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채택룡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7월8일 13시41분    조회:991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채택룡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창시자-채택룡.

지난 2004년 6월 1일 연길공원에서 《채택룡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그날 제막식에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평론가 김만석선생은 《채택룡은 우리 아동문학에서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을 제일 처음 개척한 에누리없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창시자이며 자격이 당당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일찍 1920년대말부터 조선문단에 얼굴을 보이고 해방후와 건국후에는 로작가로 대두해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성장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한 채택룡선생, 생전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레브 똘스또이의 명언을 즐겨 인용했던 그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선구자의 한사람으로 되기에 정녕 손색이 없었다.

아동문학에 몸을 바쳐 70여성상

채택룡선생은 1913년 2월 6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의 한 빈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1929년 회령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1년 도꾜 일본대학 예술과에서 고학하다가 경제난으로 중퇴했다. 1938년 12월 중국 동북으로 건너와 연길현 명륜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5년 연변고중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때의 채택룡선생.

해방전에 동요동시를 위주로 100여편(수)의 아동문학작품을 발표했던 선생은 1932년 《3인동요집》을 출판하며 이름을 날렸다. 1945년 10월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1950년까지 《한민일보》, 《길림일보》, 《인민일보》, 《연변민보》, 《동북조선인민보》, 《연변일보》사에서 편집, 기자로 활약하면서 문학창작에 정진했다.

초창기(1951년) 《연변문예》(<연변문학> 전신) 편집으로, 연변고중(1952년) 교원으로 열심히 사업한 선생은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면서 꾸준히 작가적 기량을 다져나갔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창작위원회 주임, 《아리랑》(<연변문학> 전신)잡지 편집비서를 력임하면서도 시종 붓끝을 쉬지 않았다. 1945년부터 1956년사이 종합집 《어깨동무》, 동요동시집 《나팔꽃》을 출판했고 이 시기에 창작한 가사 《베짜기노래》(1947년 창작. 허세록 작곡 방초선 노래)는 당시 중국조선족이 수상한 국가급상으로는 최고상이자 또한 최초로 전국군중가요 2등상(1954년)을 수상했다. 동요 《병아리》, 《나팔꽃》, 《사탕비 와요》, 《개구리》 등은 작곡가들에 의해 노래로 창작되여 어린이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1996년 부인과 함께.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 2, 3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활약하며 자치주건설에 지혜를 모았던 그는 1959년 억울하게도 우파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를 강요당했고 1964년에는 핍박에 의해 해외망명의 길에 올라야만 했다. 장장 19년이나 가족과 떨어져있던 선생은 1983년에야 정치명예를 회복받고 귀국했다. 이듬해(1984년) 동요동시집 《병아리》를 출간한데 이어 100여편(수)의 아동문학작품을 정력적으로 창작하며 새시대 중국조선족 어린이들의 생활을 생동하게 보여주던 선생은 애석하게도 1998년 10월 26일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28년 처녀작 발표 가프문학에 동조

선생은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더듬어보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920년대말 30년대초에 나는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 산생 발전한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은 소위 문학을 지향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 먼바다 모진 풍랑속에서 헤매다가 발견한 등대마냥 진보적인 작가, 시인들이 추켜든 신경향파, 카프의 홰불을 따르던 애어린 문학애호가들속에 먼발치에서나마 나 자신도 고스란히 끼여든 셈이랄까…》

채택룡선생은 14세때인 1926년 6월부터 카프아동문학간행물인 《별나라》 잡지를 읽으면서 프로아동문학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1927년 동요 《어린동생》을 창작하여 1928년 신춘호 《별나라》에 발표한데 이어 그해 《별나라》에 또 동요 《개미》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임효원(좌), 김학천(우)과 기념사진을 남긴 채택룡선생.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선생은 1938년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리호남, 김조규, 천청송, 현경준, 리학성(리욱) 등 작가, 시인들과 접촉, 진일보 문학탐구활동을 전개했다. 해방후에는 김례삼, 윤정석 등 아동문학작가들과 손잡고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화원을 꽃피우는데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선생이 중국조선족의 제1대 작가로, 조선족아동문학의 정초자로 존경받는 리유이기도 하다.

중국조선족아동문학 대부분 쟝르의 개척자

김만석선생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은 1930년대에야 자기의 작가군체가 형성되였고 작품토대가 마련되였으며 발표원지가 해결되였다. 작가들로는 최서해, 윤극영, 리호남, 천청송, 안수길, 그리고 채택룡, 김례삼, 함형수, 리규화, 렴호렬 등이였고 1936년 연길교구장(敎区长) 백화동이 룡정에서 《카톨릭소년지》를 출간함으로써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은 자기의 발표원지도 갖게 되였다. 이런 조건에 의해 형성된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초창기에 채택룡선생은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 쟝르 개척자로 나섰다.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세운 채택룡시비.

당시 간도에 살고있던 우리글 아동문학작가들 중 제일 먼저 동요를 개척한 작가는 윤극영(<반달>1924)과 채택룡(<어린동생>1927년)선생이였다. 하지만 윤극영은 1947년에 조선으로 귀국했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중국조선족동요의 개척자는 채택룡선생이였다. 동시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 최서해가 중국 간도에서 쓴 《시골소년이 부른 노래》가 첫작품으로 되지만 그는 그해 12월 서울로 들어갔다. 뒤를 이어 나온 동시가 바로 채택룡선생이 쓴 《사랑하는 누나여!》(1932년)라는 동시였다.

동화를 일찍 쓴 작가는 채택룡, 리호남 두분이였으나 리호남이 1938년에 동화 《딱소리》를 발표했다면 채택룡선생은 그보다 6년전인 1932년에 동화 《딱따구리》를 발표했었다.

아동소설을 쓴 작가들로는 채택룡, 리규화, 안수길, 렴호렬이였는데 리규화의 《가짜증서》와 안수길이 쓴 아동소설 《떡보》는 1940년대에 씌여졌고 렴호렬이 쓴 아동소설 《아름다운 미소》는 1940년 5월 26일까지 만선일보에 련재되였다. 반면에 채택룡선생이 《소년세계》에 발표한 아동소설 《삶의 빛》은 1932년부터 1934년 사이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동소설 역시 채택룡선생이 개척한 것으로 볼수 있다고 김만석선생은 말한다.

1959년 채택룡선생이 우파에 몰려 로동개조할 때 그이에게 힘을 주고저 찍어보냈던 가족사진.

가족과 생리별 장장 19년간 해외 망명

채택룡선생에게 있어서 해외 망명생활은 그의 인생과 가족에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쓰고(1959년) 모든 정치권리까지 박탈당하며(1962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로부터 권고퇴직까지 당한(1963년) 선생은 부득불 해외 망명의 길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1964년).

채택룡선생의 아들 채영춘씨는 《아버님의 귀환》이란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점차 셈이 들면서 나는 아버님의 해외망명은 침묵을 위한 막부득이한 선택이였고 끈질기게 참고 견디기 위한 존엄의 표현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현실은 그 어떤 설전(舌战)으로 해명할 여건이 아니라 인내로써 극복해야 할 무거운 인생의 시련임을 깊이 감수하면서 내린 아버님의 선택이였음을 나는 뒤늦게 느끼게 된것이다. 아버님께서 이 같은 광란의 세월을 <우파>라는 신분으로 버텨낼수 있었겠는지가 의문이고 그러면 우리 이 가정은 어떤 참상을 당할지도 모를 끔찍한 일이 아닐수 없다… 》

한창 정열에 끓어넘칠 40대 중반, 창작의 권리도 생활의 권리도 모두 박탈당한 선생이 선택한 길은 망명이였다.

정치적 핍박으로 1964년 합법적 수속을 밟아 조선으로 출국했던 선생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가족과 생리별해야만 했다.

가족사진.

《카프》시기의 작가, 중국조선족 제1대 작가로서의 신분과 돈독한 인맥관계는 이국의 작가동맹, 신문사와 같은 문화기관에 들어갈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주어졌지만 그때마다 단연히 사절했다. 신상을 걱정해 주변에서 관심어린 뜻도 보내왔지만 《홀아비》의 적막한 생을 끄덕없이 영위해나갔다. 그러던 1983년 선생은 드디여 정치명예를 회복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식들과 지인들의 노력으로 중조 두나라 출입국관계부문의 허가절차를 밟아 드디여 정식으로 귀국의 길에 올랐다. 장장 19년만에 이루어진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선구자의 귀환이였다!

참고도서 및 자료:

1)채택룡문집-연변인민출판사

2)김만석-《채택룡선생의 아동문학활동과 그 문학사적의의에 대하여[1999년 《문학과 예술》 제2기])》

3)채영춘-《아버지의 귀환》[연변문학 2011년 제8기]


길림신문 김룡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조선족 트렌스젠더 김성 결혼 10년, 남편과 잘 살아 아시아투데이 홍순도 베이징 특파원=중국에서도 트렌스젠더로 사는 것이 간단치가 않다. 더구나 예술가라면 더욱 그렇다고 해야 한다. 주변의 눈길이 결코 고울 수가 없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조선족 트렌스젠더 무용가로 유명한 김성(金星·48) 역시 ...
  • 2015-04-23
  • 김치민족이라고 불려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우리 민족은 김치독을 보관하는 김치움을 무척이나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30년전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주택이나 아빠트 앞뒤에는 창고가 있었고 창고 한쪽에는 김치움이 있었다. 그러나 창고가 흉물스럽게 보였던지 아니면 오르는 땅값을 버틸수 없었던지 어느새 창고는 사라졌고...
  • 2015-04-21
  •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8] 연길 ‘그리나한복점’ 한선순사장의 한복 사랑     연길 ‘그리나한복점’ 한선순사장   지난 12월 13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펼쳐진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직업녀성연구반 설립 15주년 기념행사에는 남다른 패션쇼가 열렸다. 40대~60대 녀성기업인들이...
  • 2015-04-14
  • 연변천흠계렬사 연장춘총재 창업 마인드 올해로 해외귀국 8년차를 맞고있는 연장춘(47세)씨의 명함장은 대표 타이틀인 연길해외귀국창업협회 상무부회장, 연변천흠(天鑫)계렬사 총재, 연길물업협회 상무부회장, 부비서장, 연변해외귀국창업그룹 총재 등 일부만 적어도 명함장이 찰 정도로 많다. 2007년 12월,해외에서 귀국...
  • 2015-04-14
  • (서울=연합뉴스) 전명훈 기자 = 서울대 약대에서 과학자의 꿈을 키우는 연변 조선족 출신 연구원이 세계 최고 권위의 암 학회에서 '젊은 과학자상(Scholar-in-Training)'을 받는다. 서울대 약대 종양 미세환경 연구센터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박연옥(32) 연구원이 18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미국암학회...
  • 2015-04-13
  •         “제가 군중예술사업에 몸담아 온지도 어느듯 올해로 52년이 되였습니다. 반세기가 넘은 것이죠. 되돌아보면 그 동안 군중예술사업을 해오면서 얼마간의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두었으니 마음은 기쁨니다.” 그동안 장새납독주 “풍년의 노래”, 목금독주 “딱따구리원...
  • 2015-04-13
  • - 북경동화원의료설비유한책임공사 남룡 리사장을 적는다     아인슈타인은 “천재”, 마더테라사는 “사랑”, 메릴린 먼 로는 “섹시”…그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바로 그들의 이미 지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남룡의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것 이 있다면 바로 “대중...
  • 2015-04-10
  •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단아한 용모에 선한 미소가 인상적인 나무잎사랑조학회 회장 장미란(56살)씨는 가정에서는 착한 효부이자 다정한 안해였고 사회에서는 당당한 사업가이자 헌신적인 봉사일군이였다. 그는 30년을 하루와 같이 시부모님을 마지막까지...
  • 2015-04-09
  •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7] 대천상업무역유한회사 김성남사장 창업 아이템 “하늘이 큰 인물을 만들 때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지방과 골수를 괴롭히고 기아에 허덕이게 하며 온 몸을 못살게 군다”는 맹자의 말과 같이 피타는 노력이 없이는 꿈이 이루어질수 없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
  • 2015-04-09
  • 90세 전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88여단 전사 이민 고층건물에 에워 쌓인 단독주택이었다. 철문을 지나 뜰에 들어서자 금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주택을 두른 회색의 담에는 글귀를 새긴 대리석이 광고판처럼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읽어보니 전부 항일연군과 관련된 시구와 노래, 이야기였다. 동북의 산과...
  • 2015-04-09
‹처음  이전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