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조선족언론계《큰별》-오태호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7월16일 16시06분    조회:950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오태호
오태호선생오태호선생은 1928년 12월 24일, 길림성 연길현(현 룡정시)광개향 후동촌에서 출생했으며 1944년 룡정제2국고를 거쳐 1950년 10월에 연변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연변대학을 졸업한 후 오태호선생은 연변일보사의 기자로 취직하면서 1986년 4월 정년리직하기까지 장장 36년간 연변일보사, 연변인민방송국, 길림신문사 등 중국조선족 주류매체의 기자, 총편집으로 근무하면서 중국조선족언론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일심전력으로 인민대중을 위해 봉사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불길은 연변에도 미쳤다. 조여드는 시국앞에서 연변대학에서는 지방정권에서 간부가 부족하여 대학생을 수요하는데 갈 사람은 나서라고 호소했다. 당시 연변대학 2학년생이였던 오태호는 대학의 호소를 받들고 솔선적으로 탄원해나섰는데 신문사에 배치받으면서 언론인의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되였다.

당시 신문사의 이름은 《동북조선인민보》(연변일보의 전신)였는데 오태호선생은 편집부 농촌부에 배속되였다.

신문사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오태호는 신문기자의 준칙에 대한 기본훈련을 받았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일심전력으로 인민대중을 위해 봉사하는것》이였다. 그후 기나긴 기자생애에서 오태호선생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취재실천에 옮기면서 신문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만들어냈다.

오태호선생은 기자생활초기 취재때문에 많은 시간은 기층에 내려가 뛰여다녔다.

신문사에 들어온지 반년, 결혼한지 두달만에 오태호선생은 북만일대에 가서 그곳의 통신원들과 사귀며 신문원고를 쓰도록 동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불짐을 꿍져멘채 힘들게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간고한 사업이였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1953년 12월 31일, 양력설을 하루 앞두고 오태호선생이 안도형 량병태 취재길에서 문마저 제대로 닫히지 않는 려인숙에 들어 가운데가 불쑥 솟은 구들에 취재가방을 베고누워 자꾸만 미끄러져 구석에 내려오면서 밤새 잠못이루던 취재길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1952년 봄철, 룡정시 개산툰진 선구대대에서 변소에 오지독을 묻고 인분을 모아 비료로 한다는 소문에 실사구시적으로 취재한다고 집집의 변소를 돌아다니며 기웃거려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이상한 사람취급받던 일도 있다.

오태호선생은 자서전 《인생에 부친 편지》에서 당시 그뿐만아니라 많은 기자들이 그처럼 단순하고 순진하고 성실했다고 쓰면서 아무런 고뇌도 없이 오직 보도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비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낮과 밤이 따로없이 뛰여다니던 그 시절의 그 정신, 그 자세는 지금도 아끼고 또 아낄바라고 지적했다.

한평생 《실사구시와 렴결봉공》을 좌우명으로 삼아온 오태호선생

연변일보사 기자로 있으면서 오태호선생은 연변의 400여개 촌의 70%를 돌아다녔고 당시 120여개 공사가운데서 왕청의 십리평을 제외하고는 안 가본 공사가 없다고 하니 얼마나 취재일선에서 밤낮없이 뛰여다녔는지 짐작이 간다.

오태호선생은 1983년과 그 이듬해 선후로 길림성우수신문사업자, 전국우수신문사업자로 평의됐으며 전국신문사업자련합총서로부터 영예증서를 발급받았다.

한평생 《실사구시와 렴결봉공》을 좌우명으로 삼아온 오태호선생은《기자는 왕관을 쓰지 않은 왕》이라고 하면서 《기자는 사회의 가장 높은 직급, 그보다 한층 우에 서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83년 길림성 제6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된 오태호선생은1987년까지 5년간 연변인민의 대표인 동시에 조선족대표, 지식인대표로 나라사무를 관리하고 인민의 대변인으로 되여 인대대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리행했다.

오태호선생과 연변의 명인들

오태호선생은 당년에 중국조선족의 시대적 명인들이였던 황순옥, 김시룡, 최죽송을 제일 먼저 세상에 알린 기자이다.

지난 60년대(63년부터 64년 사이)오태호선생은 연길현 동성용공사 동성5대 달리동에서 밤을 묵어가며 황순옥을 취재하고 《한폭의 붉은 기발》이란 제목으로 반개면에 달하는 장편기사를 썼다. 당시 연변주당위 선전부 리휘부장은 황순옥의 사적기사를 먼저 읽고 너무 감동된다며 친히 사론을 쓰겠다고까지 자청했다고 한다. 하여 사론까지 배합한 황순옥의 사적이 《연변일보》에 실렸다.

이것을 시작으로 황순옥의 사적이 널리 알려지면서 제일 먼저 엽검영원수가 황순옥을 초청하여 북경군구에서 강용(講用)하게 하고 다음은 심양군구, 길림성군구에서도 황순옥을 초청하였다. 황순옥은 이렇게 모택동저작학습열성분자로 전국에 크게 소문났다.

 
60년대 오태호(왼쪽 첫번째)선생이 황순옥(왼쪽 두번째)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

50년대초의 김시룡에 대한 취재는 오태호선생이 초기부터 발이 닳게 뛰여다니며 했다고 한다.

특히 김시룡의 쏘련참관기는 취재한 그날밤으로 써내 이튿날부터 《김시룡 쏘련참관기》가 련재로 발표됐다. 오태호선생은 그후에도 김시룡을 수차 취재했다.

신풍대대 최죽송은 유지온상부터 시작하여 유리온상, 《새발모》로 크게 소문난 연변의 농업명인이다.

1950년대초에 연길시정부 제 1기 농업고 리광현고장이 《평북일보》를 가지고 신문사 농촌조 기자인 오태호를 찾아와서 《평북일보》에 조선의 김성제가 새발모농법으로 고산을 낸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서도 새발모를 하면 안되겠는가고 건의했다. 오태호선생이 최죽송을 찾아갔더니 자기 논밭에서 실험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해에 최죽송은 《새발모》농법으로 헥타르당 1만 6000근의 소출을 냈고 1952년에 전국풍산모범으로 되였다.

그후 오태호는 《최죽송농업사의 생산계획》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인민일보》에 한어로 번역되여 실리면서 최죽송을 전국적으로 크게 유명해지게 한 계기가 됐다.

1979년도부터 불어친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오태호선생이 부총편집을 맡은 《연변일보》도 진실에 립각해 실사구시하면서도 새로운 기상을 보도하기 위하여 여러모로 힘썼다. 잔혹한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신문실천에서 간부와 군중들에게 우려와 뒤근심이 많았다. 오태호는 이런 우려와 뒤근심을 마주하고 신문보도의 길을 개척해나가야 했다.

당시 화룡현 동성공사의 한 농민이 소를 500원에 사서 2000원에 판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과연 자본주의인지 아닌지를 두고 신문에서 지면토론을 진행했는데 찬반여론이 열렬했다. 연변대학농학원의 축산학자 김병진교수가 직접 당지에 내려가 그 소를 축산학적으로 고찰하고 틀림없는 특등소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신문은 자본의주의가 아닌 정당수입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개혁개방초기 오태호는 《개혁만이 출로이다. 개혁하지 않고서는 출로가 없다》고 생각하고 당중앙 11기 3차 전원회의 정확한 로선에 대한 몸가집과 고백을 담은《시대의 주선률》이라는 문장을 신문에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력사시기 새로운 시대적 여론인도 방향을 정확히 제시해주었다.

오태호선생과 《길림신문》의 창간

《길림신문》의 초창기 창간은 오태호선생의 로고와 갈라놓을수 없다.

1984년 8월 7일, 중공길림성위에서는 길림성내 조선족들의 조선문 성보출간의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여 《길림조선문보》의 정식 출간을 비준했다. 이와 함께 당시 《연변일보》 주필이였던 오태호선생은 《길림조선문보》의 인원편제와 경비예산을 포함하여 신문창간에 대한 구체적방안 작성에 대해 지시받았다.

당시 《길림조선문보》창간의 구체적방안에 대해 오태호선생은《연변일보 5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있다.

《…오태호는 인원편제 50명, 경비예산 80만원 (그중 개발비 50만원, 정상경비 30만원)을 제출하였다. 1984년 6월, 성당위 선전부 부부장 서길정, 성당위 선전부 신문출판처 처장 왕문기는 주당위 부서기 김성화, 주당위 선전부장 리정문, 연변일보 주필 오태호와 함께 〈길림조문보〉의 인원편제와 경비예산을 협상하였다. 결국 인원편제를 30명으로, 경비예산을 65만원으로 금이 그어졌다. 인원편제와 경비예산이 적은것은 사실이지만 우선 신문을 내고 보자는게 오태호의 주장이였다…》

1985년 4월 1일, 《길림신문》은 창간되였으나 초창기의 애로점들이 적지 않았다. 우선 경비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해 애먹었는데 그때 마침 성당위서기 고적이 연변에 와서 시찰차 《연변일보》와 《길림신문》을 찾아주었다. 당시의 《길림신문》의 겸임 주필이였던 오태호선생은 사업보고를 할 때 정상경비문제를 특히 보고하면서 수요되는 경비를 성에서 책임진다는 고적서기의 약속까지 얻어냈다.

그러나 성재정청에서 5일이내로 해결하겠다고 대답하고는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답도 없자 주필 오태호는 화가 난 나머지 1985년 8월 10일, 중공길림성위 선전부에 이같은 상황을 보고하고는 《만약 9월 10일전으로 돈을 내려보내지 않으면 신문을 정간하겠다. 그때 가서 우리가 사전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지 말라》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보고를 올리기까지 하면서 결국 어렵게 《길림신문》초창기 경비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길림신문》이 초창기에 사무청사가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어렵게 보낼 때에도 오태호선생은 1985년 2월 14일 신문을 주관하는 성당위 부서기 류경지에게《우리는 사무실이 없어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헐망한 병사를 빌어쓰며 난로를 피우고 사무를 보고있다. 거기에는 전화도 없지만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먼거리를 오가고있다. 자동차 한대 없어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제발로 걸어다니며 일하고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실사구시적으로 《길림신문》초창기의 어려움과 곤난을 반영하여 적극적인 해결을 바란 로심초사의 공적이지 않을수 없다.

초창기 《길림신문》이 《연변일보》로부터 분리되여 나오고 본사를 장춘에 옮기면서 현재 길림성의 유일한 조선문 성급당보로 당당하게 성장하기까지는 《길림신문》의 초대주필이였던 오태호선생의 숨은 공로가 깃들어있는것이다.

오태호선생은 1986년 4월에 정년리직하였으며 퇴직한 후에도 《세계를 가는 기자》, 《중국조선민족언론사》, 《발자취》총서 제7권 《풍랑》 주편, 《마닐라의 풍운》, 《연변일보 50년사》 등 다수의 가치있는 저서들을 편찬,출판해 중국조선족언론의 리정표적 저서들을 남겼고 박식과 풍부한 신문실천 및 성과들로 중국조선족언론계의 《큰별》로 떠올라 사람들의 애대와 존경을 받았다.

오태호선생은 2012년 12월 6일 오후 5시 30분, 연길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참고문헌: 《인생에 부친 편지》 오태호 저, 1997년 료녕민족출판사

《연변일보 50년사》 오태호 저, 연변인민출판사 1998년

《평생언론인 오태호》 연변일보 2012년 5월 11일, 리련화기자

《오태호선생과 자치주 60년 세월속 이야기들》 길림신문 2012년 4월 19일, 오기활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62)] /중국국제방송국 강옥기자 연구에 몰두하고있는 리광남 《리광남은 우리 나라 항공보수분야의 허다한 공백을 메워 하늘을 나는 전투기—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우리 민족의 자랑찬 아들이다》. 연길시건공소학교를 다닐 때 리광남의 사진전시해설을 할 때의 필자의 기억에...
  • 2014-01-16
  • 중국 로봇축구의 창시자, 로봇문화예술의 개척자 홍병용 교수   (흑룡강신문=하얼빈) 채복숙 기자 = 할빈에는 ‘태양도에서’라는 전국에 널리 알려진 노래가 있다.   북국의 명주 할빈은 이 노래에서처럼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름난 스타들도 많이 배출했다. 또한 연예인도 아닌 과학연구일군이...
  • 2014-01-16
  • 원 길림성가무단, 길림성교향악단의 바이올린연주가로 있었던 김숙자(70세)는 퇴직후에도 장춘영화촬영소 교향악단의 초청을 받고 바이올린연주를 하는 한편 장춘시경제개발구조선족로인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하고있다. 1944년 4월 연길시에서 태여난 김숙자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의 문예대 골간으로 활약했다. 초중 2...
  • 2014-01-15
  •     주은래총리의 특수분장배우인 손림후 지난해 12월말, 모택동주석 탄신 120돐을 맞으면서 연변주서법가협회 회원인 손림후는 모택동의 필적으로 창작한 모체서법작품 40여건을 전시하고 해당 부문과 지인들에게 자신이 모체서법으로 창작한 작품들을 증정했다. 모체서법(毛体书法)이라고 부르는 모택동동지의...
  • 2014-01-15
  • (사진설명: 베이징 동화원의료설비유한책임회사 이사장 남룡) 중약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첩약을 달이는 약탕관을 눈앞에 떠올리게 된다. 탕액이 약탕관을 넘어나거나 너무 졸여지지 않도록 시시콜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고 보면 중약 아니 약탕관은 번거로움과 이어지는 대명사이다. 훗날 "약탕관"으로 소문난 남룡...
  • 2014-01-14
  • 칭다오 힐링스파 윤금철 사장   프로필 :   윤금철(50)   칭다오힐링스파(翰林水会) 사장   칭다오만이다국제상무유한회사 사장   칭다오조선족기업가협회 부회장   벌리현 한족고중졸업   러시아노무관리 총경리 경력   한국삼성물산캠프관리 경력   음식점, 호텔경영 경력   (흑룡강신문=하얼빈)이수...
  • 2014-01-14
  •    “태권도 발전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야죠” 국가 태권도품새대표팀 감독 황경승의 25년 외곬 태권인생   국가 태권도품새대표팀 감독 황경승 “현 세계태권도련맹 공인5단, 국제태권도련맹 공인5단, 국가급코치, 국가 태권도품새대표팀 감독,&n...
  • 2014-01-13
  • 사이버공간에서 개인정보는 그 누군가에게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버공간의 논리값(logical value, 逻辑值:여러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조건이 참인지 거짓인지 표현하는 논리 연산에 사용됨.)으로 표지된 실체는 기실 복사가 가능하기에 수시로 위조현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이버공간...
  • 2014-01-11
  • 서예에 대한 집념의 끈 놓지 않는 신현산씨   서예작가 신현산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본명이 신은산인 그는 지금 일목 신현산으로 한국에서 서예활동을 펼치고있는, 수상경력도, 전시경력도 있는 분명한&nb...
  • 2014-01-10
  • 2004년에 이어 재차 1만2천㎞ 장정길 도전   2월 10일 첫 출정, 1년반에 로정 소화할 계획   (흑룡강신문=하얼빈) 김련옥 기자= 조선족 탐험가 리완빈씨(54), 부인 신향자씨(53), 장족 쒀난쟈춰(索南加措,52) 일행 3명이 손을 잡고 1년 반의 예정으로 선렬들의 피땀이 어린 장정길을 다시 함께 밟는다. 장정...
  • 2014-01-0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