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중국 조선족 백년백인》취재로 기자일행은 장춘시에서 사업하고있는 리영근배우의 맏딸 리춘실을 만나 예술가로서의 리영근배우의 60년 발자취, 휘황과 영예 그뒤에 숨겨졌던 곡절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락관적이고 따뜻했던 배우의 이야기들을 들을수 있게 되였다.
연극인생의 시작
1931년 1월 19일, 룡정에서 태여난 리영근은 훈춘에서 소학시절과 중학시절을 보냈다. 중학시절때 그는 벌써 자체로 극본을 써서 연출을 보고 직접 출연까지 하였는데 교내에서 소문이 자자하여 사회공연에까지 나서게 된다. 그때 그 학교 성이 배씨인 선생님이 쉐익스피어극을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학생들은 주위의 농촌을 다니며 이를 공연하였다. 극중 맡은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내는 리영근을 보고 사람들은 어린것이 연극을 신통히도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선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싶었지만 가난으로 집에서 책과 동무하며 나날을 보냈다. 1946년 11월 어느날, 훈춘현보안단문공대에서 김홍철이라는 분이 찾아와 연극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한다. 밥을 먹여준다는 말에 배만 곯지 않아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따라나선것이 그의 연극인생의 시작이 되였다.
곡절많은 인생
1982년 연극《첫봄》에서 생산대 주임 겸 원 생산대 대장 역을 맡은 리영근
전직연극인으로서 첫 출연작품은《혈채》였고 맡은 역할은 돼지몰이역이였다. 그는 배우 겸 창작조 조장을 맡고 열심히 연극에 몰입하였다. 그후 리영근은 훈춘현문예공작대에 들어가 연극배우로 활동, 1951년 그들의 공연은 연길에까지 와서 공연되였는데 당시 연변문공단 연극조 책임자와 배우들도 그들의 공연을 관람한것이 인연이 되여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연변문공단 배우로 극본(삼로인)도 쓰면서 종자배우로 인기배우로 인민의 애대를 받는 배우로 성장의 길에서 분투해왔다. 당시 연극과 《삼로인》 극이 어찌나 환영을 받았는지 1년에 하향공연이 200여일도 더 되였다고 한다.
1956년 1월, 연변조선족연극단이 설립되면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연극《춘향전》에서 호방, 방자의 역을 맡은 리영근은 그해 제1차전국연극콩클에서 허동활, 정인덕선생과 나란히 3등상을 수상하였다.(《춘향전》은 집체공연 1등상 수상)
하지만 그 희열도 잠간,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리영근도 여느 문예일군들과 마찬가지로 농촌에 쫓겨가 농사일도 하고 삼복철 불가마에서 구운 벽돌을 나르다나니 가슴과 배 가죽은 데서 아리다 못해 죽을 지경이였다고 한다.《그때 죽지 않은것이 다행이였다.》고 말씀한적도 있다.
고진감래
중앙희곡학원 조선족반 학생들에게 대사과를 배워주는 리영근
개혁개방후 마음껏 재간을 뽐낼수 있게 된 리영근선생은 삼로인 《새로운 장정》 등 작품을 창작, 연출, 공연함과 동시에 연극 《해란강반에 봄이 왔네》등에 출연하면서 연극인의 자랑을 체험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30돐헌례작품인 이 연극은 후에 《첫봄》으로 탈바꿈되여 1982-1983년까지 연변 각지를 순회하면서 100여차 공연되였고 문화부의 초청으로 북경의 무대에서도 선을 보였다. 이 작품은 또 장춘영화촬영소에 의해 영화로 개편되여 전국에 상영되면서 호평을 받았다.
이 시기 선생은 또 《조선어대사교재》 6책 도합 70여만자을 집필하여 중앙희곡학원 조선족반 학생에게 강의용교재를 제공하였고 1984년부터 1988까지 직접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1989년에 소품 《사위감점고》를 창작하고 한성후선생과 함께 연출을 본 그는 작품에서 복금의 삼촌 역을 맡고 희극적인 연기를 펼쳐 대중들에게 폭소탄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조선족대중들의 환영을 받아《요청 한마당》프로에 등장하군 한다.
환갑년에 연기인생 전성기 누려
희극《털없는 개》중 주인공 성구 역을 맡은 리영근
하지만 리영근배우가 진정으로 연기인생의 전성기를 누린 시기는 그래도 환갑년인 1991년부터 꼽아야 할것이다.
1991년, 중국연극연구회의 첫 금사자컵평의에서 《연기 금사자컵》을 수상한 리영근선생은 리직휴양한후 연변연극단의 예술고문으로 재초빙받고 연기생애의 두번째 청춘을 맞이한다. 이 시기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짝지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사업을 펼쳐나갔는데 희극《털없는 개》에서는 주인공 성구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국내외에 소문을 놓았다.
리종훈, 김웅걸 작, 최인호 연출로 된 《털없는 개》는 1992년 5월 제2차전국연극예술콩클에 참가하여 문화부로부터 《신극목상》과 《문화연기상》을 수상하였고 그해 할빈에서 열린 동북3성연극콩클에서 극목공연《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리영근선생은 《연기 1등상》을 수상하였다.
이 극은 1995년까지 동북삼성 각지에서 도합 446차 공연(위문공연은 포함하지 않았음)되였고 총수입 100만원을 돌파하였으며 한국《매일신문사》초청으로 한국에서 6차의 공연을 펼쳐 연변연극단력사이래 첫 출국공연작품으로 기록되였다. 따라서 《성구》의 형상으로 가는 곳마다에서 인기를 누린 리영근선생 또한 1993년에 길림성연극예술콩클에서 연기 1등상을 수상한외 1992년 10월 1일부터 국무원특수수당금을 향수하게 되였으며 1993년에는 길림성정부로부터 대공을 1차 기입받았다.
관중들이 가장 즐기는 배우 그리고 묵직한 영예
소품 《보고전의 보고》
1990년대 중반에 들어와 리영근선생은 작품 창작과 함께 배우로 무대에 오르면서 인기정상을 창조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선생이 직접 창작, 공연한 소품 《보고전의 보고》와 《렬사증문제》라고 할수 있다.
공금으로 질탕 먹고마시는 현상을 신랄하게 폭로풍자한 소품 《보고전의 보고》와 술중독증에 시달리는 퇴직휴양간부의 형상을 빙자한 소품 《렬사증문제》는 현실생활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반복적인 사색에 립각하여 창작한 작품으로서 관객들은 단순한 작품감상만이 아닌 심오한 사상내용을 터득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1996년 음력설야회에서는 《렬사증문제》가 최고인기를 누리고 1997년 음력설야회에서는《보고전의 보고》가 기둥종목의 하나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력이 왕성한 리영근선생은 70고개를 넘어서도 계속 새로운 작품에 연출하면서 우리 민족의 연극, 소품무대를 활성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런 성과로 리영근선생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는 연극인으로 자리매김하였고 2003년 1월 연변텔레비죤방송국과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사, 문화국 등 단위들에서 공동으로 주최한《내가 즐기는 배우》추점평의활동에서《최우수배우》로 당선되였다.
2007년에 있은 국가문화부 《중국연극 100돐기념평의활동》과 길림성정부, 길림성문화청 《중국연극100돐기념평의활동》에서 선생은 《특수기여영예상》을 수상하였으며 중공 연변주위와 주정부에서 조직한 《중국연극 100돐기념평의활동》에서는 《민족문화예술특수기여영예상》을 받아안는 영광을 지니였다.
무수한 예술형상을 창조한 리영근선생님은 중국 문화부연극축제에서 조선족배우들중 유일하게《문화부 개인표현예술연기상》과《중국연극예술계 금사자컵 금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의 사적과 공적은《중국희곡가 대사전》,《20세기 휘황한 중국대기록•길림권》,《중국조선족인물록》등 서적에 수록되였다.사회적으로는 중국연극가협회 회원, 중국연극예술연구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연극가협회 회원, 길림성연극가협회 회원, 연변주문련 고문, 연변연극가협회 회원, 부주석, 고문, 연변텔레비방송국 문예부 초빙 편집고문, 배우 등 직에 겸직하였으며 1979 년부터 연변주정협 제5, 6, 7기의 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조선족연극사업에 대한 리영근선생님의 특수한 기여에 비추어 연변연극단에서는 1996년에 《리영근 무대예술생애50돐야회》를 마련하고 전 주를 상대로 순회공연을 조직하였으며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2007년 5월《문화광장》프로를 통해 리영근선생을 널리 소개하였다.
락관적이고 따뜻한 아버지
리영근선생의 딸 리충실은《곤난을 두려워말라》,《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라고 회억하며 아버지는 험난과 가난의 악렬한 환경에서도 항상 락관적이고 따뜻했던분이라고 말한다.
《문화대혁명》으로 억울함과 육체상의 고통을 받음에도 밝은 미래가 올거라는 락관적인 성격으로 버텨냈고 항상 남을 관심해주고 친절함때문에 집에는 손님이 끊기지 않았다고 한다.
농촌에 내려갔을 때 그의 집은 회의소집 장소로 되기가 일쑤였고 늦게까지 토론하고나면《출출한데 모두들 식사나 하고 가게. 여보 그 있잖소,그걸 내놓소》라며 부인한테《난제》를 준다. 사실상 집은 가난하다나니 먹을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던것이다. 그때면 어머니는 있는거 없는거 다 모아 술 안주를 찾아 상을 차려주군 했다고 한다.
리영근선생네 량주는 몇십년간 연극활동에 종사하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한 《행복한》 연극인부부이기도 하다. 다년간의 무대생활에서 정이 들어 1962년 4월 29일 저녁 련습을 하다가 대충 세수를 하고 간소한 결혼식을 치른 두분은 마음고생도 그렇지만 많지 않은 로임으로 여섯식구의 생계를 이어가느라 허둥댈 때가 더욱 많았다고 한다.
리영근과 그의 부인 전정자
《가정생활에 보탬이 되려고 아글타글 장사도 한 어머니였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아버지를 지지했었다》고 그의 딸은 말한다. 2008년 리영근선생님과 50년 동고동락한 인생동반자이자 연극동료인 사랑하는 안해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자식들과 만년을 편안히 보내다 안해가 돌아간지 2년후 리영근선생도 안해의 뒤를 따라갔다.
60년간 각양각색의 웃음으로 다종다양한 캐릭터를 창조하여 가장 즐겁고 가장 행복한 순간순간들을 선물한 웃음의 왕별, 별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웃음소리는 영원히 영원히 전해져갈것이다.
길림신문 최화,신정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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