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연변인민의 애대를 받은 로간부 조룡호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5월17일 14시13분    조회:461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조룡호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 (18)

조룡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초창기 지도자의 한분이다.

조룡호는 항미원조전쟁시기로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시기에 이르기까지 파란많은 려정을 연변의 제반사업 발전을 위해 헌신한 덕망높은 로지도간부이다.

조룡호는 장기간 당의 민족정책을 참답게 관철집행하고 민족지역의 개혁발전을 추동하기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자치주의 정치, 경제, 문화건설 등 결책제정과 실시에서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함으로써 연변조선족자치주 여러 민족 인민들의 애대를 받았다.

로지도간부의 곡절적인 인생그라프

조룡호는 1928년 4월30일, 반석현 연통산진 칠간방촌에서 태여났으며 1936년도에 천강조선족소학교에 입학, 1942년도에 국립길림사도학교 특수반에 입학하여 1944년12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후 조룡호는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모교인 천강조선족소학교에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광복후인 1945년 9월, 조룡호는 천강청년동맹의 조직위원으로 되여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장개석국민당반동파의 내전을 폭로비판하는 군중사업을 진행했다. 1945년 11월초, 중공중앙에서 파견한 간부들과 태항산조선의용군제7지대가 길림시에 도착하여 길림혁명군정학교를 세우고 당지 청년들에게 군정학교에서 학습할것을 동원하였는데 조룡호는 련속 사흘동안 걸어 화전현에 있는 동북의용군제7지대 혁명군정학교에 찾아가 입학하였다.

군정학교에서의 정규적인 학습과 정치활동을 통해 조룡호는 확고한 혁명적 인생관을 수립하게 되였으며 영원히 공산당을 따라 혁명하며 인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정치적인 신념을 굳히게 되였다.

1946년 5월, 조룡호는 길림성조선인민민주련맹의 성원들과 함께 길림시로부터 적후방인 연길로 철퇴하였다. 연길에 온후 조룡호는 토지개혁공작대로 군중들속에 내려가 사업하였다.

조룡호는 지금의 연길시 의란진 룡연촌, 금성촌, 태암촌의 토지개혁을 맡아했는데 처음에는 일반대원이였다가 후에는 공작조 조장사업을 맡아했다. 토지개혁사업을 진행하면서 조룡호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48년 3월까지 토지개혁이 완수되였는데 토지를 완전히 농민들에게 분배해주었다. 이에 따라 번신한 농민들의 계급각오는 크게 제고되였으며 농민들속에서 애국공량 및 자원적으로 참군하면서 전선을 지원하는 열조가 일어났다.

1948년 12월, 조룡호는 조직의 임명을 받고 연길현 지신구의 구장으로 사업하다가 조선전쟁이 폭발하자 전선지원정치공작대 12중대 대장의 신분으로 조선전쟁터에 나가 비발치는 탄우속을 넘나들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웠다. 항미원조기간의 뛰여난 표현으로 조룡호는 부대모범지도간부의 영예를 따냈을뿐만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급국기훈장과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기념메달을 받았다.

1952년2월말, 조선에서 귀국한후 조룡호는 조직의 배치에 따라 동북국에서 잠시 사업하다가 3월에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180여명의 간부와 전사들을 인솔하여 연변에 도착했다. 연변에 온후 조룡호는 연변전원공서 민정과 과장으로 사업하면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초창기 설립과 건설에 참가해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조룡호와 민족단결진보

1952년 9월,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설립된후 구정부는 계속 민족단결사업을 틀어쥐였고 이 사업을 제도화하고 규범화하였다. 당시 자치구정부 민정처장이였던 조룡호의 건의에 따라 구위원회, 구정부는 9월을 《민족단결교양의 달》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매년 9월이면 민족단결교양월간활동을 전개했는데 내용은 민족정책을 학습하고 민족단결사업경험을 총화하고 민족단결모범을 표창하는것이였다. 이 활동을 통하여 경험을 총화하고 민족단결을 강화하고 각항 사업을 추동하였는바 이 제도는 지금까지도 연변에서 실행되면서 현저한 실천성과들을 보여주고있다.

1981년 9월 연길시에서 교원절경축활동에 참가한 조룡호(앞줄 가운데사람)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연변의 경험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각 지방의 고찰단도 분분히 연변에 와 경험을 전수받았다. 신강위글족자치구 서기 왕은무는 특별히 고찰단을 연변에 보내여 민족단결경험을 학습하게 하였는데 연변의 경험은 신강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문화대혁명전에 연변은 전국 각족 소수민족자치지역가운데서 민족단결 선진전형으로 소문높았으며 주은래동지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문화대혁명기간 연변의 민족단결은 큰 재난과 파괴를 당하였는데 조룡호는 시종 민족지구에서의 민족단결은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는 지도사상을 견지하여 민족단결사업이 빛나는 성과들을 거둘수 있게 되였다. 1994년도부터 2005년까지 연변은 선후로 3차례나 국무원으로부터 《민족단결진보모범자치주》의 영예를 따냈다.

연변인민의 대표 제반사업 발전을 도모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초기 조룡호는 자치주의 조기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자치주의 정치, 경제, 문화건설 등 제반사업 결책의 제정과 실시에 참여했으며 적극적인 력사적 기여를 했다.

조룡호는 연변의 제반사업 발전에 고도의 책임감을 가지고있었다. 자치주 부주장과 주장을 담임하는 기간 조룡호는 연길시 연서교, 연길체육장, 실내체육관, 연변박물관, 연변도서관, 연길방직공장, 유수천발전소 등 10여개에 달하는 공사의 건설을 위해 밤낮이 따로없이 동분서주했으며 하나하나의 난관을 극복하고 풀어나가면서 연변의 제반 사업의 발전을 위해 든든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조례》의 매 하나의 조목에는 모두 조룡호의 심혈이 깃들어있다. 조룡호가 연변주인대상무위원회주임으로 사업하던1983년부터 1993년까지 10년사이 연변주인대 상무위원회에서는 조룡호의 지도하에 선후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방조례 13부, 규장, 규정, 결의 14부를 제정하였다.

 
1982년 9월3일 군중들과 함께 자치주창립30돐을 경축하는 조룡호(오른쪽)

조룡호는 연변인민의 우수한 전국인대 대표였다. 조룡호는 전국인대상무위원회 회의에 적극 참석하고 제의안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연변의 발전을 적극 호소했다. 조룡호가 제출한 훈춘의 개발개방을 다그치고 훈춘을 연변개방도시서렬에 가담시키는 등 중대한 문제들은 당과 국가지도일군들의 높은 중시를 불러 일으켰으며 국가에서 두만강지역 개발개방을 중시하고 적극 추진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조룡호동지의 길고도 빛나는 혁명적 사업일생을 제한된 짧은 글로 다 담아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룡호동지의 10년동란가운데서의 견정불이한 혁명적신념과 큰 국면에 눈길을 돌리고 대공무사하며 명리를 따지지않고 우수하고도 훌륭한 간부들을 적극 양성하고 제발한 넓은 흉금과 당과 인민을 위한 사업에 자신의 일체를 남김없이 불태운 빛나는 인생은 영원히 연변인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파란만장한 혁명생애를 걸어오면서 조룡호동지는 선후로 연변주당위 통전부 부부장 겸 주정협 비서장, 주당위 통전부 부장 겸 주정협 부주석, 주정부 부주장 겸 비서장, 주혁명위원회 정치부 부주임, 주당위 부서기, 주혁명위원회 부주임 겸 주정협 주석, 주당위 서기(당시 제1서기를 두었음) 겸 주혁명위원회 부주임, 주당위 서기(당시 제1서기를 두었음) 겸 주장, 주당위 서기(당시 제1서기를 두었음), 주인대 상무위원회 주임, 제6기, 제7기 전국인대 대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 민족사무위원회 위원, 제8기 전국인대 대표, 민족사무위원회 위원 등 직무를 력임했다. 2002년에 리직휴양을 했다.

조룡호동지는 2012년 12월 6일 9시 37분에 연길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서거했으며 골회는 연변혁명릉원에 안치되였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화하상황균업유한회사 라동도대표의 창업성공기 아무리 봐도 그는 영낙없는 인테리모습이다. 훤칠한 키에 영준한 외모, 거기에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차분한 음성이며, 안경너머로 상대를 응시할줄 아는 지적인 눈길과 타인의 말을 경청할줄 아는 침묵마저도 분명히 무게있는 지성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학...
  • 2013-11-28
  • 한국 한중문화교육교류원 남궁해연 원장   (흑룡강신문=서울) 나춘봉 특파원,김승희 = 한-중간의 무역, 교육, 컨설팅 등 여러 분야를 주름잡으며 한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중국동포 남궁해연(45.여) 원장을 만났다.   고향이 중국 헤이룽장성 동녕현인 남궁원장이 주변 사람들에게 보...
  • 2013-11-27
  •      2009년, 연변공업학교 자동차전업을 졸업한후 리학철씨(25세)는 고향에 돌아와 전문농장을 경영하면서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하고있다. “외국에 일하러 가든 외지로 일하러 가든 모두 돈을 벌기 위한것입니다. 사실 외지에 나가서도 돈을 벌수 있겠지만 돈을 버는 길은 꼭 한갈래 길만 있는것이...
  • 2013-11-26
  • 성새농촌건설 5성급시법촌--밀산시 련주산진 해방촌 유수연당지부서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최성림 기자 피금련= 아름다운 흥개호반, 밀산시내에서 약 20여리 떨어진 곳에 수채화마냥 아름다운 농촌마을이 있다. 민족특색이 다분한 마을입구의 철대문, 시원히 뻗어나간 포장도로와 량켠의 영구성 배수로, 길게 늘...
  • 2013-11-26
  • (흑룡강신문=하얼빈) 2013년 1월, 하얼빈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년 전 2011년 여름, 한국사람들에게는 '안중근' 의사와 '빙등제'로 유명한 겨울의 도시잠시 하얼빈에 방문한 적이 있다.   대학교 4학년 하계방학 '해외 대학생 봉사단'에 참여해 헤이룽장성 계동현 조선족중학에 2주 간 ...
  • 2013-11-26
  • ㅡ영구시민위 원 부주임 안정애와 영구시인대민교외위 주임 김영일 새학기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의 학생수가 부쩍 늘었다는 뉴스는 조선족농촌 황페화, 조선족중소학생 감소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침체속에 빠진 조선족사회에 안겨주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조선족유치원이 민영에서 공립으로 허가받으면서 여기에 탄...
  • 2013-11-26
  • 단동예지나무역회사 윤동일사장 넥타이는 맬줄 몰라도 한복고름 하나는 아주 멋지고 예쁘게 맨다며 우스개소리를 던지는 단동예지나무역회사 윤동일사장(69년 생), 하루종일 돌아가는 재봉틀소리에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한복사업에 600여평의 한복공장에 들어서니 윙윙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자극하고...
  • 2013-11-26
  • 《털 없는 개》, 《사위감 점고》, 《렬사증문제》… 그의 대표작은 지금도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한다. 중국조선족연극의 계승과 발전, 인재양성에 마멸할수 없는 자취를 남긴 리영근배우, 은퇴후 장춘에서 생활하다 2010년 우리 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를《웃음의 왕별》,《연극계의 거장》으로 ...
  • 2013-11-26
  • 광동촌 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 김순철씨 감동 스토리   김순철씨(왼쪽) 1.56메터의 작은 키꼴에 50킬로그람도 안되는 왜소한 체구,전국로력모범이고 성특등로력모범이며 동성진 광동촌 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인 김순철(55세)은 겉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가 엮어가는 전기적 ...
  • 2013-11-22
  •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원로 서예가이며 화가인 지승원선생(84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문여기인”라는 사자성구가 선생에게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1946년 《길동일보》(《연변일보》 전신) 창간시절부터 근 25년간...
  • 2013-11-2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