중앙정부의 령도하에 연변인민은 항미원조운동에서 앞장서 참전참군하고 전선에 뛰여들었으며 항미원조의 승리를 위하여 엄청난 기여를 했다.

연변조선족자치구 건립을 요구

당시 주덕해동지는 연변의 형세를 분석하고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설립할 조건이 이미 구비되였다고 여겼다. 1951년 가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2주년을 경축할 때 주덕해동지와 최채동지는 중앙인민정부로부터 국경관례활동에 참가하라는 초대장을 받았다. 주덕해동지는 북경에서 전국정협좌담회가 열리는 기회를 빌어 연변조선족자치구를 건립할데 관한 요구를 중앙에 제기하였다. 최채동지도 민족좌담회에서 같은 요구를 제출하였다.

1952년 봄, 중앙은 팽택민을 단장으로 한 민족고찰단을 연변에 파견하여 한면으로는 당의 민족정책을 선전하고 다른 한면으로는 연변의 정황을 료해하여 북경으로 돌아가 중앙에 보고하였다. 1952년 여름 중앙정부는 정식으로 연변조선족민족자치구를 설립할데 관한 보고를 비준했다.

1962년 군중들과 함께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10돐을 경축하고있는 주덕해주장

중공연변지위는 주덕해동지를 주임으로, 동옥곤동지를 부주임으로, 최채동지를 비서장으로 한 연변조선족자치구준비위원회를 건립했다. 이때로부터 주덕해동지는 전력을 다해 자치구설립준비사업을 틀어쥐였다. 당시 그는 자치구사업을 기획하는데서 가장 중요하고 관건적인 절차는 바로 힘을 모아 애국주의와 민족리론, 민족정책 선전교양을 착실히 하여 광범한 간부와 군중의 인식을 일층 통일시키고 민족구역자치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관한 인식을 명확히 하는것이라고 인정했다.

주덕해동지는 자치구 주석을 담임한후 최선을 다해 경제건설을 틀어쥐고 수리건설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농업생산 특히 소사양업을 대폭 발전시켰으며 농업생산동력문제를 해결하였다. 연변특산농업을 발전시키고 만무과원을 개발하였으며 공업생산과 문화교육사업을 발전시키면서 연변의 현대화건설에 든든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주덕해동지는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 시종 민족단결을 중시하면서 《단결은 자치주의 각항 사업을 흥성발전시키는 담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민족문화교육사업을 발전시킬것을 중시하고 연변지구의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 중요한 공헌을 해왔다.

1964년 주덕위원장이 연변을 시찰할때 수행하는 주덕해주장(왼쪽)

주덕해 그리고 문화대혁명

민족의 걸출한 대표 주덕해의 휘동하에 연변인민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힘 다 하고있는 때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였다.

1966년 12월 동북의 《태상황》으로 불리는 모원신이 한무리 반란분자들을 데리고 연변에 들어오면서 연변에는 먹장구름이 뒤덮히고 말았다.

그 먹구름은 끝내 연변의 《일가지장》인 주덕해에게 까지 덮쳐들었다. 하루밤새에 주덕해에게 《한사코 개조하지 않고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지방민족주의분자》《외국특무》《매국역적》 등 터무니없는 죄명이 덧씌워졌다. 반란파들은 기승을 부리며 연길에 있는 주덕해 가정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연변에서 갖은 수모와 투쟁을 당한 주덕해는1969년 호북성 강한평원에 있는53농장에 내려가게 되였다.

1972년 병환에 시달리던 주덕해는 주은래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줄것을 요구했다. 주은래총리는 즉시 답장과 함께 약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병이 골수에 깊어진 주덕해는 1972년 7월 3일 61세를 일기로 눈을 감고 말았다.

주덕해동지의 일생은 그야말로 혁명적일생이였고 전투적일생이였으며 영광스러운 일생이였다. 후덕하고 청렴하고 강직한 그이는 장기간의 혁명투쟁에서 시련을 이겨낸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고 중국조선민족이 걸출한 정치활동가이며 당과 인민에게 충성을 다한 공산주의 전사였다. 또한 그이는 중국 56개민족중 우수한 일원인 중국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스포츠 등 제반사업이 기반을 마련하는데 모든 힘을 이바지하였고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주덕해동지의 일생은 나라와 인민을 위해 사심없이 공헌한 일생이였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반 사업의 초석을 닦은 일생이였다. 주덕해동지는 혁명가이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주장으로 자치주 기반을 닦은 조선족의 지도자이다.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조선족 인민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고 걸출한 대표 주덕해동지를 영영히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길림신문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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