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영화계의 특수효과지휘자 채규광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2월17일 11시05분    조회:793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채규광

중국의 영화거장 오우삼감독(吴宇森导演)과 함께 영화 《적벽대전》의

 촬영현장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조선족특수효과지휘자 채규광(오른쪽).

영화는 감독이 만드는것으로 흔히들 알고있다. 그러나 감독 한사람이 영화를 만드는것은 아니다. 최근 북경에서 《메두사스페셜인펙트》라는 특수효과팀을 운영하고있는 조선족특수효과지휘자 채규광(37세,蔡奎光)씨는 작품의 성패와 직결되는 특수효과를 연출하며 중국영화대가들과 함께 영화대작을 촬영제작하고있다.

영화 《집결호》의 통역으로

그의 시작은 우연하였다. 도문태생인 그는 20대초반에 한국로무현장에 가 힘든 막일에 견뎌내고 까닭을 알수 없는 한국인들의 무시를 감내하면서 6년간 분투하였다. 고생을 이겨내며 근력과 인내력을 키운 그는 2006년 단연 귀국하여 북경에서 자신의 할일을 찾고있었다.

불이 달린 화살이 날아가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채규광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배우로 직접 등장하고있다.

때마침 중국영화계의 유명한 풍소강(冯小刚)감독이 한국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특수효과팀과 합작하여 영화 《집결호》를 촬영하게 되면서 필요한 통역을 모집하고있었다. 호기심반 모험반으로 모집에 응했던 그는 운좋게 통과되였다. 영화를 촬영하는내내 모든 특수효과에 관련된 사항들은 그를 통해 락실되였다. 워낙 드놀지 않는 성정미인데다 손에 일감을 잡기만 하면 몸전체를 던지는 그는 통역을 하면서 자발적으로 특수효과팀의 일원이 되여 모든 일을 함께 해나갔다.

일에 림하는 그의 자세는 한국특수효과팀 정도안감독의 눈에 들었다. 《한국 영화계 특수효과의 전설인 정도안감독은 엄연한 팀구성단계를 넘어 이 말단통역원의 손을 잡고 특수효과일에 대해 낱낱이 가르쳤습니다. 대인은 대사를 치름에 격이 따로 없었습니다. 》 규광씨는 정도안감독의 은혜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있었다.

장예모감독과 함께.

녕호감독과 함께.

영화대작 《적벽대전》의 특수효과지휘자로

영화 《집결호》는 단연 대성공을 거두며 2007년 한국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조선평양국제영화제의 페막작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 판권이 판매되기도 하였다. 국내적으로는 특수효과의 진실력과 충격력으로 하여 영화촬영제작에서 특수효과전문성이 강조되고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대두하게 된다.

그는 이어 미국 할리우드에서도 알아주는 홍콩의 오우삼감독과 손을 맞춰 중국력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이였던 《적벽대전》의 영화촬영에 참가하여 작품에 걸맞는 특수효과를 창출하였고 풍소강감독과 함께 여진이 이는 사천지진구에 들어가 세계 관객들을 울린 영화 《당산지진》의 진실한 화면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대가들은 다 대가로서의 리유가 있었습니다. 〈적벽대전〉 촬영이 시작되였을 때였습니다. 〈액션!〉소리와 함께 긴장한 촬영이 진행되는데 며칠전부터 내린 비에 성벽세트장이 무너져내리면서 단역배우가 깔렸습니다. 모두들 두손으로 흙벽돌을 파헤치며 죽기살기로 구원작업에 달라붙었습니다. 다행으로 그 배우는 옷무지속에 깔리다보니 상한데 없이 구원되였습니다.

전투장면 특수효과설치를 지휘하고있는 채규광(가운데) 

넋을 잃고 멍하니 서있는데 오우삼감독이 세트장속으로부터 천천히 걸어나오고있었습니다. 감독님의 시선은 저에게로 향해있었고 저 또한 그 시선을 피할수 없었습니다. 감독님은 저에게 다가오셔서 저의 손목을 힘주어 잡아주셨습니다. 그때 감독님의 손은 경련이 일듯 무섭게 떨리고있었습니다. 대가도 필경은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나직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앞으로 전문가들의 눈에 그 어떤 위험요소가 보이면 제때에 막아주세요. 위험이 있다면 전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되니깐요.》오우삼감독의 인간성에 깊이 매료된 채규광씨는 그후 위험한 장면을 촬영할 때면 자기가 직접 배우로 등장하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장예모감독 또한 현장변화가 많은분입니다. 촬영현장에서 이런저전 변화를 시도하며 끊없는 추구로 만족을 모릅니다. 그 요구에 따르다보면 모든 장비들을 끌고 현장발휘를 해야 하고 부단히 기술력을 개발해야 됩니다.》 그는 장예모감독의 예술의 경지에 대한 추구에 탄복하면서 역시 끝없는 노력으로 그와 함께 전쟁영화들을 촬영하였다. 

잔혹한 전쟁의 처절함을 적라라하게 표현한 전투현장.

중국 4대감독의 하나로 《괴짜감독》이란 별명을 가진 녕호감독의 억대수입작품 《황금절도안》(黄金大劫案)이며 드라마 《량검-2》(亮剑2),강홍뢰감독의《나의 련대장 나의 련대》(我的团长我的团)등을 비롯한  20여부의 손꼽히는 영상대작의 특수효과도 그가 담당하였다. 현재 미국감독이 조종탑을 잡고 한국에서 촬영하고있는 중국작품 《도시유희》(城市游戏), 《중국의 타이탁닉호》라 불리는 영화 《태평륜》(太平轮)도 그가 이끄는 《메두사스페셜인펙트》 팀원들이 특수효과를 담당해가고있다.

《메두사스페셜인펙트》의 꿈

워낙 한국특수효과팀의 성원으로 중국제작사들과 합작촬영을 하던 몇명의 조선족친구들은 한 작품을 촬영하고나면 다음 작품을 촬영할 때까지 로임 한푼 없이 기약할수 없는 기다림에 시달리군 하였다. 그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그는 독립적인 특수효과팀을 무어 직접 중국제작사들과 합작하면서 나래를 굳히고싶었다. 하여 그는 독립을 선포하였고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절대창의력과 신술력을 닮은 단체로 키우고저하는 뜻을 부여하여 《메두사스페셜인펙트》라 팀명을 지었다.

드라마 《량검》의 양양감독과 함께 작업을 구상하고있다.

촬영을 마치고 배우 리진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다.

7, 8명의 조선족젊은이들을 위주로 팀을 구성한 뒤 워낙 큰 영화작업을 맡아오던 그들이라 웬만한 일은 눈에 차지 않고 하니 1년간 휴식을 취하면서 확실한 방향을 찾고있었다. 《지금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중국에 와 촬영하는 작품이 많아지면서 합작을 제의해오는 회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선뜻 제의를 접수하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우선은 아직 많이 배우고 투자를 늘이면서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팀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꿈은 합작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중국영화업계에 특수효과라는 전문부서의 기발을 확실하게 꽂는것입니다. 》 그의 어조는 낮으나 저으기 강경하였다.

《메두사스페셜인펙트》의 목표는 분명했다. 현재 중국영화업계는 무술, 액션, 전쟁 관련 영화제작에서 폭파조, 무술조, 동작조 등 소조단위로 분산된 작업을 하고있는데 통일과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고있으며 특히 특수효과전문성이 두드러지게 강요되고있다. 한국이나 미국 등 기타 나라의 경우는 특수효과라는 전문분야가 이미 영화촬영제작의 중요한 부서로 대두한지 오래다 .

《작품마다 상황이 다르고 또 선진국 동업종들과의 경쟁이 가심화되면서 기술력 개발과 연구에 한시각도 해이해질수 없습니다. 변화무쌍한 현장수요에 대비하면서도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장비투입을 해야 하고 또는 남들이 따를수 없는 특색효과를 창출하기에 안깐힘을 쓰고있습니다. 》

촬영준비를 하고있는 《메두사》팀원들.

그는 바람이 부는 특수효과를 리상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물류업계를 통해 미국현지의 풀풍구를 구입해오기도 하였다. 이 풍구건도 고향에 있는 친구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중국영화업계에서 일익을 담당하고있는 규광에게 최선의 응원을 보내고있었다. 그는 《메두사스페셜인펙트》팀을 구성할시에도 뜻이 맞고 일손이 맞는 조선족젊은이들 중심으로 무었는데 그들은 지금쯤 눈빛만 봐도 서로 알아서들 처사하며 보기 좋게 맞물려가고있다. 

그 또한 업계의 조선족친구들 일이라면 발벗고 도와나섰다. 2011년 할빈빙설제영화축제에서 《최우수시각효과단편상》(获得最佳视觉效果短片奖)을 수상한 조선족청년영화감독 김혁은 미니단편영화를 촬영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당시 그는 다른 영화감독과 함께 작품촬영중이면서도 틈을 타 그를 도와주었다. 단편영화에 독립영화의 특수효과를 도입하니 그 효과에 관객들 모두가 놀랐고 시청률과 클릭수가 무작위로 올라갔다.

그는 《조선족관련 제재의 작품을 촬영한다든가 연변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와 도울것》이라고,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몸은 밖으로 돌아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에 민족에 향해있는 나젊은 영화인, 중국영화업계의 전도유망한 특수효과지휘자 채규광과 그의 《메두사스페셜인펙트》의 꿈의 한자락은 고향에 닿아있었다.

길림신문 김청수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기술원과 함께 제품품질을 검사하고 있는 박권률 씨(왼쪽).   민족음식문화를 선도해가는 조선족청년기업가 – 박권률 씨‏ (흑룡강신문=연길) 윤완주 특약기자= 중국조선족민속문화도시로 소문난 룡정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져있는 로투구진 렴명촌에 가게 되면 부지면적이 1만 7000평방미터, 공...
  • 2013-05-14
  • 대형계렬기획보도-《중국조선족 백년백인》(16)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우수한 민족사업 지도자 문정일은 1914년 음력 3월 20일에 조선 함경도 회령군에서 태여났다. 문정일의 원명은 리운룡이다. 문정일은 일찍 1940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선후로 조선의용군 제2지대 분대장, 중공연길현위 부서기, 현장...
  • 2013-05-14
  •     “의학원을 졸업하고 연길시병원정보과에 취직하였던 남편은 자투리시간을 모아 컴퓨터를 자습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120의료응급쎈터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였습니다. 당시 남편이 개발한 프로그램은 의료분야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는데 이를 계기로 2003년에 병원을 사직하고 컴퓨터프로...
  • 2013-05-14
  • - 장춘시제2조선족중학교 리미선교장의 이야기 장춘시제2조선족중학교 리미선교장 《학생들과 함께 있고 학생들이 기뻐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장춘시제2조선족중학교 리미선교장, 1986년부터 교육사업에 종사한 이래 선후로 조선어문교원, 학급담임, 교무주임, 부교장,교장직을 맡아오면서 27년간 시종 강...
  • 2013-05-13
  • 주덕해(1911-1972), 그의 원명은 오기섭(吴基涉),그는 1911년 음력 3월 5일, 로씨야 원동 연해주 우쑤리스크부근의 산간마을에 한 가난한 조선족농민의 아들로 태여났다. 1920년 3월부터 길림성 화룡현 수동촌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청년기부터 선후로 흑룡강성의 동녕, 동경성, 림구, 밀산 등 북만일대에서 항일에 투신하면...
  • 2013-05-13
  • 잭 마 ‘알리바바’ 회장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의 CEO 자리에서 물러나기 일주일 전, 잭 마 회장(48)은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야외 테이블에서 아침식사를 들고 있었다. 자산이 42억달러로 추정되는 마 회장의 재산은 알리바바가 상장되고나면 더 불어날지도 모른다. 마 회장은 1...
  • 2013-05-13
  • 하루 8시간 연습하지만 내게 음악적 영감을 준 건 셰익스피어 문학이었다 [사람 속으로] 중국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朗朗) 더 편리해진 뉴스공유, JoinsMSN 뉴스클립을 사용해 친구들과 공유하세요 중국에서 태어나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한 랑랑이 2010년 발매된 ‘랑랑 라이브 인 비엔나’ 앨범 수록곡을...
  • 2013-05-11
  • ㅡ료녕성과학협회 김태원부주석 인터뷰 김태원프로필 1954년 환인현 환인진출생, 1979년 중앙민족대학 중문학부 졸업후 성민위 배치, 이듬해 성위정책연구실로 전근해 선후로 경제처, 농촌처 처장, 1994년 보람점시 시위부서기, 1997년 성위정책연구실 부주임 력임, 2005년 성과학협회 부주석 담임, 성사회과학원 특약연구...
  • 2013-05-10
  • 칭다오 우리어린이병원 오픈한 이계화 원장  김명숙 기자= 칭다오 청양구에 조선족이 운영하는 우리어린이병원이 정식 오픈했다.  원 칭다오시 제8병원 소아과 주임이었던 이계화(조선족, 57세, 길림성 교하시) 원장은 일찍 1977년 대학입시가 회복되는 첫해에 우수한 성적으로 지린(吉林)의학원 의료학과에 입학했다. 졸...
  • 2013-05-10
  • 중국의 영화황제 김염     김염 프로필 원명 김덕린, 1910년 4월 한국 서울에서 태여남, 1912년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 김필순을 따라 두만강을 거너와 중국 통화에 정착을 했다가 후에 치치할로 이주, 1927년 상해로 간다. 이듬해 《카먼》등 극에서 조연을 맡으면서 연극인으로 기량을 선보인다. 1929년 손유...
  • 2013-05-1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