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의 노래》, 《사과배 따는 처녀》, 《베짜기 노래》 등 명곡을 불러 이름을 떨친 가수 방초선은 중국조선족이 배출한 성악가로 널리 알려져있다.
방초선은 중국지역에서뿐만아니라 국외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있으며 예술단체, 정치분야 등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해왔던 국가1급 성악가이다.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특별예술가》자격을 부여받은 방초선은 《중국예술가사전》과 《중외녀성명인사전》 등 사전에 략력이 수록될만큼 평론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있다.
기자는 일전 북경에서 안락한 로후생활을 보내고있는 방초선가수와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고향 멀리에서 온 기자를 반갑게 맞는 방초선가수는 세월이 무색할만큼 한때 음악계를 주름잡던 그 미모, 그 목청 그대로였다. 집안 구석구석을 메운 공연사진, 레코드판과 앨범카세트들, 평생을 무대에 바쳐온 한 음악인의 예술흔적들이 곳곳에서 포착되는 순간이였다. 그는 두툼한 사진첩 하나를 꺼내들더니 시간을 거스른 옛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포화속의 꼬마선전원
1932년 조선 김책시에서 출생한 방초선은 여덟살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으로 이주했다. 마을의 꾀꼴새로 불리우던 그는 일본류학을 다녀온 아버지로부터 많은 외국노래를 배우고 불러 늘 마을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947년 봄, 중국인민해방군 길동군분구 장병들이 왕청현 류수하마을에 내려와 촌민들과 함께 군민친목모임을 가진 날이였다. 때마침 피난으로 류수하마을에 내려가 있던 방초선은 련환모임에서 마을의 대표로 외국곡인 《탄식소야곡》과 《런던단조》를 힘차게 불러 박수세례를 받았다. 곱상하게 생긴 처녀애가 하도 노래를 잘 불러 부대 한 관계자가 부대문공단원으로 참군할것을 제의했다.
어린 나이에 흔쾌히 참군제의를 받아들인 방초선은 부모곁을 떠나 부대문공단에서 활약하며 선전대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때 나이가 겨우 열다섯살이였다.
이듬해인 1948년 료심전역 장춘해방전쟁에서 방초선은 가장 년소자로 전방에서 전우들과 함께 적군의 진지를 향해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부르면서 전투사기를 올리고 적군을 와해시켰다. 적군이 백기를 들고 투항할 때마다 방초선은 혁명투쟁에서 문예선전의 작용과 위력을 알게 되였고 선전대원이 된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6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도 방초선은 가끔 소중히 간직해온 《동북해방기념메달》을 매만지면서 눈물겨웠던 포화속 승리의 나날을 되새기군 한단다.
《동북해방기념메달》을 내려다보는 방초선가수
세계가 주목한 유망한 독창가수
1949년에 연변가무단 전신인 연변문공단이 세워지면서 방초선은 연변문공단에 전근되여 독창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에서 화려한 데뷔를 했다.
1950년 중남해에서 열린 국경 1주년 기념 문예야회에서 방초선은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를 비롯한 당과 국가 지도자들을 모시고 영광스러운 《꿈의 무대》를 펼쳤다. 공연에서 방초선은 《베짜기 노래》를 불러 주목받고 기록편을 찍었다.
연변가무단에서 방초선은 독창가수로 활약하는 한편 소분대 공연때면 독창, 중창, 지어 무용과 연극에서까지 활약을 펼치며 연변가무단의 손꼽히는 유망주로 떠올랐다.
1957년, 방초선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련환축제 음악콩클에 참가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10개 나라의 수백명 참가자들이 출전한 음악콩클에서 방초선은 제비뽑기로 공교롭게도 3번을 뽑았다. 처음으로 출전하는 국제대회라 화려한 무대복장이며 장신구들을 잔뜩 준비해갔건만 그것들을 입고 단장하기에는 대기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는수 없이 평상복으로 입고간 벨벳치마저고리차림으로 다급히 무대에 올라야 했다. 허나 그의 기량을 뽐내는데는 차림새가 큰 걸림돌이 아니였다. 삐여난 목청과 춤사위로 방초선은 최정연 작사, 정진옥 작곡 《처녀의 노래》를 흥겹게 불렀다. 결과 그는 수백명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며 모든 참가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이였던 조선 수석무용가 최승희는 방초선이 조선족 참가자라는 말을 듣고 함께 조선에 갈 의향이 없냐는 제안을 해왔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후로 60여년간 수많은 명곡을 불렀던 방초선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대표곡으로 《처녀의 노래》를 꼽았다. 그는 지금까지 《처녀의 노래》를 몇백번이나 불렀는지 모른다면서 이 노래는 그 어데 가서 그 어떤 언어로 불러도 인기가 좋을뿐더러 작품성이 뛰여나고 연기를 곁들인것이 독특한 풍격이라고 했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련환축제 공연사진
잊지 못할 영광과 감동
노래와 평생을 동반한 방초선의 예술생애에는 자랑도 넘쳐난다. 국경 1주년 공연에서 모택동주석을 만난 뒤를 이어 방초선은 1959년에 항주에서 다시 한번 모택동주석을 만나는 영광을 지녔다. 당시 모택동주석이 민족을 묻자 《조선족입니다》라고 대답하는 방초선에게 노래를 더 요청해 들으셨다고 했다.그때 그가 느낀 영광과 감동과 기쁨은 단지 개인의 자부심이 아닌 자랑찬 연변인민으로서의 무한한 긍지였단다.
때문에 방초선은 70년대 김봉호가 작곡한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노래를 특히 즐겨 불렀다고 했다.
1962년에는 주은래총리를 만나는 기회도 왔다. 당시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의 배려로 중앙음악학원에서 공부하고있었는데 마침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북경호텔에서 녀성표연창 《처녀의 노래》를 관람한 주은래총리는 방초선이 노래와 춤에 뛰여나니 동방가무단에 전근하면 더 큰 발전을 할수 있을것이라며 친히 동방가무단의 지도자를 소개해주었다.
당시 연변가무단과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의 예술발전을 위해서 어려운 재정환경에서도 인재양성을 적극 추진했다. 때문에 어렵사리 양성한 예술인재를 놔줄리가 만무했다. 주은래총리도 연변가무단의 상황을 알고나서 연변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남편 왕개평과 함께 옛사진을 들여다보는 방초선가수
성악인 부부의 음악삶
1975년에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중앙방송예술단에 전근되여 독창가수와 성악교원으로 활동분야를 넓혀갔다.
이 기간 방초선은 북경, 연길 등 지역에서 개인독창음악회를 가졌고 저명한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북경, 상해, 남경, 중경, 연길, 카나다, 미국, 일본, 한국 등 국내외를 순회하면서 80여차 2인 독창음악회를 개최했다.
방초선과 왕개평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이면서도 사업에서 서로 돕고 지지하며 고무하는 동반자로 잘 알려졌다. 그들은 늘 함께 음악을 연구하고 쯤만 나면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군 한다. 둘은 또 음악의견차이로 서로 얼굴을 붉히다가도 다시 의논하고 화해하는 성악인 부부로서의 삶이 그저 행복하기만 하단다. 팔순고령을 넘긴 나이에도 컴퓨터와 건반을 이어서 하는 미디음악작업에 한창인 그들은 컴퓨터앞에서는 나이를 잊고 산지 오래됐다고 했다.
주변사람들은 늘 방초선을 보고 선천적으로 좋은 목청을 타고났다고 한다. 허나 그는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며 목소리 가꾸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방초선은 늘 자신의 성대특점에 맞는 발성연습을 부지런히 개발했고 노래와 표연을 익혀왔다. 또 관중의 심리특점을 연구하고 관중들의 환영을 받는 표연과 창법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실천에 옮겼다. 지금까지도 방초선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발성연습을 하는 등 하루중 반나절은 노래와 함께 보낸다.
남편 왕개평과 음악작업에 한창
식을줄 모르는 음악열정과 고향사랑
방초선은 은퇴후에도 소수민족 성악발전을 위해 좀 더 많은 일을 하고싶었다. 방초선은 제8기, 제9기 전국정협위원으로 활약하는 기간 문화부 소수민족문화예술기금회 설립에 힘을 실었다. 그동안 방초선은 외국에서 자금을 유치해 소수민족공연, 패션쇼 등 활동을 조직했다.
한편 중국소수민족문화예술기금회 부회장, 중국소수민족성악학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소수민족성악발전을 위한 연구회와 좌담회를 조직하고 벨칸토창법의 성악가들이 어떻게 자기 민족의 창법과 결부시켜 노래를 부르고 대중들의 환영을 받는 성악가로 될것인가 하는 등 문제를 많이 토의했다.
방초선가수의 최근 모습
방초선이 연변을 떠난지도 어언 40년이 다 되여간다. 강산이 네번이나 변하는 동안 연변에 대한 그리움은 마냥 한결같았다며 고향 연변이 그리울 때마다 자작곡을 만들어 그리움을 달래군 했다고 말한다.
《저는 언제까지나 자랑스러운 연변의 조선족입니다. 연변인민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희가 있을수 없지요》라고 말하는 방초선은 《데뷔 초창기때부터 많은 사랑을 보내준 연변인민들의 그 박수소리가 너무 그립다》면서 애틋한 고향마을과 고향사람들을 마주하고 다시 한번 고향무대에 서고싶다는 마음도 내비쳤다.
그는 음악을 빼고는 자신의 인생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론할만한게 없다고 단언했다. 무대우에서 빛났던 그의 60년 예술생애를 돌이켜보면 실로 수많은 이름 모를 멜로디들이 그의 고운 목청을 타고 《명곡》으로 탄생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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