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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1월22일 11시03분    조회:7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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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순철

광동촌 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 김순철씨 감동 스토리

  김순철씨(왼쪽)
1.56메터의 작은 키꼴에 50킬로그람도 안되는 왜소한 체구,전국로력모범이고 성특등로력모범이며 동성진 광동촌 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인 김순철(55세)은 겉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가 엮어가는 전기적 인생이야기를 듣고는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사회의 부담으로 되지 않으련다!”

김순철은 1959년에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두다리가 불편한 그에게 있어서 동년은 쓸쓸하고 고달픈 고행길이였다.

“저 불쌍한것이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살아가겠누? ”

깊은 밤에 부모님들의 한숨섞인 속삭임을 우연히 엿들은 김순철은 “기어이 내 손으로 살아갈것이다. 절대 사회의 부담이 되지 않으련다!”고 마음을 다지고 다졌다.

김순철은 초중시절부터 학습에 열중하는 한편,여러가지 재간을 키웠다.그 당시 마을에는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있었는데  미술전문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동성진에서는 이름이 있었다.

“선생님으로 모시겠으니 미술을 가르쳐주십시오.”

순철이를 어루쓸어보던 그분은 측은한 어조로 “음.그러거라.배워두면 밥벌이를 하는데 도움이 될거다”라고 하였다.

미술을 배운 김순철은 고중시절부터 찬장유리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솜씨가 좋아 린근에서 소문났다. 1977년에 고중을 졸업한 김순철은 그림을 그리는 재간으로 밥벌이를 하였는데 흑룡강성의 조선족마을에 가서도 찬장과 밥소래에 그림을 그려주면서 돈을 벌었다.

촌의 배려로 김순철은 1978년부터 촌위생소의 약제사로 되였었다.실무를 연찬하고 봉사태도가 좋아 7년 동안 촌민들의 찬양을 받았다. 그리고 1985년에 리상과 뜻이 맞는 한 장애인녀성을 사귀여 가정도 이루었다. 결혼후 김순철은 여러 사람들의 권고도 마다하고 약제사를 사임하였다.

“저는 의학전문공부를 못하였기에 수준급의사로 되기 어려워요.아마 공예미술이 저의 특장인것 같아요”

약제사를 그만둔 김순철은 즉시 화룡시가지로 올라와 30평방메터의 헐망한 집을 세맡고  미술영업을 시작하였다.시장조사에서 경대가 잘 팔린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경대제작일을 추진하였다.그가 만든 경대는 모양이 새롭고 우아하며 탄탄하여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하여 3년 사이에 김순철은 4만원 수입을 올리게 되였다. 그 당시 4만원은 적은 돈이 아니였다.

생산복리원을 창립

김순철은 시가지에 진출하여 목돈을 벌었지만 마음만은 개운치 못하였다.명절 혹은 관혼상제차로 고향에 갔을 때의 충격이 너무 컸던것이다.

가정별생산량도급제를 실시한후 대다수 농민들은 부유하여졌으나 신체장애인, 지력장애인, 극빈호들의 생활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이 불쌍한 군체들은  생활난으로 의식주마저 보장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였다.

“나 혼자만 잘 살려고 이 세상에 태여난것이 아니지 않는가? 고향에 돌아가 불쌍한 사람들을 돕자!”고 작심한 김순철은 1988년에 고향에 돌아와 30세대의 신체장애인, 지력장애인, 극빈호들로 생산복리원을 세웠다.

정작 복리원사업을 시작하고보니 어려움이 생각보다 많았다. 발등에 떨어진 불은 도급지를 잘 다루는것이였다.그는 밭갈이, 모내기, 가을과 곡식실어들이기 등은 생산복리원에서 삯군을 쓰고 지력장애인들에게는 따로 사람을 시켜 대신 로동배치. 채무결산을 해주게 하였으며 극빈호들에게는 생산비용.농기구. 로력 면에서 돌봐주었다.

“김순철이 저러다 빚구럭에 빠지지 않나 두고봐!”

동네에서는 시야비야 말이 많았고 집식구들도 걱정이 태산같았다. 3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놀랐다.지력장애인가정에서도 년평균 1만원 이상씩 분배돈을 탔으니 기타 지체장애인, 극빈호들의 사정은 더 나을게 아닌가,생산복리원에서는 남들이 양도한 경작지도 25헥타르나 더 다루었다.

“책임포전만을 다루어서는 부유해질수 없습니다.농공상 일체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작심한 김순철은 단기 항목으로 1989년에 식료품공장을 세웠다.시장조사를 거쳐 관혼상제에 쓰이는 상차림식료품의 판로가 좋다고 인정한 김순철은 식품업종의 기술자를 초청하여 생산에 착수하였다.

식료품공장의 제품은 시장에 나가자 대뜸 환영을  받았다.이듬해에는 년판매액이 200만원을 넘기였다.이 공장에서는 밭일을 하기 어려운 지체장애인 13명을 채용하여 그들의 일자리를 해결하였다.

김순철은 사과배과수원개발을 중장기 항목으로 정하고 24헥타르의 민둥산을 도맡은후 1990년부터 개발에 착수하였다.연변과수연구원의 기술원을 모셔와 기술지도를 받으면서 3년간의 품을 들여 선후하여 식료품공장에서 나온 리윤 27만원을 투입하였다.

과일이 열리기 시작하자 과수원을 과수재배농들에게 나누어주어 관리하게 하였으며 수입을 과수재배농들의 소유로 하고 상납금조차 받지 않았다.

다년간 이 생산복리원의 인당 수입은 시적으로 줄곧 앞자리를 차지하였다.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같은 사업에 혼신을 다해온 김순철은 전국로력모범으로 당선되고 전국장애인대표대회에 참가하는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김순철은 단순히 생산복리원만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였다.그는 사회 지명도가 높은 우세를 리용하여 지방과 촌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다.진에서 해란강다리를 건설할 때에도,촌에서 수도를 놓을 때에도, 골물을 다스리는 제방을 수축할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연변 10대 매력촌”으로 선정

2004년 촌급기바꿈선거가 진행되였다.광동촌의 대다수 공산당원들과 촌민들은 김순철더러 이왕에도 촌을 위하여 일을 많이 하였지만 이번에는 아예 촌당지부 서기와 촌민위원회 주임을 겸직하고 촌을 이끌어줄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하여 김순철은 2004년부터 광동촌의 당지부 서기와 촌민위원회 주임을 겸직하여 담임하게 되였다.생산복리원의 외팔부기원 리학송이 촌의 부기원을 담임하고 생산복리원의 출납원이였던 김영숙이 촌의 출납원과 촌당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게 되였다. 하여 “병신들이 촌의 대권을 틀어쥐였다”는 말까지 돌아 일대 기문으로 되였었다.

그때로부터 10년 세월이 흘러 지났다. 그사이 광동촌의 제반 면모에는 사람들을 탄복하게 하는 많은 변화들이 발생하였다. 하여 지난해 12월에 있은 “주 10대 매력촌”선발평의에서 광동촌은 영광스럽게 제1인자의 보좌에 올라섰다.

김순철은 촌민 수입증대를 첫째가는 대사로 삼았는데 새로운 농업과학기술과 관리모식을 도입하여 촌의 160헥타르 논과 190헥타르의 밭을 잘 다루었다.전면적으로 오리농법과 유기벼생산을 추진시킴으로써 촌을 유기벼생산에서의 하나의 기치로 부상시키였다.그리고 촌에 록색유기벼생산유한회사를 세움으로써 촌민들에게 생산전, 생산중, 생산후의 봉사를 잘하였다. 회사에서 촌민들의 생산물자공급, 생산중에서의 기술과 관리봉사, 생산후의 수매를 책임지기에 촌민들은 공급, 봉사, 판매에서 모두 보장이 있다.이 회사는 자체의 량식가공공장을 가지고있는데 일률로 촌민들을 로동자로 채용하고있다.30여명의 촌민은 탈곡이 끝나서부터 약 3~4개월간을 량식가공공장에서 일하고있는데 월수입이 3000원을 초과하고있다.

촌에서는 투자유치의 방법으로 촌에 륙속 록색식품유한회사, 알곡건조회사, 규모화양돈장 등 7개의 기업을 일떠세웠는데 촌민 수입증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일으키고있다.이 회사들은 잉여로력의 배치와 로약병자취업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일으키고있으며 년간발전마리수가 각각 2000마리를 넘기는 2개의 양돈장에서는 해마다 무료로 촌의 늪가스생산과 토양개량에 1500여립방메터의 돼지똥을 공급하고있다.

이 촌에서는 8년전에 시적으로 제일 먼저 기계화를 실현하였다.김순철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250만원의 자금을 쟁취하여 촌에 농기계봉사대를 조직함으로써 촌민들에게 전방위적으로 농기계봉사를 제공하고 있다.김순철은 기계화보급의 요구에 적응하여 규격화포전건설에도 큰 힘을 기울이고있는데 이미 70헥타르의 다락논을 규격화포전으로 개조하였다.

촌에 장애자, 로약병자의 비률이 갈수록 늘어나는 실정에서 김순철은 이들을 이끌기 위하여 2008년에 원유의 생산복리원의 토대에서 빈곤부축농장을 건립하였는데 올해에 이르러 농장원은 68세대에 112명의 인구가 있으며 115헥타르의 경작지를 다루고있다.로동능력을 상실한 장애자들이거나 로약병자들도 도급지 등 생산자료들을 우대가격으로 입고시켰기에 높은 고정수입을 보장하고있다. 논을 입고시키면 해마다 6000원, 밭을 입고시키면 해마다 3000원의 높은 수입이 보장된다.몸이 허약한 로력들은 봄이면 육묘관리, 여름이면 논물관리를 하는데 육묘관리는 하루에 70~80원, 논물관리는 1개월에 2500원의 수입을 올리고있다. 행동거지가 불편한 농장원들은 촌에 입주한 연변영립식품유한회사 등 기업에 들어가 앉아서 하는 알맞는 작업에 종사하고있다.

하여 농장원들은 보편적으로 높은 수입을 올리고있다.고병일(67세)은 안해가 장기환자이기에 생활이 매우 어려운데 농장에서는 올해에 그를 밤에는 농장의 당직을 서게 하고 낮에는 기계보양 등 알맞는 작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는데 2만원의 수입을 올리였다.안현식(68세)도 곤난호인데 0.65헥타르의 논을 입고하고 논물관리 등 작업에 종사하였기에 역시 2만여원의 수입이 있게 되였다.지력장애인 김철호(24세)에게도 농기계심부름 등 알맞는 작업을 배치하였기에 올해에 1만원의 수입을 올리였다.

김순철은 촌민들의 거주환경을 개조하기 위하여 올해까지 2500여만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210세대의 농가를 전부 조선족전통가옥으로 건설하였다.그리고 300여만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6000메터의 포장도로를 건설하고 길 량켠에 가로수 1000그루, 꽃나무 5000그루를 심었으며 크고 작은 화단 60여개를 건설하였다.담장문화건설에도 큰 힘을 기울이였는데 모든 농가에 담장을 두르고 각종 색갈과 도형으로 아름답게 장식하였다.태양에네지로써 모든 농가의 담장에 360여개의 채색등을 가설하였으며 마을의 주요한 골목에 20여개의 가로등을 가설하였다.정화사업에도 깊은 중시를 돌리고있는데 촌에 전 성에서 제일 처음으로 촌급오수처리공장을 건설하였으며 모든 농가에 실내위생실을 보급하였다.

이 촌이 조선족풍취가 짙고 살맛나는 고장으로 건설되자 관광객들이 륙속 찾아들고있다.연변문화국제려행사, 연변국태려행사 등 7개 려행사에서 이 촌에 판사처를 두고있으며 30여개의 려행사에서 이 촌을 관광코스로 잡고있다.올해 이 촌을 찾은 관광객은 15만명을 웃돌았다.관광객들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하여 이 촌에서는 올해까지 50여개의 민박을 건설하였다.

촌이 이토록 발전하자 조선족마을의 인구가 해마다 줄어드는 실정에서 이 촌에서는 도리여 최근년간에 인구가 급증하고있다.지난해에 인구가 100명 증가된 뒤를 이어 올해에 또 인구가 40명 증가되였다.2003년에 이 촌의 실제거주 인구는 220명이였으나 올해에는 410명으로 늘어났다.해외에 나갔거나 도시에 진출하였던 사람들이 륙속 돌아오고있는데 다시 농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여럿이다.김수원농민(43세)은 해외에서 돌아온후 8헥타르의 논을 다루고있는데 올해의 순수입을 13만원으로 전망하고있다.

“제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수 없다니깐.”

김순철을 감탄하여 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연변일보 조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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