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한국나들이 조선족들의 모델- 백운산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7월4일 10시33분    조회:854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백운산
한국의 낚시술로 중국고기를 낚으며 돈농사와 자식농사를 함께 잘했다


고맙게도 정녕 내가 찾던 한국을 나들이 하는 조선족의 모델을 만난 것은 지난 6월 26일이다.

백운산(白雲山), 59세, 그는 하향지식청년(고졸생), 연변화룡탄광로동자, 해방군공정병(4년), 도문시운수공사, 도문시당위판공실, 도문시과학위원회 등 공, 농, 병, 학과 기관사업터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직책을 다 수행하다가 1985년에 한국을 다녀온 세상을 알게되여  1987년 33나이에 모험을 무릅쓰고 하해(下海)하여 등탑없는 바다에서 지금도 열심히 노를 젖고있다.

주변의 사람들은 백운산을 남보다 앞선 사람, 정직한 사람, 끈질긴 사람, 깔끔하고 세심한 사람, 술 담배를 모르는 사람, 사회에 대한 판단력이 빠른 사람, 허심하게 배우는 사람, 돈농사와 자식농사를 함께 잘한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첫 한국나들이

1985년 10월 백운산은 수십년간 소식이 감감하던 한국의 백부님한테서 초청장을 받고 남동생과 함께 한국행을 하였다.

그때는 <<88서울올림픽>>전이이고 중한수교전이라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자본주의 나라였다. 그래서 사회주의중국, 그것도 도문시당위판공실에서 사업하는 그로서는 한국에 간다는 것이 그야말로 뒷일이 걱정되였다.

한국에 가보니 중국서는 그래도 많이 돌아 다녔고 남보다는 좀 앞서 눈을 떴노라던 그가 한국에 가보니 모든 것이 새롭고 희귀하였다. 그래서 반년간 한국땅을 메주밟듯 다니면서 시장을 고찰하고 아직까지 내가 못 보던, 다른 사람도 쓸것이라는 가지가지의 생필품과 간단한 기계들을 샘풀로 중국에 갖고 왔다.

1986년 도문시정협에서는 백운산을 주체로 출국인들이 갖고온 샘풀들로 <<해외제품전시회>>를 조직하였다.

한국서 배운 낚시술로 중국서 고기를 잡다

그번의 첫 한국행에서 눈을 크게 뜨게된 그는 한국서 얻은 정보와 기술을 중국서 활성화를 하려면 격에 맞는 단위를 찾아야 한다며 1986년에 도문시과학기술위원회로 전근하여 도문시과학기재복무소를 꾸렸다.

1986년에 백운산은 한국서 갖고 온 <<서서미는 벼낫>>을 도문시제2경공업공장에 기술양도를 하고도 1987에는 중국북방공업공사 장백기계공장에서 생산하는 <<서서 미는 벼낫>>을 동북3성에 다니며 여러모로 홍보하며 대리판매를 하였다.

<<서서 미는 벼낫>>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서서 밀기에 허리가 아프지 않으며 전통적인 벼낫보다 보통 3ㅡ5배의 능률을 낼수있어 농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한편 1987년에 대담한 창업으로 자기의 가치관을 실현고저 33살 나이에 대담히 하해(下海)(그때는 하해라는 신조어가 없었다)하고 도문시 모단위와 손잡고 정보를 제공하며 한국에서 선정했던 성인용품으로 도문에 <<부부운동쾌락기>>공장을 세우고 대폭홍보를 한데서 <<부부운동쾌락기>>가 전국의 24개 성시에서 히트를 쳤다. 큰 돈뭉치 앞에서 합작파트너가 신용을 지키지 않자 백운산은 아예 혼자서 공장을 상해에 옮기고 5년간 경영하였다.

백운산이 생산하는 <<부부운동쾌락기>>가 전국서 히트를 치자 북경 전국의 여러 대성시에 백운산네<<부부운동쾌락기>>를 본따 만드는 모조공장들이 서기도 했다.

1991년 백운산은 또 상해에 어린이 운동용품으로 한국서 히트를 치던 <<퐁퐁뛰기>> 상생산공장을 세우고 전국의 어린이들을 대상하여 판로를 개척했다.

공장을 경영하면서 백운산은 기술, 생산, 홍보, 판매 등 환절을 자신이 직접 틀어졌고 부품생산은 <<남의 불을 빌어 고기를 구워먹는 방법>>으로 남들에게 위탁생산을 시키고 공장에서는 렴가로력을 조직해 조립만 하였다.

한편 공장을 경영하면서 그는 정기적으로 한국나들이를 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와 기술, 선관리를 배웠다.

한국서 일하는 백운산을 보고 사람들은 <<백사장이 그만 하면 안 됩니까? 왜 지금도 수모를 당하며 한국서 따궁(打工)을 합니까?>>며 리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실은 <<범의 굴에 들어 가야 범을 잡고>> <<돈을 벌면서 기술을 배우는데 말이다>>

한마리의 고기를 얻는 것은 한끼의 밥을 얻은 것이요 낚시술을 배우면 평생의 먹거리를 얻는 것이다. 백운산은 이렇게 한국서 낚시술로 중국의 고기를 낚았다.
                        
당하기도 했다
몇 년전에 백운산은 한국의 모 스님과 손잡고 한국의 <<부처님이 오신 날>>을 대상하여 도문에 초롱생산공장을 세우고 2년간 초롱공장을 경영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한국측의 불신으로 자기가 선대한 생산자금을 포함해 인민페로 5만 여원을 당하기도 했다.

1987년에 백운산이 연변일보에 낸 <<서서미는 벼낫>>광고


 


자식농사도 잘했다.
백운산에게는 올해 32살되는 아들이 있다. 아버지가 경상적인 떠돌이 생활과 도문-북경렬차 렬차원인 어머니로 하여 자기를 감독관리하는 부모들이 없게 되자 아들은 많은 시간을 PC방에서 보냈다. 아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다. 아들애가 컴퓨터를 다르는 솜씨가 오직 능했으면 모 PC방 주인이 중학생을 한달에 1000원씩 주겠다며, 그것도 3개월 로임을 단번에 함께 미루 주겠다며 자기네 직원을 해달라며 꼬드겼다. 늘 집을 비우기에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관리에 구멍이 생기게 되자 백운산은 아들에게 사준 1만5천원짜리 컴퓨터를 당장에서 망치로 때려부셔버리며 엄포로 아들을 닦아 세우기도 했다. 그후로부터 아들애는 각성하고 학습에 노력하여 정주검찰학원에 입학, 졸업후에는 아버지의 주장으로 한국에서 막벌이를 하며 사회의 말단생활를 체험하며 세상을 알고 돈벌이의 간고함을 알게했다. 그리고는 아들이 어느정도 홀로서기를 하게 되자 중국에 돌아와 위해, 대련에서 홀로서기로 한국상품경영을 하도록 부축한다.

<<부자간이 창업을 화제로 열심히 대화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저는 무한한 행복을 느낌니다. 아들이 혼자서 생활하며 식당생활을 하는 것이 건강을 해친다며 얼마전에 연길에 집을 사놓고 세식구가 함께 생활하면서 아들의 사업을 돕자고 합니다.>>

 이는 래일에 이사를 한다는 백운산의 안해가 기뻐서 하는 말이다.

 이 팔팔한 나이에
<<나는 매일 마작판에 붙어있는 사람들을 보면 눈이 감긴다>> <<젊어서는 할 일들이 찾아 오는데 늙으면 내가 할 일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75살까지 분투하겠는데 이 팔팔한 나이(59)에 지금부터 앞으로 할 일을 만들겠다.>>

이는 59살 나이를 팔팔한 나이로 75살을 정년퇴임으로 정하고 여생의 창업을 꿈꾸는 백운산의 말이다.

백운산은 돈이나 욕심보다는 <<남이 안하는 것, 내가 반드시 해야하는 것, 사회에 필요한 것>>에 눈을 박고 창업대상을 찾는다.

지난 해부터 그는 100세 시대를 겨냥해 조선의 원재료로 건강식품을 개발하려고 구상했는데 조선의 핵실험으로 도문사람들이 지하수를 먹는 것을 꺼리는 것을 보고 조선의 원료로 건강식품을 개발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단다.

백운산의 인생은 개척, 분투, 배움의 인생이다.

일본의 <<부채왕>> 미야와키 바이센죠는 접부채문화를 <<인풍재악(人風在握)>>이라고 한다.
<<인풍재악>>이란 <<삶의 바람은 자기 손에 쥐여있다>>는 것이다.

자기에 손에 쥐여있는 바람을 어떻게 일으키냐는 각자의 나름이다.

백운산은 언녕 30대에 삶의 바람을 세차게 일으켜 오늘의 성공을 이루고 75살을 정년으로 래일에 도전한다.

필자는 <<한국나들이를 하는 많은 조선족 언제까지 품팔이를 해야하나?>>는 현실적인 물음에 백운산을 모델로 추천하며 <<백운산(白雲山)>>에서 불어올 춘풍, 광풍을 기대한다.


길림신문 오기활기자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ㅡ단동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김택룡회장 인터뷰 김택룡 프로필 1955년 단동시 출생 1972년 단동실크학교 입학 1974년 봉성시실크공장 1976년 참군 1979년 단동시인쇄공장 과장, 부총경리 1986년 단동시인쇄공장 총경리 1995년 일본합작 인쇄회사 설립 2005년부터 현재까지 단동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회장 민간단체로...
  • 2013-07-30
  • 당대 중국조선민족음악의 정초자의 한사람인 작곡가 정진옥을 사람들은 천재적인 음악가라고 부른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들은 우리 민족 음악사의 영원한 멜로디로, 그가 남긴 음악주장은 후세대의 앞길을 비춰주는 불멸의 등대로 오늘도 찬연한 빛을 뿌리고있다. 전투장의 군악대 대장 정진옥은 1926년6월 조선경상남도...
  • 2013-07-30
  •   [조글로기업탐방 3] 方美星! 마성의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다     상큼하면서 당당한 느낌이 묘한 그녀 연변람성무역유한회사 대표리사 방미성씨를  비가 오는 7월 24일 숨막히듯 작은 공간에서  만났다. 코구멍만한 매장에서 쉴새없이 돌아가는 그녀를 나는 넋을 잃고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 2013-07-29
  • -중국 조선족의 이름난 안무가 《탁월한 무용가》 최옥주   1990년 10월, 연변가무단의 중량급 대형무용극《춘향전》이 북경아시안게임 예술축제에서 국내외 관중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받았다. 중국의 문예계의 권위인사는 심지어 《춘향전》을 우리 나라 《7대 민족무용극》의 하나라고 극찬하면서 사람들을 도취시키...
  • 2013-07-29
  • -흑룡강성 탕원현조선족중학교 리춘선선생님을 찾아 《학생을 관심하는것은 교원의 직책으로 특히 장애자나 후진생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후진생들은 부모의 교육이 결핍해 마음이 항상 얼어있는데 교원의 사랑으로 녹여줘야죠.》 이는 흑룡강성 탕원현조선족중학교 1학년 담임교원 리춘선선생님(45세)의 말이다. 일전 ...
  • 2013-07-27
  • 한국 메이크업 전문가 신해련 원장 인터뷰 신 원장이 메이크업 강의를 하고 있다 (흑룡강신문=칭다오) 김명숙기자= 한국의 세련된 메이크업과 스타일링(形象设计) 문화를 중국에서 꾸준히 심어가는 한국인 여성이 있다. 신해련 원장이 그 사람이다.   중국이 좋아서 중국에서 살기로 작심했고, 한국에서 15년간 배워온 기...
  • 2013-07-26
  •  한겨레 리더 릴레이인터뷰   —철령용산골프국제구락부 변용 동사장   골프장을 넘어 리조트 개발과 조경사업으로 확장 (흑룡강신문=하얼빈) 김영우 특약기자= 철령용산골프장 변용 동사장은 그의 개성만큼이나 독특한 이력과 성공 스토리를 만든 장본인이다. 1965년 중국 요녕성 개원에서 출생한 그는 1989년에...
  • 2013-07-26
  • [조글로 기업탐방2]   도토리마을 문룡철’촌장’ “도전하는 멋에 산다” 연길시도토리마을민속식품회사를 찾아     도토리 자체만을 놓고 보면 음식재료라기보다는 다람쥐먹이에 더 가깝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도토리를 주워 새로운 식품인 도토리묵을 만들어냈다. 우리 조상들의 예...
  • 2013-07-26
  • 길림대학 제2병원 박성동의사: 대퇴골괴사 최적치료법은 자체대퇴골 보존술 이또만교수와 함께 있는 박성동의사(오른쪽) 대퇴골괴사에 걸렸다면 사람들의 머리속에 스쳐지나가는것이 난치병에 걸렸다는 생각이다. 길림대학 제2병원 골과 조선족의사 박성동(42세) 부교수는 대퇴골괴사치료는 보통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일반적...
  • 2013-07-25
  •  ----미래에셋생명 MFC지점 최연소 매니저 조선족 이명창 씨 (흑룡강신문=하얼빈) 한국의 보험영업하면 내국인들조차도 어렵다고 고개를 젓군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전문 분야에 조선족 매니저가 활약하고 있어 주목된다고 한국보험신문이 전했다.   "중국동포들에게 올바른 보험문화를 전하고자 보험영업에 도전하게 ...
  • 2013-07-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