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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 김홍광의 숨겨진 "전설"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5월22일 08시14분    조회: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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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홍광

사진설명:김홍광중국과학원 원사

과학자 하면 누구라도 대뜸 "괴짜"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리기 십상이다. 기발한 상상력과 엉뚱한 행동, 이상한 성미… 등등. 깡마른 체구에 머리를 헝클어뜨린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바로 그 상징적 인물이다.

그러나 김홍광은 기자가 연구소에 가면서 머리에 그려보았던 그런 "괴짜"의 과학자가 아니었다. 인터뷰 도중 그는 자주 일어나 스스럼없이 좌중에 차를 따랐고 일행과 이웃처럼 허물없이 담소를 나눴다. 거짓말 하나 없이 "동네 아저씨"와 같은 그런 풋풋한 사람이었다.

 

 

김홍광은 중국과학원의 원사(院士)이다. 2013년 중국과학원 원사 선거에서 중국 국적의 과학자 53명, 외국 국적의 과학자 9명이 새롭게 선출되었고, 이 가운데서 조선족으로는 그가 뽑혔다. 과학원의 조선족 원사로는 지금까지 그가 유일하다.

 

"'십년을 두고 칼 한 자루를 간다.'는 말이 있지요? 하지만 과학자는 10년이 아니라 20년이라도 '칼 한 자루'를 갈지 못할 수 있습니다." 김홍광은 학문연구의 어려움을 이렇게 요약해서 말한다.

그는 "과학자"를 망망한 바다위에 떠있는 쪽배로 비유했다. 바다위에서 암만 노를 저어도 쪽배가 언제 섬의 대안에 도착할지 모른다는 것. 뱃사공의 노력은 큰 대가를 지불했는데도 불구하고 혹여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8시간, 16시간의 노동은 선형적이지만, 과학연구는 비선형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건대는 80, 90%의 과학자들이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해요."

비선형은 변화에 대한 결과가 예측불가능하게 증폭되는 것을 말한다. 비선형계에서는 미세한 변화가 계속 증폭되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변화에는 섬처럼 언제 나타날지 모를 "기회"가 숨어있다. 이 기회는 또 바다처럼 주변의 "환경"과 관련된다.

사진설명: 유럽방문기간 석사 지도교수이며 중국의 유명 과학자인 채예현(蔡睿賢)원사(오른쪽)와 함께(2004년)

산이 높아야 골이 깊다

"환경이 잘 갖춰져야 학문연구에서 돌파구가 생길 기회가 많지요." 김홍광은 그가 학문연구라는 "바다"에서 목표물인 "섬"을 빠르게 만날 수 있은 행운아라고 말한다.

그는 지방의 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중국과학원에 배치를 받았다. 김홍광은 과학원이라는 이 "거인의 정원"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소중한 경험을 체험했다. 이에 따라 김홍광은 날이 갈수록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며 얼마 후 자진하여 과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는다. 이때 그의 지도를 담당한 교수는 채예현(蔡睿贤, 1934~)으로 중국과학원 공정열물리연구소 2명 원사중의 한 사람이었다. 채여현 교수는 복잡한 총에너지시스템을 분석하는 비교법을 창립, 이로써 각종 총에너지시스템의 간명한 정성(定性)법칙을 총화, 정확한 평가기준을 강조하는 열역학 분석학설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김홍광은 에너지학계의 이 유명한 학자의 곁에서 열역학의 정수를 습득할 수 있었다.

사진설명:김홍광원사(왼쪽 첫번째) 중국의 저명 에너지과학자 오중화(吳仲華)원사(오른쪽 첫번째)와 대경(大慶)서 에너지 이용 고찰, 관련 연구 석유부 1등상 수상(1983년)

"거인의 정원"에는 걸음마다 행운이 따르고 있었다. 한때 연구소에서는 하늘의 항공엔진을 화학공장의 동력원으로 연구, 개발하였다. 오중화(吳仲華, 1917~1992) 교수가 직접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오중화 교수는 공정열물리학의 창시자로 날개바퀴의 3원 유동이론을 만든 과학자이다. 김홍광은 오중화 교수의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여 거인의 구상과 연구, 개발의 전 과정을 눈으로 익히고 몸으로 겪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다.

1991년, 김홍광은 유엔개발계획의 파견으로 일본 도쿄공업대학에 간다. 도쿄공업대학은 공정기술과 자연과학연구를 위주로 하는 세계 일류의 대학이다. 이때 김홍광은 그의 전문인 열물리의 계속이 아니라 전혀 다른 학과인 화학환경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온도나 압력의 물리반응에 질적 변화라는 화학반응을 가미한 거지요."

연구의 융합반응 다시 말해서 다른 학문분야를 서로 융합시키는 작업이었다. 현재의 많은 학문분야는 제각기 많은 연구들이 수행되었고 나름대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의 학문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벗어나 다른 학문분야의 융합을 통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의 지도교수는 이시다(石田) 교수로,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말 그대로 김홍광의 세계에는 거장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연이어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의 눈앞에는 또 다른 세상이 화려한 그림처럼 하나 둘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설명:김홍광원사가 이끄는 연구팀팀의 태양에너지 열화학발전시스템 개발(2011년3월 CCTV뉴스 보도)

드디어 김홍광의 세계에서도 전설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

훗날 김홍광은 이산화탄소 포집에 관한 화학사슬의 연소동력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는 연소 초기단계에 이산화탄소를 회수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의 제3세대 에너지환경 동력시스템을 제기했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처음 발견한 새로운 화학환경 현상이었다. 이 때문에 유엔 정부간 기후변화전문위원회(IPCC)는 이산화탄소 포집과 매몰 보고서(2005)에 "김홍광 등은 화학사슬 연소의 연구에서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특별히 이름을 거명하여 언급했다.

현재 김홍광은 미국과 일본에 전매특허 2종, 국가 발명전매특허 26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학술논문 206편, 학술저서 3부를 발표했다. 이런 공로로 국가자연과학 2등상, 중국과학원 자연과학 2등상, 석유공업부 과학기술진보 1등상 등을 받았다.

 

사진설명:2002년 오스트리아에서

 

무지개에는 색조가 없었다

 

기자단의 일행 중 누군가 진부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물음을 꺼냈다. "원사님의 어릴 때의 꿈은 무엇이었죠?"

그런데 김홍광의 대답은 일행의 기대를 한참이나 빗나가고 있었다. "꿈이라니요? 그때는 먹고 사는 자체가 꿈이었습니다."

사실상 김홍광은 어릴 때 공부를 남달리 즐겼다. 진짜 신이 들린 것처럼 공부 자체가 재미있었다고 한다.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공부 성적은 또래에서 언제나 앞자리였다. 남다른 흥미라고 할까, 중학교 때에는 물리실험에 흠뻑 빠져들기도 했다.

"용돈을 모아서 부품을 산적 있습니다. 그걸 일일이 조립했지요."

구들에 뒹굴고 있던 부품들이 한데 묶여 반도체가 만들어졌다. 일명 "김홍광"표의 제품이었다. 이 엉성한 제품이 백화점의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낸다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반도체 조립품은 더는 엄두를 내지 못할 사치품으로 되었다. 김홍광이 13살 때 의사로 있던 모친이 페니실린 이상 반응으로 불시에 사망했다. 그때 위로 누나 하나, 아래로 동생 둘이 있었다. 식구가 올망졸망한 집안에는 갑자기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부친은 구들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부친도 김홍광이 18살 나던 해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졸지에 양친을 모두 여읜 집안에는 크고 작은 아이들만 남았다. 장자인 김홍광은 어린 나이에 세대주로 되었다. 그는 교과서 과목이 아닌 크고 작은 가사를 직접 일일이 챙겨야 했다. 그는 새벽이면 눈을 잡아 뜯으면서 일어나 밥을 짓고 어린 두 동생의 도시락을 챙겼다. 누나는 간호사로 근무했는데 직업상 늘 야근을 서야 했던 것이다.

그런 쓰라린 기억에 남는 하나의 "행복"이 있었다. 김홍광은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한 후 장춘 현지에 쉽게 남을 수 있었다. 그때 지식청년이라고 하면 모두 하향 즉 농촌으로 내려갔다. 하향 지식청년은 19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중국에서 자원 혹은 부득불 도시에서 농촌에 내려가 농민으로 된 청년들을 말한다.

"집에 동생들을 돌 볼 사람이 없잖아요? 그 덕분에 농민이 아니라 노동자가 된 겁니다."

김홍광은 전기수리공으로 있으면서 아스라한 전선주에 기어올랐고 두메산골의 골짜기도 누비고 다녔다. 일찌감치 사회에 뛰어들었지만 가난한 살림은 그냥 펴일 줄 몰랐다. 월 노임이 불과 22원 정도였다. 그야말로 한 달을 살면 다음의 한 달을 근심하는 암울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1977년, "문화대혁명"의 충격으로 10년 동안 중단되었던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중국은 이로부터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하는 봄날을 맞이했다. 공부 밑천이 두둑했던 김홍광은 선뜻이 대학입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때는 4,50명의 수험생 가운데서 겨우 하나 꼴로 대학생이 나오고 있었다.

김홍광은 이듬해 동북전력대학에 입학하는 쾌거를 올린다. 말 그대로 바늘구멍을 빠져나온 것이였다.

"그때는 문과 성적이 너무 떨어져서 더 좋은 대학으로 가지 못했어요."

김홍광은 이렇게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비사를 밝힌다. 그의 화학 성적은 2점 모자라는 만점으로, 수학과 물리, 화학 성적은 크게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문과 정치 성적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합격선에도 이르지 못해 뒷다리를 당겼다.

그때 김홍광이 재고 끝에 지망 신고란에 써넣은 것은 실용학문인 "열에너지의 동력"이었다. 솔직히 생계를 해결할 직업이 첫째가는 고민이었으며 먼 훗날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곤 아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깊고 긴 터널의 저쪽에서 드디어 가느다란 빛줄기가 나타나고 있었다.

사진설명:세미나 현장에서 발제하고 있는 김홍광 원사

 

시냇물은 어디로 흘러갈까

 

대학에 입학할 때 김홍광의 성적은 학급에서 꽁무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적은 1학년 때부터 금세 상승선을 그었고 대학기간 계속 고공행진을 했다. 학급 "학습위원"의 이름은 당연히 김홍광의 차지였다. 그에게 반한 학교 지도부는 김홍광을 반 강제적으로 학교에 남기려고 했다.

실은 그 시절 대학교에 교원으로 남는 것은 흔치 않은 혜택이었다.

이때 중국과학원 장춘 분원(分院)에서 특별모집을 왔다. 알고 보니 모집자 명단에는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 등 유명대학 졸업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력부문의 전공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김홍광에게는 고개 너머 높은 산이 나서고 있었고, 또 그만이 활보할 수 있는 길이 보이고 있었다. "제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무대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남는 것을 포기하고 과학원을 선택했어요."

김홍광은 과학자에게 환경이 잘 갖춰져야 하지만 목표 역시 필수적이라고 거듭 말한다. 예전에 그는 일본에 갔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많은 동업자들은 국제적으로 선두에 있는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족 학자들을 비롯한 중국학자들은 거개 기업에서 후원하는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생계 때문에 기업의 프로젝트에 몰두해야 하는 게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때 김홍광은 유엔개발계획 방문학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대우가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그는 또 도쿄공업대학에서 선후로 보조연구원, 부교수로 있으면서 두둑한 노임을 받았다. 이와 함께 박사공부를 동반하면서 국제 전연적인 연구 과제를 내놓아 일본 문부성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뒷근심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과제의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지요."

 

솔직히 김홍광이 들려준 진실한 이야기는 주변에서 들어본 적 있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바로 시초의 작고 하찮은 이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나중에 "원사"라는 과학계의 하나의 전설을 만들었던 것이다.

"시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된다."라는 옛말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국제방송 글/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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