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 윤세주 |
일본군의 40만 병력과 최후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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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황포동학회"에서 주최한 황포군관학교 건교 70주년을 기리는 자리가 있었고 "황포군관학교 건교 70주년 기념장"을 수여하는 의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문학거장 고 김학철선생님은 “우리들의 교관이였던 석정(석정은 호,이름은 윤세주)렬사의 기념메달을 달라”고 했고 한국에 거주하는 석정렬사의 후손들에게 넘겨준 일이 있다. 1937년 강서성 성자에 있는 “중국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분교) 특별반 (황포군관학교분교,국민당 교관과의 마찰로 특별하게 꾸려졌고 조선인들로 구성됨)”에서 교관으로 활동했기때문이다.
김학철작가의 글을 읽은 독자라면 책갈피속에서 자주 회자되는 석정 윤세주렬사의 이름을 기억할것이고 의용대 발족과정에서 옹벽같은 석정의 비중을 첫 페이지에서부터 읽을수 있다. 필자도 《주덕해평전》을 집필하면서“조선의용대”설립과정에 관한 자료를 접했고 석정렬사의 순국과정을 언급한바 있다.
김학철작가의 아들 김해양선생님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부친이 생전에 석정 윤세주렬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했고 첫 계몽선생으로 제일 존중하셨던 한분”이라고 증언한바있고 김학철선생 자신도 “…독립운동초년병(김학철 자신)으로서 그분을 숭배하게 된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자기의 저서에서 밝힌바 있다. “김학철문학 연구회”의 사이트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메인페이지에도 전문으로 석정렬사 관련 코너를 만들었는데 이는 김학철선생님의 생전에 석정렬사에 대한 존경과 무관치가 않다. 실제로 김학철선생님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본부에서 이따금 현지지도를 내려오는 석정 (윤세주)선생님을 내가 처음 뵌것은 프랑스조계마당(상해)거리에 있는 아지트에서였다.…석정선생님은 30대 후반의 장년으로서 훌쭉한 얼굴, 호리호리한 몸집에 목소리까지도 잔잔해 도무지 용사 같아 보이지 않았다. 사이토마코토 총독을 살해하려고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했다가 발각돼 7년 동안 징역을 살고 나온 열혈한으로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석정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또 지지를 받는 몇해동안 그분이 역정을 내는걸 한번도 못 봤다”고 쓰기도 했다. 우리들은 할빈에서 이등박문을 격살한 안중근이거나 의렬단 출신이라면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성정이 헙헙하고 거칠것으로 알지만 이는 착각이다. 알고보면 이들은 모두가 당시 최고엘리트 출신으로 높은 문화지식을 소유하고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읽으 면 안중근을 알수 있듯이 석정 윤세주의 년보를 보면 맑스주의 신봉자로 문학, 철학에 깊은 지식을 소유한 최고엘리트 출신이라는것을 알수 있고 황포교관 출신이라는것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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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시는 경상도에 소속해있는 모든 소도시처럼 기초시설이 완벽하고 성채가 깃든 알뜰한 도시로 조용해보이지만 독립운동기념관에 들어서면 반도의 독립운동중심지답게 당장에서 격앙된 분위기를 감지할수 있다.이만치 밀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시킨 유명지로서 자기의 강렬한 전통과 저항력사를 기반으로 타지역 주민들에게는 어깨에 힘 주고 그래서 어느 정도 배타적인 지역이란 지적도 뒤따른다. 이곳에서 석정 윤세주는 1901년 6월 24일 (현재의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동 880번지에서)부친 윤희규씨와 모친 김경이씨의 5남매중 막내로 출생하였고 부인 하소악과의 사이에 남선이라 부르는 아들을 두었다. (후에 유일한 아들이 실종)
1919년 3월 1일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화산 같이 분출하자 석정은 분출구 중심에서 밀양의 3.13저항운동을 주도했고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동북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김원봉과 투합하여 의렬단을 조직하고 극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에 잠행하여 일본군 지휘자들에 대한 암살과 일제행정기관들에 대한 폭파를 획책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여 7년 옥고를 치렀고 석방된후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황포군관학교 특별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군) 창건의 주요 멤버로 의용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1년 박효삼과 함께 의용대 1지대를 이끌고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석정은 모든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다. 1942년 2월 일본군은 4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태항산을 공격하기 시작하다가 5월에는 20개 사단 40만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때 조선의용군의 규모는 불과 3000~4000명 수준이였다. 일본군은 20개 사단 40만명으로 태항산을 완전 포위한후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폈다.
5월 28일 항일련합군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게 탈출로를 확보하고 전군이 탈출하도록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점령하고있는 량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 정부대원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 작전개시 5시간만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선생은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있는 선생을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 6월 2일 선생은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
“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
석정이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이였다. 선생의 나이 41세였다.
이 전투는 중국에서 “피의 5월”이라고 했는데 팽덕회가 지휘한 백퇀대전에서 철도 연선과 후방을 기습당하고 보루를 잃은 일본군들의 보복으로 인한 반소탕전역중의 주요한 전투였다. 석정은 전우인 진광화(중공당원)와 함께 태항산 석문촌에 묻혔다가 1950년 10월(어떤 자료에는 1949년으로 기록되여있음, 여시에서(한단시의 기록을 기준함) 하북성 한단시에 있는 “진기로예렬사릉원(현 동묘구 3렬17번 묘역)”에 의장되였다. 석정 윤세주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란 사료집에 등재한 최채의 회상기 “불과 피의 5월”에서 상세하게 묘사되는데 이런 상세한 사건전개는 필자가 지금 준비중인 《석정평전(잠정)》에서 상세하게 기록할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용대(군)는 두번의 교전을 치렀다. 첫 전투는 화북성 석가장과 가까운 원씨현 호가장에서 의용대무장선전대가 일본군과 치른 전투였다.이 전투에서 자서전체소설 《최후의 분대장》의 주인공 고 김학철작가가 다리부상을 입고 나가사끼형무소로 송치되여 다리를 잃는 비운을 겪었다. 석정과 진광화(본명 김창화)가 전사한 반소탕전은 1942년 5월에 있었다. 일본군은 20개 사단을 동원하여 태항산 소재 팔로군총부와 129사 사지휘부를 겨냥하고 공격했는데 조선의용대(군)는 부사령 박효삼의 지휘하에 팔로군 전방총지휘부의 철수를 엄호하였고 이 전투에서 윤세주와 진광화가 섭현 장자령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당시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장군도 전사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후 그를 기려 섭현과 경계해있는 산서성 서료현을 좌권현으로 개명했고 좌권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공신 36명중의 일원으로 되였다.
“피의 5월”이라 불리운 이 전투가 있은후 당시 중공중앙은 가장 소중한 지휘관(의용대는 정규군으로 모두가 군관들임)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전방에 남아서 교전을 치르는 조선의용군을 연안으로 이동시켰다.
석정이 전사한 다음달인 1942년 7월 31일 연안에서 발행하는 《해방일보》에는“정의 위해 숨진 조선전우들을 추도하기로 결정”이라고 제목한 중공북방국 결정을 등재했는데 “…적후에서 항전에 참가하여 팔로군과 어깨겯고 멸적의 위훈을 떨치고있는 의용대! 이 대의 석정, 진광화 호유백, 손일봉… 등 대원들이 화선에서 희생되였다.…이 위대하고 귀중한 국제혁명에서의 친선의 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9.18’에 태항구 모 지구에서 장례식을 거행하며 구당위원회 129사 정치부에서 진기로예변구, 림참회, 변구정부와 함께 장례식준비를 하기로 결정한 다’…”라는 내용들을 실었다. 그후 연안에서 석정, 진광화 등 렬사들의 추도식이 치러졌다. 1942년 9월 20부 《해방일보》에는 팔로군 총사령원 주덕이 추도식에서 한 연설 “자유 위해 희생되였거니 그 생명 영원하리”라고 제목한 추모문을 등재했고 같은 신문에 “조선의용군의 전사한 동지들을 추모하여”라는 엽검영의 추모글도 함께 등재했다. 그리고 석정 윤세주, 진광화, 장문해의 략력도 함께 등재했다. 추도식에서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등이 만장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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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 진광화의 유체는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장군과 한단시 섭현 석문촌 “진기로예 항일순국렬사공동묘지”에 나란히 안치되였다가 1950년 10월 21일 다시 좌권장군, 진광화 등 혁명렬사들과 “한단진기로예렬사릉원”에 의장되였는데 이는 신중국이 창립된후 제일 첫번째 국장(国葬)이다.
연변일보 최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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