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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민족얼 사수한 이윤재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6월18일 08시31분    조회:4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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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이윤재
조선어학회 항일투사


▲ 동덕여고 앨범의 이윤재
이윤재(李允宰, 1888-1943) 선생은 일제시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국어학자였다. 올해는 이윤재 선생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숭덕학교 교원시절에 3·1 운동을 주도하였기에,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수양동우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기에, 1937년에서 1938년에 걸쳐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이 넘게 감옥살이를 다시 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우리말사전 편찬사업에 몰두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중진이었던 이윤재는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12월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 일생을 민족혼을 보급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침략자들에게 희생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윤재의 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일제강점기에 무슨 활동을 전개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평북 영변의 3·1운동을 주도
이윤재는 1888년 12월 24일 경남 김해군 우부면 답곡리(현재는 김해시 대성동)에서 아버지 이용준과 어머니 이임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윤재의 호는 환산(桓山), 한산, 한메, 한뫼 등으로 불리었다. 환산, 한산은 우리나라 산이라는 뜻의 한자어이다. 환국은 단군임금이 세운 조선, 즉 우리나라를 지칭한 용어이다. 한메, 한뫼는 큰 산을 뜻한다. 순 우리말로 지은 호다. 큰 산처럼 변치 않고 우뚝한 기상을 지니고자 하여 이윤재가 자신의 호를 '한메'라고 지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윤재는 1894년에서 1905년까지 11년간 마을의 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를 하였다. 재주가 비상하여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곳에서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서당시절 훈장으로부터 조선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 천자국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말이 너무 기뻐서 동무들과 춤을 추다가 도랑에 빠져 옷을 망친 일이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식민지로 전락하여, 대한제국은 멸망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윤재는 신식 학교를 다녔다. 1905년에서 다음해까지 김해 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1906년에서 1907년까지 대구에 있는 계성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다시 김해공립보통학교에 복교하여 1908년 3월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08년 5월 경남 김해군 답곡 소재의 함영(涵英)학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09년에서 1911년까지 기독교계통의 인사들이 세운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원을 역임하였다.

1911년에서 1913년까지 기독교계통의 학교인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원이 되어 조선어와 역사과목을 가르쳤다. 1915년에서 197년까지 3년간 일본 동경에 머물면서 와세다대학의 문과를 다니며 학업에 정진하였다. 1918년에서 1919년까지 2년간 평북 영변에 있는 숭덕학교에서 조선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숭덕학교 시절 영번의 3·1운동 시위를 주도하였기에 1년 6개월간 평양 감옥에서 옥살이 생활을 하였다.

1919년 3월 2일 조선독립선언서 40여 매를 등사, 반포한 사실 때문에 일제에 체포되었다. 신의주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사유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윤재가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일제 재판부는 같은 해 6월 17일에 기각하였다. 그러자 그는 같은 해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는 같은 해 7월 31일에 또 기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독립운동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일제의 재판부(<대정 8년 형상 제500호 판결>)에 당당히 밝혔다.

"인류가 생존한 이상 그 개체와 종족을 보전할 의무가 있다. 조선민족이 조선민족의 독립을 자결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조선민족은 반만 년의 역사를 이어온 당당한 독립 국가이므로 지금 타 민족의 지배를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은 신과 인간에 대한 죄가 될 수 없다. 조선은 일본에게 병합된 이래 멸망에 빠져 들어갔다. 그런데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의 문제가 생겼다. 이는 조선민족의 자구(自救)에 관한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민족이 독립을 획득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민족이 독립을 획득하는 것은 강탈당한 물건을 되돌려 받는 것과 같으므로 죄가 되지 아니한다. 독립선언서는 불온한 문서가 아니고 그것을 반포한 것도 보안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이상과 같이 그는 우리민족이 일제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잘 설명하였다. 1920년 7월경에 출소하였다. 1차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윤재는 일본 유학을 재차 도모하였으나, 전과 사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1921년 베이징에 도착한 뒤, 독립운동가인 신채호(1880-1936)를 찾아갔다. 3년간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수학하였고,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반일 의식이 더욱 굳어졌다. 1921년에서 1923년까지 3년간 베이징에서 신채호와 함께 보냈다. 이 시기 기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을 수용하였다. 신채호가 강조한 민족의 영웅, 우리나라 상고사에 대한 사관, 그리고 일제에 대한 비판 등을 계승하였다.

베이징시절인 1922년에 그는 흥사단에 입단청원서와 자신의 이력서를 내고 문답식에 합격하여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그에 대한 문답식은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위원장인 안창호가 맡았다. 이후 그는 안창호의 노선에 입각하여 흥사단, 수양동우회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수양동우회에서의 독립운동
1923년 여름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후 이윤재의 일관된 목표는 독립쟁취에 있었다. 이것은 조선민족의 대계획이라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꼭 바라고 나아갈 희망 한 가지가 있다. 그를 여기에서 기다랗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를 리 없다. (중략) 자, 오늘부터는 우리가 전민족적으로 대방침을 세우고 대계획을 정하자. 그리하여 너니 나니 가리지 말고 오직 한 깃발 아래 모여서 저기 보이는 한 목표를 향하여 서로 손목 잡고 나아가자. 이것이 이 신년에 정할 조선민족의 만년지계라 부르짓는다.”(「희망의 신년」, <동광>제9호, 1927, 1.)

전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자고 이윤재는 호소하였다. 그의 우리 말글운동을 포함한 모든 활동은 독립 쟁취를 위한 운동이었다.

1924년 9월부터 1년간 오산학교(교장 이승훈) 교원으로 조선어과목을 담당하였다. 이 교과목 시간에 한글의 역사를 교육한 것이 일제에 적발되어 강제로 해직되었다. 서울로 내려간 이윤재는 1925년 4월부터 1927년 3월까지 낙원동에 있던 협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협성학교 시절 그는 독립운동을 하던 청년 윤우열(尹又烈)을 도와주었다. 윤우열의 사안에 이윤재도 연루되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은 이윤재를 ‘갑종요시찰인’으로 규정하고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경신학교·동덕여학교·연희전문학교·배재학교·중앙학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서울 신촌에 있는 연희전문학교를 갈 때는 단 5전의 전차 삯을 왜놈에게 주기 싫어서 걸어 다닌 일화를 남겼다.

특히 경신학교 교원 시절인 1933년과 1934년 사이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주저없이 하였다. 그는 청년들에게 “까마귀는 허수아비를 얕보기 때문에 그 머리위에 앉을 뿐 아니라 먹을 것도 없는 허수아비의 머리를 쪼아대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얼이 없는 사람들은 간악한 외적들에게 얕보이고, 얕보이면 침략을 당한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얼은 짙은 피와 하나가 돼서 나라를 지키고 그 나라 말을 지킨다. 난 여생이 몇 해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러다가 저승으로 갈 것이다. 십중팔구는 감옥에서 죽을 것이다.”(민재호, 「이윤재 선생님의 조국애」, <경신>42, 1985)라고 훈화하였다.

이처럼 그는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지녀야 나라와 국어도 지킬 수 있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자신은 독립투쟁의 전선에 매진하다가 감옥에서 죽게 되더라도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라고 학생들에게 민족 독립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시기의 이윤재

 

한편 중국 베이징시절 흥사단원으로 활동한 이윤재는 국내로 돌아와 흥사단의 노선을 이은 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 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윤재는 수양동우회의 기관지인 <동광>에 발표한 「자조와 호조」(1926), 「조선사람이거던」(1926), 「우리의 수양운동(일)」(1927), 「희망의 신년」(1927)이라는 글을 통해, 개개인의 인격 혁명과 전민족의 단결을 통해 민족해방을 달성하자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이윤재는 안창호가 흥사단에서 제창한 대공주의(大公主義)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그를 1937년 6월 7일에 체포하였다. 일제는 그를 “예전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살아왔던 자”로 결론지었다. 그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8년 7월 29일에 보석으로 출옥하였다. 1년이 넘도록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그는 일제에 협조하지 않았다. 다시 조선어사전 어휘 주해작업을 계속하였다.

조선어학회에서의 독립운동
이윤재는 한글운동의 핵심인물로서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은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한글 맞춤법의 통일, 표준어의 사정(査定), 외래어 표기법의 제정이 민족어 규범 수립 운동에 해당한다.

먼저 이윤재가 민족어의 규범을 수립하는데,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겠다.

첫째로, 한글맞춤법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였다. 그는 ‘나는 점심밥과 우유와 차를 먹었다’라는 말을 쓸 때에 ‘나는 べんトウ와 Milk와 茶를 먹었다’로 쓰는 것은 기괴한 글이 된다고 하면서, 우리글에 한자를 넣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순국문으로 문자 생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둘째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에 참여하였다. 이윤재도 1930년부터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 수정위원, 정리위원으로 3년간 활동하였다.

셋째로, 조선어 표준어 사정 작업에 참여하였다. 1935년 1월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의 표준어를 사정(査定)할 때 사정 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넷째로, <한글>지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하여 민족어 규범 수립에 기여하였다. 1934년 4월(11호)에서 1937년 5월(45호)까지 이윤재가 <한글>의 편집을 맡아 발행하였다.

다음으로 이윤재는 16만 어휘에 달하는 우리말의 뜻풀이를 제대로 한 민족어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1929년 10월 31일 이극로가 한글날에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31년 1월 6일에 이윤재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간사에 선임되었고, 이후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 발생 전까지 우리말 주해 작업에 몰두하였다.

 

▲ <표준 조선말 사전>

 

한편 이윤재는 1933년 겨울부터 단독으로 중사전 규모의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시작하여 두 해 동안이나 하였다.

이윤재가 단독으로 우리말 어휘를 수집하여 뜻풀이를 한 원고는 해방 뒤 그의 사위가 되는 김병제가 이윤재의 사전 유고를 보충하여 <표준 조선말 사전>(1947)으로 출간하였다. 1953년에는 9판까지 발행되었다.

이 사전이 지닌 의미는 1957년 조선어학회가 지은 <조선말 큰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남한의 대표적인 국어사전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데에 있다.

일제시기 이윤재는 우리말과 한글 수호 운동이 민족독립운동임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그는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또 민족 운동이 되는 것이다.’(이석린, 「한글지와 이윤재 선생」, <나라사랑>13, 1973, 57쪽.)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민족주의 언어관을 잘 드러낸 입장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그의 한글운동은 민족혁명의 토대를 닦고자 함에 있었다.

이처럼 이윤재가 조선어학회의 동지들과 함께 언어독립운동인 한글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탄압하였다.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이윤재는 1942년 10월 함남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일제 형사들로부터 매일 난타를 당한 것도 모자라 6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그는 살아서 감옥에서 풀려나기 어려울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다.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12월 8일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항일투사로서의 위상
일제시기 내내 이윤재는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도 재판 판결문에서 그를 “일찍부터 한일합병에 불만을 품고서 끝까지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기에 이른 자”라고 정확히 기술하였다.

이윤재는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국어학과 역사학을 연구하고 이를 민간사회에 열렬히 보급하는 활동을 하였다. 전국의 여러 중등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조선어 강의를 맡았다. 조선어교과 시간에 조선사 교육도 병행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의 글은 일제의 탄압으로 삭제가 많았고, 그가 지은 <성웅 이순신>(1931)은 발매금지가 되었다. 그의 저서가 일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었기에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신문과 잡지에 우리 말글 연구와 수십 편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글을 남기는 활동을 지속하였다. 동시에 3·1운동에 참여하였고,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조선말큰사전을 편찬하고자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에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일제의 감시망에 걸려 갑종요시찰인으로 살면서,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끝내 순국하였다. 비타협 민족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이윤재와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던 이중화는 그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라를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기를 자기 한 몸 자기 한 집안보다 더하던 이로서, 이 아름다운 우리의 말이, 좋은 우리의 글이 아주 멸망의 고비에 닥쳤을 무렵에 이를 슬퍼하고 이를 분히 여기어 어찌하면 이를 건져 내어 바로잡고 널리 펼칠까 하여 교단에서 강단에서 입으로 가르치고 부르짖으며 잡지와 신문에 글을 실어서 애를 태우고 헤매던 것이 오직 그의 하나인 일이었습니다.”(「머리말」, <표준 한글사전>(이윤재 지음), 대동문화사, 1953.)

이처럼 이윤재는 자나 깨나 심장의 박동이 뛰는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 말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데 헌신하였던 것이다. 우리민족이 조선의 역사와 말글을 바로 알아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 이윤재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우리 말글을 비하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의 묘소는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동에 있다. (한글학회 연구위원 박용규)
 

▲ 이윤재 묘소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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