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로산전투 전두지휘한 조선족장군 김인섭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5월30일 08시35분    조회:554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인섭



중윁자위반격전을 료해하는 사람이라면 1984년부터 1986년사이에 벌어진 유명한 로산전투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제138사를 거느리고 총탄이 비발치는 로산전투를 전두 지휘한 장령중의 한분이 바로 조선족의 우수한 장군 김인섭사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김인섭은 1940년 12월 길림성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장안진(오늘의 도문시 장안진)에서 출생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후 김인섭의 할아버지는 1910년대 조선 평안도의 한 시골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왔으며 그가 몇살밖에 안될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집안의 모든 살림은 가냘픈 어머니의 두 어깨에 의지해 간신히 이어나갔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김인섭의 가정생활은 어느 정도 좀 펴이긴 했으나 경제난은 여전이 막심했다. 그래서 1955년 그는 도문중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도와 로동에 참가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8살이 된던 해인 1958년 3월, 김인섭은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룡정주둔군 포병부대에 입대한 김인섭은 최선을 다해 신병훈련에 참가했으며 얼마 안되여 반장으로 잇달아 부패장, 패장으로 승진, 1960년 5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어릴 때 생활고로 학교에 더 다니고 싶어도 그만둬야 했던 김인섭은 입대한후 휴식일과 짬짬의 시간을 타내 문화지식과 정치리론을 학습하는데 몰두했다. 고중과목을 혼자서 다 자습한 그는 1962년 할빈군사공정학원에 시험쳤는데 소원대로 유도탄학부에 들어가게 되였다.

사람의 인생이란 참 묘하게 바뀌기도 한다. 대학에 입학한 김인섭이 부픈 심정으로 통지서를 들고 군부에 수속을 밟으러 갔더니 참모장은 그의 성적을 칭찬해주더니 말꼬리를 돌려 국내외 정세를 이야기해주면서 부대에서 조선말통역이 매우 필요하니 군부에 남아줄것을 요구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조직의 수요라 그는 인차 마음을 고쳐먹고 군부에 남아 정찰처에서 참모로 있으면서 조선말통역을 책임졌다.

살벌하던 《문화대혁명》시절, 김인섭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조선전쟁에서 개성정전담판 통역으로 있었던 큰형님이 특무니 간첩이니 터무니없는 루명을 쓰고 비판당하게 되자 그 영향이 친동생인 김인섭한테도 고스란히 넘어왔다. 그는 10년이나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1973년에야 비로소 정찰과장으로 임명받았다. 1976년초, 김인섭은 모 퇀 부퇀장 겸 참모장으로 승진, 그리고 1978년 9월에 다시 군부 정찰처에 돌아와 처장으로 사업했다.

1979년, 39살이 되던 해에 김인섭에게 배움의 기회가 다시한번 찾아왔다. 이해 9월 그는 조직의 추천으로 우리 나라 최고 군사학부인 북경군사학원(지금의 국방대학)에 가서 공부하게 되였다.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김인섭은 학업에 전부의 정력을 몰두했다. 1981년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성적이 우수한 그를 학교에 남기려고 하였으나 사절하고 자기가 소속한 138사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138사 참모장, 사장으로 임명되였다.

1984년 10월, 상급에서는 윁남자위반격전에 참가할 준비를 김인섭이 인솔하는 138사에 하달했다. 이렇게 되여 1985년 3월, 김인섭은 상급의 명령에 따라 부대를 거느리고 로산전선에 전격 진출했다.

로산전투에서 개선하고 돌아온 전사들을 따뜻이 맞아주고있는 김인섭사장.

중윁변경지구에 위치한 로산은 지세가 높고 가파로우며 열대수림이 울창해 이동이 힘들뿐만아니라 기온도 높을 땐 령상 48도까지 올라가 북방에서 자란 김인섭의 138사 병사들에게는 처음에 큰 시련이였다. 적아쌍방은 고지쟁탈전을 쉼없이 벌렸다.

매차의 전투를 조금의 실수라도 없이 지휘하기 위해 김인섭은 거의 날마다 포연이 자욱한 전초에 직접 나가 정황을 료해하고 새로운 작전방안을 세밀히 짰다. 적아쌍방의 진지들이 서로 넘겨다볼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워 우리 쪽에서 약간의 동정만 있어도 적군은 대포와 기관총으로 미친듯이 사격을 퍼부었다. 한번은 그가 전초선에 나가 시찰하는데 불과 8메터밖에서 포탄이 날아와 꽝하고 굉음을 울리며 터졌다.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엎디지 않았더라면 분신쇄골이 될번했다. 또 한번은 접전지역에 나갔다가 적들이 매설한 지뢰를 밟았다. 다행히도 불발탄이였으니 말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떤 후과가 일어났을지 상상도 하기 무서웠다. 이처럼 위태로운 환경에서도 김인섭은 자신의 안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전선에서 피흘리며 싸우는 전사들을 직접 찾아 격려해주었으며 주밀하게 작전방안을 세웠다. 1년동안 진행된 326차의 전투에서 김인섭은 번마다 좋은 전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1985년 9월 23일에 있은 로산전역에서 138사는 적군 2개 보병련을 한놈도 놓지지 않고 깡그리 섬멸하여 중앙군위로부터 축전까지 받았다.

《전사들이야말로 지휘원의 하느님이다.》 당시 인민일보 기자 취재시 김인섭사장은 《전사들이야말로 지휘관의 하느님이라는것을 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사들이 피 흘리며 용감하게 잘 싸우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처럼 큰 전과를 올릴수 있었겠습니까?! 지휘관의 결책이 아무리 정확하고 결심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전사들이 고도의 애국적각성과 희생정신으로 억세게 싸우지 않았더라면 지휘원의 결책과 결심도 절대 실현될수 없을것입니다.》 라고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1986년 11월, 로산전역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김인섭사장은 집단군 부군장으로 승진되고 1988년 9월에는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소장군사칭호를 수여받았다. 1990년 1월에는 중국인민경찰부대 총부의 참모장으로 부임, 그리고 1998년에는 성도군구 참모장, 부사령원으로 발탁되였으며 이해 7월에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중장군사칭호를 수여받았다.

2003년 6월, 김인섭장군은 그동안 45년이나 몸담궈온 군인생활을 결속짓고 퇴직했다. 그후 김인섭은 제9기 전국인대 대표로, 제10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던중 2008년 10월 2일, 병환으로 북경에서 향년 6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대학에서 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보통 세상 사람들은 공기를 마시고 살지만 선생은 연변대학, 연변조선족을 호흡하며 사는구나…》 이는 한국의 중국통 동훈선생이 박문일교수의 80세 생일에 보내온 축사의 한 구절이다. 외유내강형의 평생교수로 불리는 박문일교수는 연변대학의 전임교장으로 중국의...
  • 2013-07-01
  • [고마운 한국인] (주)국제 미다스 스포츠 유승호대표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 유승호대표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압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잘 알기때문에 가능한거지요. 때문에 남을 위하는 일은 돈도 돈이겠지만 우선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주)국제 미다스 스포츠 유승호 대...
  • 2013-07-01
  • 《학급에 가족사랑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몇몇 있어요. 한 학생은…》 말을 채 잇지 못한채 김옥란선생님은 한창이나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학교와 학생들을 항상 첫자리에 놓는 그는 언제 어디서나《학생들의 일이 가장 큰 일, 중요한 일》이고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숙사로 이사와 ...
  • 2013-06-30
  • 혼례는 인생의례의 일종으로 신랑, 신부가 사랑의 백년가약을 맹세하는 신성한 자리이다. 사회의 변혁속에서 우리 민족의 혼례는 새로운 변화양상을 보여왔는데 그중 주목해야 할 변화가 결혼사회자의 출현이다. 요즘 행사 사회자를 보는 연변전통례절문화원 홍미숙원장의 시각은 남다르다. 1990년, 도문시가무단에서 공연...
  • 2013-06-28
  • -길림신문 오기활기자와의 인터뷰   오기활 략력 1947년 5월 9일, 왕청현 석현진 달라자촌 출생 1974년 연변농학원 축목수의학부 졸업 1986년 연변대학 정치학부 졸업(통신학부) 1974~1984년 도문시 홍광향축목수의소 소장, 홍광향 당위 선전위원, 조직위원, 경제위원회 부주임, 도문시당위 정책연구실 연구원 1984~20...
  • 2013-06-28
  •      여기, 고래희의 문인 한분이 있다. 본명인 림국웅보다는, 시인 한춘이나 평론가 산천으로 더 익히 알려진 그는, 중국 북방조선족문단의 태두요 중국조선족시단의 현대시 기수이다. 담배와 술과 사랑과 문학만을 고집하며 70 평생을 살아오신 그는, 요즘 암투병 중에도 시집과 수필집을 북경에서 펴내는...
  • 2013-06-28
  • 프로필: 1964년 길림성 사평시 리수현 리수농장 출생, 1988년 동북사범대학 졸업후 심양대학 배치, 공안사업에 대한 애착으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동북사범대학 공안교육학 석사학위 전공, 졸업후 특수인재 신분으로 중국형사경찰학원에 전근, 2003년 공안부에서 주최한 전국경찰실무전술훈련반 참가, 2003년 향항에 가...
  • 2013-06-28
  • 박규찬은 연변대학의 제2임 교장이다.   1955년 5월, 주은래총리는 박규찬을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그의 령도재능에 대한 충분한 긍정이고 금후 대학사업에서 더욱 큰 공헌을 할것을 바라는 신임과 기대였다. 박규찬은 연변대학의 교학사업과 연구사업에 모든 심혈을 기울인 교육자였다. 박규찬은 조선...
  • 2013-06-28
  • 건축업으로 번 50만원 예술단 창단과 운영에 투입   진달래예술단 총감독 채규억 《저분이 예술에 투자하는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라오. 정말 보통사람이 아니라니깐…》 훈춘사람들은 채규억(62세)씨를 놓고 이렇게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채규억씨가 바로 2010년 10월에 훈춘시진달래예술단을 창단하고...
  • 2013-06-27
  • #1. 걷기가 목적이 된 시대를 산다   지금 있는 자리와 가서 닿으려는 자리의 간격, 그곳으로 가야 하는 목적이 있을 때 비로소 걷는다. 오랜 역사 동안 걷기는 수단이었다. 걸어가서 말하고 걸어가서 전한 것들이 모여서 세상을 움직였다. 세상은 빠르고 편해졌다. 두 다리를 쓰지 않아도 당신을 저 먼 곳으로 데려다...
  • 2013-06-2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