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시인 강효삼- 문학은 인간학이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9월9일 09시56분    조회:1041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강효삼
 —"우리 민족 밑바닥의 삶의 현장을 절대 떠나지 않을것이다"

   시골 농군의 후줄근한 옷차림에 작달막하고 여윈 체구, 학교때 별명이 '오태(误胎)'였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로인이 있다. 그가 가는 곳이면 그만의 특유한 해학으로 웃음소리가 넘치게 하고 걸쭉한 육담이 오간다. 그에 또 술 한잔까지 곁들이게 되면 곁에 모인 사람들 모두를 똑 같은 촌로로 만드는 신기한 '마술'이 있는 사람. 인기는 어찌나 좋은지 이름만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런 사람이 시인이라고 한다.

  짜장 별 볼멋 없는 촌로인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아니한 신기한 매력이 있는 사람, 그것도 북방 문단의 사실주의 시의 코치인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강효삼시인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시 구상을 익히고 있는 강효삼시인

1943년 출생, 1963년 2월 15일 흑룡강신문 '진달래문학세계'에 '봄이 나간 날' 이라는 시로 등단.

  동시, 시, 노래말가사, 수필, 등 쟝르의 작품 500여편 발표. 7인 시집 '칠색무지개', 시집 '먼 후날. 저 하늘 너머'와 아동시집 '봄비'가 있음. 윤동주문학상, 한국 문예시대 해외동포문학상 등 수상 연변작가협회회원, 흑룡강작가협회회원, 현 흑룡강성 상지시 자유기고인.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은 절망과 희망, 불행과 행운이 겹쳐진것이였습니다. 지금도 로임은 적고 사회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역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올해까지 문학인으로서의 50년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는 강효삼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문학인생을 설명하는 말이다.

  "문학은 내 인생의 강심제였다"

  강효삼시인이 문학의 푸른 꿈을 꾸게 된것은 소학교 4학년때를 들어야 할것 같다. 당시 상지시신화서점에서 '조기천시집' 등을 학교에 가지고 와 팔았는데 어린 그는 '시집이란 시집가는 책인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후의 학교 랑송대회에서 강효삼은 조기천의 '조선은 싸운다'를 랑송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당시는 조선전쟁이 진행될 때여서 그때의 분위기와도 알맞았던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여 그는 문학의 푸른 꿈을 꾸게 되였다.

  소학교 5학년때 '봄바람'이라는 제목의 동시를 써서 교원의 칭찬을 받았고 교과서에 있는 '어린 시인' 이라는 글을 배우면서 문학을 지향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중학교에 입학해보니, 당시의 상지조중은 문학 분위기가 농후하여 문학 지망생이 많았다. 하지만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린 그는 그들속에 끼이기조차 어려웠다. 그래도 당시 조선어문을 가르친 선생님이 많이 고무하여줘(박룡국선생님) 큰 힘이 되였다. 당시 그는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민간이야기도 정리하면서 점차 문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후 대약진운동에 회의를 가지고 불만을 표시했던 그는 학교에서 처분을 받고 중퇴하여 생산대에 내려가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당시 연수현 평안 성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다시 문학의 꿈이 살아나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 학교때부터 함께 문학을 꿈꾸던 김상봉씨(상지시 월성향 사람, 향토시인)를 만났다. 문학을 사랑하나 발표원지를 찾을수 없었던 그들은 문학동아리를 만들기로 하고 '송화강 문학청년 애호자 단체'를 만들었다. 강효삼이 부회장이 되여 문학 애호자들끼리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당시는 나라적으로 계급투쟁을 할 때여서 공안국의 비밀감시까지 받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래도 동아리의 규약 첫 머리에 '모택동문예사상의 위대한 붉은기를 내걸고'라고 써넣었기에 반혁명조직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으나 그후 이 동아리는 절로 해산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 흑룡강신문에 강효삼의 첫 작품이 발표되여 액막이로 되였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였으며 그후 련거퍼 발표한 '공사의 처녀'라는 시는 당시 흑룡강신문사 문학편집이 한어로 번역하여 '흑룡강일보'에 발표하면서 의심이 해소되고 공청단 가입까지 비준받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전까지 강효삼은 꽤나 많은 글들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재미를 붙히게 되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반당문예로선의 검은선'이라는 대자보가 나붙어 어렵게 고비를 넘겼고 그후 또 "문화대혁명은 문화에 대한 파괴"라고 불만을 토로한것으로 하여 하루 아침에 현행 반혁명으로 몰리게 되였다. 격리당해 투쟁을 받았고 교사대오에서 쫓겨났으며 리혼까지 당했다.

  그는 문학을 했기에 세상을 보는 눈이 있게 되였고 그때문에 교원대오에서 쫓겨 났지만, 또 문학을 했기에 다시 교원대오에 설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으며 후에는 상지시 하동향문화소에 전근하게 되였다고 말한다. 즉 좋아도 문학이요, 나빠도 문학인것이였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가파로운 경사를 거듭하는 인생 그라프를 그려오던 나날, 그는 문학을 한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것이 강심제로 되여 어려운 나날을 버틸수 있게 했고 끝내는 볕을 볼수 있게 했다.

  "지금까지 문학을 하면서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였다면 중도에서 문학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강효삼시인은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고 말한다.

  강효삼시인은 1978년에 연변작가협회에, 1980년에 흑룡강작가협회에 가입했고 흑룡강신문의 국경15주년 맞이 응모에서 '시 노래불러라, 영이야' 가 3등상을 탔으며 또 그 작품이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3등상을 타게 되였다. 그리고 그가 쓴 가사 '톱질타령'은 흑룡강성의 우수가곡 평선에서 2등상을 타기도 했다.

  하동향문화소에서 13년간 근무하던 시절 그는 인생의 황금시기를 맞이해 많은 글들을 썼으며 작가들을 양성하느라 하동향진달래문학살롱(상지진달래문학회 전신)을 만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강효삼이 끝내는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만약 성과로 성공을 론하는게 아니고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했다는 점으로 성공을 론할 때 나도 가히 성공한 사람입니다."

  문학을 할수 있어 자신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강효삼시인이다.


젊은 시절 문우들과 함께 있는 강효삼시인(왼쪽 두번째)

"문학은 인간학이다"

  강효삼시인은 몇십년동안 문학을 하면서 문학이 바로 인간학이라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한다.

  "한때는 정치의 구미에 맞추느라 애썼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했지만, 문학이란 인간의 진실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강효삼시인은 문학이란 고통받는 사람들,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야 한다고 말한다.

  꼭 사회의 암흑면을 꼬집어야 한다는건 아니지만 문학은 성실해야 하고, 문학은 참되여야 하며, 문학인이라면 글에서만 인간이 되여야 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되여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인생의 추구이자 문학적 추구라고 하는 그는 글을 쓸수 있는 날까지 우리 민족의 밑바닥 삶의 현장을 절대 떠나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그의 시들을 보면 그의 문학적 추구와 인생적 추구가 들여다 보인다.

  강효삼의 시적 추구는 민족 공동체와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이 날로 상실되는 현실에서 회복의지와 발전 전망을 리얼하게 표현하는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예술성 추구를 홀시하는것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작품은 역시 예술적으로 진미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현재 고래희의 언덕에 올라선 로인이지만 아직도 배움을 추구한다. 그것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게 되고 시를 쓸수록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가를 알게 되기때문라고 말한다. 스스로 생활에 대한 철학적 깊이가 모자라고 시적 상상력과 시를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기능, 특히 현대적기교가 부족하여 이를 고치지 않으면 그냥 그자리에서 답보할수 있다고 하면서 시를 오래 써왔다는 자격 하나로 시단에 남아있기보다 부단히 모색하고 변신하여 자신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이 되여보려는 노력으로 소위 '원로'라는 그 이름을 보존하고싶다고 말한다.

  "금년 들어서는 동서 고금의 책들중 내가 찾아볼수 있는 책은 다 찾아봅니다. 특히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기에 시집을 탐독하는데는 좋은 시라고 인정할 때는 그가 누구든, 지어 이름없는 초학자가 처음 쓴 글이라해도 내 '시공부' 수첩에 적어두고 몇번씩 읽고 또 읽는데 지금까지 여러 풍격의 시들을 적어두고 읽은 시공부책이 두텁게 네권이나 됩니다. 어찌하든 시공부에 전념해서 후세에 남길 명작은 쓰지 못한다 해도 독자들이 한번 읽어보고 두번 다시 읽고싶다는 그런 시를 단 한수라도 만년에 남겨보는것이 요즈음 들어 내가 절실하게 가지는 시창작의 소망입니다. 그것이 이제 남은 내 삶의 과정이자 추구입니다. 또한 배우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즐거움이며 그것이 산다는것입니다."

  이제 와서 문학이 무엇인가 고쳐 생각해봤다는 그는 문학은 일시적인 취미나 애호가 아니라 심각한 정신적 사업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바른 사랑, 명지한 철학, 깨끗한 량심, 허식 없는 열정, 끝없는 열정, 그리고 욕망과 진취심이 수요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쉽게 세상을 허무하게 볼수도 있겠지만 욕망은 필요한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이다. 특히 비록 이런 저런 비리와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세상이지만 역시 자연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자연속에 살고있는 인생은 아름답기에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마음으로 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싶다고 하는 강효삼시인, 그는 "아름다운 마음가짐이 없이는 시도 없다. 그리고 생활에 대한 포부와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시는 한걸음도 나아갈수가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단순해지고 열정스러워지고싶다. 그래야 끝까지 문학의 줄을 놓지 않을수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물질 욕망이 팽배해지는 세월이지만 가난한 문학을 선택한것을 후회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내가 문학을 한것을 긍지와 자호로 간주하며 인생의 끝까지 드팀없이 갈것이다.

  한때 질병으로 인생을 마칠번도 하여 현재는 그 무엇보다 건강을 중요시하고 삶을 아끼며 사랑하는 강효삼시인이다. 문학적 탐구와 인간적 탐구를 동시에 진행하며 사는 날까지 열정과 욕망을 가지고 문학을 분신으로, 세상을 뻗치는 받침대로, 죽는날까지 문학은 버릴수 없다고 말하는 강효삼, 그야말로 진정 '시인'이라는 두 글자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흑룡강신문 채복숙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ㅡ료녕SK실업부동산개발유한회사 리사장 홍종국씨 “그룹에서 조선족인 저를 이렇게 인정해주고 밀어줄줄 몰랐습니다. 그 기대에 보답하고저 열심히 일하고있습니다.” 패기와 자신감에 벅차있는 홍종국씨(1963년생), 현재 그는 료녕 SK실업부동산유한회사 리사장, 단동SK물류유한회사 총경리를 맡고 단동지역의...
  • 2013-11-19
  • 문주호씨 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진 록강사회구역에 거주하고있는 문주호(45세)씨의 나무뿌리조각이 국내외에서 각광을 받고있다. 나무뿌리조각공예에 남다른 애착심을 갖고있었던 문주호씨는 20년전인 1992년부터 안해 안춘옥(45세)씨와 함께 부지런히 산과 골짜기를 넘나들며 모양이 각이한 여러가지 마른 나무뿌리를 주어...
  • 2013-11-19
  •  연길윈워터전기유한회사 총경리 박무일씨 창업스토리    연길윈워터전기유한회사 총경리 박무일씨는 20년 동안 순간온수기개발에 몰두하여 창업의 희열을 맛보고있는 창업인이다. 1982년 동북공학원(지금 동북대학) 주물전업을 졸업한 박무일씨는 주물에 남다른 흥취가 있었고 매사마다 끈기있게 달라붙었...
  • 2013-11-19
  • ‘예술구국(藝術救國)’. 이 짧은 문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조성환 선생이 독립운동 동지였던 한흥교의 아들인 항일음악가 한형석에게 ‘예술을 통해 나라를 구하라’며 내려준 훈구다. 먼구름 한형석은 한일강제병합이 강행됐던 1910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불운한 해에 태어난 ...
  • 2013-11-18
  •       전통산업의 재발굴과 문화식품 시대를 선도하다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 리동춘 사장 “21세기는 문화식품시대이다”라고 고취하는 사람이 연변민들레생태산업연구유한회사의 리동춘 사장이다. 그는 우리민족의 전통식품인 된장과 전통술의 재발견을 통해 ‘오덕 장로주&rsqu...
  • 2013-11-15
  • [화제집중] 장경률 연변일보 론설위원(전 편집국장)과 펼친 담론 장경률 선생은 지난 11월 3일 동포세계신문사를 방문해 본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장면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의 존재와 역할을 두고 인터넷상에서 쟁론이 벌여졌다. 이 쟁론에 화두를 던진 장경률 길림성 조선문신문잡지 심열위원 연변일보 론설위원(전...
  • 2013-11-13
  • “나시족은 운룡설산을 자신들의 정신적지주로 생각한답니다. 하늘이 손에 잡힐듯 하지만 하늘대신 산을 품은 나시족의 정신은 만년설만큼 고결해 보였습니다” 길림성 지질국 연변지질 제6조사원에서 니화석 지질학자로 근무했던 김한산(73살)선생이 건네는 첫마디였다. 그는 째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2013-11-13
  • 동항시정기수산물양식기지 오기범총경리의 창업담   관전정기수산물양식장, 동항시정기수산물양식기지 오기범(1966년 생)총경리가 동항시바다가에서 민물고기 양식과 수출로 흥부박을 캐고있다. 연길태생인 그는 지난 1983년에 연변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하고 연길시방직공장에 배치받아 10년간 사업을 해오다가 1993년...
  • 2013-11-12
  •  조선족 미술계 원로 김영호 옹    11월 5일 오후 2시, 기자가 중국 조선족 미술계의 원로이자 거목인 김영호화백(83세)의 저택을 찾았을 때 선생은 한창 래년에 연변대학 미술학원 미술전시홀에서 마련될 수채화 중심의 개인전시회(약 40여폭)에 출품할 작품을 창작중이였다. “오전에는 약 3시간 동...
  • 2013-11-08
  •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새회장에 뽑힌 이건기 싱가포르 한나프레스 사장. "갈라진 한인 언론인 단체 통합에 앞장서겠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현재 전 세계 한인 언론인들의 단체가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세계한언)와 재외동포언론인연합회(재언협)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 2013-11-0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