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김의진 초대회장 인터뷰
김의진 회장 프로필
1956년 길림성 화룡현 출생.
1978년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입학.
1982년 중앙민족어문번역국 입사. 《자본론》 등 경전저작번역 참여함.
1988년 려행업에 투신. 수백만 관광객을 유치 및 접대하는 등 중한 민간교류 가교역할 담당.
현재 북경일진위업투자자문회사, 북경금협륜과학기술발전유한회사(자동차 도장 및 복원 가맹업), 북경금협륜설비제조유한회사(기계제조), 대륙주식투자유한회사, 제주중국성개발(부동산) 리사장, 북진국제려행사 부사장.
주요 사회직무: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중일한경제발전협회 부회장, 중한기업련의회 부회장, 전국조선족기업인골프협회 회장, 명예회장,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리사, 북경시민족련의회 리사, 중앙민족대학 특별초빙교수,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 고문 등 력임.
지난 2011년 6월 8일 고고성을 올린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가 3주년 대축제를 맞는다. 재경 조선족기업인들의 단합과 민족사회통합을 취지로 설립된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이하 조기련으로 략칭)는 그동안 수도 북경에서 기업인들의 대변인으로서 기업인들을 단합시키고 기업인들을 위해 적극 봉사했을 뿐만 아니라 동포사회의 구심점으로 되어 북경조선족사회의 대표적인 큰 행사들을 앞장서 조직함으로써 조선족의 위상을 높이는데도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들이다.
조기련이 북경조선족기업인들의 대화합의 플랫폼으로 되고 오늘과 같은 성장을 이룰수 있은것은 김의진 회장의 공로가 크다. 다 알다싶이 김회장은 협회 발기인으로 지난 3년간 높은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강한 리더십으로 협회를 이끌어왔으며 협회를 위해 모든것을 헌신해왔다. 협회 설립 3주년을 맞는 뜻 깊은 시각에 협회가 걸어온 길 그리고 현재 회원들의 관심사로 되고 있는 김회장의 퇴임설에 대한 궁금증도 풀기 위해 왕징 교문호텔 6층에 위치한 조기련 회장 사무실을 찾았다.
통합을 위한 작은 실천들, 그리고 협회가 출범하기까지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의 설립경과를 말하기에 앞서 북경조선족기업인들의 형성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개혁개방 30여년간 북경의 조선족기업인들은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발전단계를 거쳐왔다고 할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동북3성에서 수도 북경에 진출해 짠지장사, 김치장사를 하다가 작은 음식가계를 꾸린 분들을 조선족 기업인 또는 경영인 1세대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후 석산린처럼 동북으로부터 북경에 와서 공장을 차리고 제조업에 종사하던 기업인들과 북경에 사무실을 차리고 한국, 일본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세대를 제2세대 경영인 혹은 기업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후 지난 세기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전후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과의 교류 또는 외자기업에서 근무하면서 배우고 익힌 감각으로 창업을 한 50대, 40대 기업인들이 속출하면서 지금의 조선족기업인군체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김회장은 북경의 조선족기업인군체 형성과정을 이렇게 개괄한 후 현재 북경에 보면 타민족의 우수기업인들과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조선족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주식시장에 상장까지 한 의류제조 및 유통업에 종사하는 랑시브랜드의 신동일 리사장, 요식업에서 13억 중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한라산그룹의 장문덕 대표, 그리고 의료기기제조에서 약탕관제조기준을 국가급 유일기준으로 승격시킨 동화원의료기기유한회사의 남룡 대표, 역시 의료기기제조업에서 이름 높은 커시안의 박걸 리사장 등을 꼽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족기업을 볼 때 규모나 매출이 작은 영세기업들로 종합실력이 약하다고 알려주었다.
“사실 개혁개방 초기에 제일 먼저 문을 박차고 세계에 진출한 민족도 조선족이고 제일 먼저 대도시와 연해도시로 과감하게 진출한것도 조선족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오히려 타민족보다 발전이 더딜가요? 후발주자인 한족과 비교해볼 때 조선족기업인들이 안고 있는 이런저런 선천적인 부족점들이 우리 민족 기업인들의 성장과 발전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로 수도 북경에서 발을 붙이고 경영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주류사회와의 관연, 지연입니다. 제1세대, 제2세대의 경영인 혹은 기업인들은 동북3성으로부터 산 설고 낯 설은 북경에 와서 외지출신의 경영인으로 여러모로 불리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이 관을 넘기 위해 몸부림쳐왔습니다.”
그런 과정에 뭉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여러가지 형식의 단체와 협회를 만드는 실천도 해봅니다. 하지만 당시 환경의 미비 ,정부허가 및 리더그룹의 결여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전부 단명으로 끝나거나 유야무야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의진 회장의 말처럼 북경진출 초기 조선족기업인들은 어려운 여건에서 홀로 가시덤불길을 헤쳐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김의진 회장을 보면 원래 중앙민족대한 조선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민족번역국에서 번역과 글쓰기를 하던 문화인으로 지난 세기 80년대 말 중한교류의 물꼬가 트면서 려행업에 발을 들여 놓고 또 그후 투자를 계기로 요식업, 제조업, 부동산 개발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기업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였던것이다. 김회장은 자신이 기업인으로 살아오는 과정에 겪은 고충도 많고 그러다 보니 기업인들이 뭉쳐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서 기업인협회를 만들고 선두지휘자로 나서는것은 어쩐지 적성에 맞지 않아 줄곧 회피해왔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서의 김의진 회장의 리더십은 기타 기업인모임에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지난 2000년 초부터 조선족기업인들의 교류, 친목을 목적으로 손진석, 허성일 등 재경 조선족기업인들과 공동으로 북경타이거(호랑이)골프회를 만들었으며 이 모임은 나중에 전국조선족기업인골프협회로 발전했다. 현재 전국에 1,500여명 회원, 16개 분회를 보유하고 있으며 참가인수가 400-500명에 달하는 큰 대회를 올해째로 15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이밖에도 북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전국적인 대한국려행업계종사자 골프모임인 KTG협회를 조직하는 등 취미를 통한 보다 유연한 모임을 통해 그동안 많은 인적자원을 확보해왔었다.
지난 2004년부터 김의진 회장은 또 민족출판사 소속의 《경제생활》잡지의 요청으로 10여명의 의기투합하는 조선족기업인들을 단합하여 《경제생활-왕징조선족문화원》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 문화원은 3년간 왕징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한글반”, “청년들을 위한 영어반”, “명사와 함께 하는 주말특강”, “업종별 조선족경영인 워크숍” 등을 개설 운영 하여 사회적으로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이 후원회를 바탕으로 2006년에는 중앙인민방송국, 중일한경제발전협회와 협력하여 처음으로 “전국 조선족경제인 고위층발전포럼”을 개최함으로써 조선족기업인네트워크기기반을 닦아놓았다.
김의진 회장은 그후 중일한경제발전협회의 부회장으로 봉사하면서 제1차부터 제3차에 이르는 “전국 조선족 정재계 고위층포럼”을 기획 진행하는 등 조선족기업인들의 통합을 위한 실천을 이어왔다. 그런데 매번 전국적인 포럼이나 행사를 조직하거나 참석할 때면 딱한 질문에 맞다들게 됐다. 즉 왜 수도 북경에는 조선족기업가협회가 없는가 하는것이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북경의 조선족기업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지방에서는 거의 전부가 조선족기업가협회를 내오고 협회의 힘으로 여러가지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북경이 흩어진 상태로 계속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때로부터 김의진 회장은 북경에 산재하고 있던 월드옥타북경지회, 조선족골프모임, 여러 동창회, 동문회, 동향회 등 모임의 단체장을 맡고 있는 기업인들을 한사람 한사람 찾아다니며 북경의 조선족기업가들의 힘을 모으는 협회를 내올 당위성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자신이 부회장으로 있는 외교부산하 중일한경제발전협회를 설득하여 공식허가를 받아 드디어 2011년 6월 8일 이들 모두를 포용한 “북경조선족기업가련의회”를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이는 여태껏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북경조선족기업인들의 대통합을 이루어낸 쾌거가 아닐수 없다.
품위 있고 진취적인 협회 지향
“북경의 조선족기업가들을 보면 대부분 학력이 비교적 높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을 나온 후 북경에 남아 기업가로 성장한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타 지방에 비해 제조업이 적으며 무역, IT 등 머리를 갖고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의진 회장은 북경조선족기업인군체의 특점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협회는 첫 시작부터 차원이 높은, 품위 있는 협회를 지향했다. 사실상 처음에는 모여서 술이나 마시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 만약 높은 목표를 지향하지 않았더라면 힘들게 모인 협회가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고 흐지부지한 상태로 끝나기 십상이였다. 이에 조기련은 학습형, 봉사형 협회로 거듭난다는 구호를 제기하고 이를 위해 꾸준히 실천해왔다.
조기련 잡지를 꾸린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협회는 설립 초기에 이미 조기련 잡지 창간 준비사업을 진행했으며 수개월간의 노력 끝에 지난 2011년 12월 창간호를 펼쳐냈다. 현재 도합 10기를 출간한 상태로 “표지인물 소개”, “본회소식”, “회원사 홍보”, “법률강좌” 등 기업인들이 관심하고 기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알차게 꾸려진 원인으로 기업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좋은 플랫폼으로, 대외에 협회를 소개하는 좋은 창구로 되고 있다.
협회는 그동안 조기련 잡지를 비롯하여 덩치보다는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해왔다. 지난 2013년 5월 24일 협회 웨쳇 대중플랫폼을 개통하고 협회 공고, 활동통지, 회원제품소개, 회원기업동태, 비즈니스정보 등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회원들과 공유함으로써 협회 회원들 속에서 큰 인기를 누릴 뿐만 아니라 북경 나아가 전국 각지 각계 인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현재 협회 웨쳇 대중플랫폼의 사용자수는 2천여명에 달하고 있으며 협회 대외홍보 및 대내 교류소통 방면에서 조기련 잡지와 더불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기업인들의 경우 북경의 각 지역에 모두 산재해있으며 출장 또한 잦은 원인으로 한번 모여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협회의 실정과 발전수요에 따라 지난 2013년 9월 협회를 5개 분회로 나눈 한편 차세대양성 및 청년기업인들의 활약을 이끌어내고저 청년분회를 별도로 설치했다. 최근에는 또 연교분회도 설립했다. 분회의 설립으로 회원 증가에 뒤따른 활동조직난제가 풀렸으며 회원들의 참여의식, 주인공의식 및 응집력이 증가됐다. 한편 이 과정에서 능력이 있고 열정이 있는 리더들을 발굴해냈으며 분회의 우세를 리용하여 많은 새로운 회원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현재 각 분회별로 활동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협회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회장은 또 북경의학계에 조선족 고급인재들이 산재해있는 특점에 비추어 장기적인 안목으로 의학계에서 활약하는 조선족출신의 국가급 전문가들을 협회 고문진으로 영입함으로써 조선족의학전문가들 상호간의 만남과 교류, 단합의 장을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들과 조선족기업인들간의 건강자문 및 의료 봉사 무대도 구축해주었다.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의 지명도가 높아짐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공청단위원회와 훈춘시공청단위원회에서 북경으로 찾아와 수도 북경 청년기업인들과 연변청년들간의 상호교류와 협력을 위한 플랫폼을 구축할데 대하여 제기해왔으며 이에 따라 조기련과 연변청년련합회가 공동으로 연변청년련합회 북경분회 설립을 준비하게 되였다. 그 와중에 협회 청년분회 회원들을 주축으로 하고, 여러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수한 청년들이 망라된 “연변청년련합회 북경분회”가 지난 4월말 북경에서 설립되였다.
김의진 회장의 소개에 따르면 협회 김해봉 부회장이 연변청년협회북경분회 주석을 담임하고 방철, 김광춘, 김현묵, 오군 등이 각기 부주석, 상무위원 등 직무를 맡고 있다. 그리고 협회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김현묵, 김해봉, 오군 등 3명 청년회원들이 북경시 조양구 청년련합회 위원으로 추대됐다.
“북경의 조선족청년들의 경우 재경 소수민족청년들 가운데 학력이 가장 높고 인구가 비교적 많고 종사하는 업종이 다양하며 가장 활약적인 군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태껏 관계하는 부문이 없어 자체단체를 묶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우수한 청년들을 하나로 묶을수 있는 그들만의 플랫폼 구축은 민족사회를 이어나가고 청년들을 단체의 힘으로 주류사회로 진출시킴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의의가 있습니다.”
김회장은 퇴임전에 이 작업을 서둘러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관계부문에 전화하고 편지를 쓰고 면담하면서 호소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 끝에 일전에 북경시조선족청년협회 설립이 정부 유관부문의 허가를 받게 되여 이제 북경에 있는 조선족청년들도 자신들의 만남의 장, 교류의 장, 통합의 장을 가지게 되였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족청년들의 주류사회진출에 좋은 발판이 마련됐다.
이 모든것들은 협회라는 큰 울타리가 있었기에 가능한것이였다.
한국측의 불찰로 한국비자가 안 나오는것을 협회에서 나서서 비자를 받게 한 일, 중병에 걸린 회원에게 협회의 의료 고문진을 통해 북경의 큰 병원의 의사를 련계해준 일로부터 코트라북경무역관, 서울무역관 등 한국인경제단체와 련대를 강화해 회원들에게 비즈니스기회를 제공해주는 등 협회가 있음으로 하여 회원들이 받은 혜택은 여러가지이다.
그리고 김의진 회장이 리사장을 맡고 조선족기업인 정병호가 사장을 맡고 추진하고 있는 한국 제주중국성개발을 봐도 그렇다. 조기련 회원들이 주축이 되고 전국 각지 30여명 기업인들이 공동으로 투자한 이 프로젝트는 투자금만 3억딸라에 달한다. 이런 큰 프로젝트는 혼자로서는 하기 힘들다. 하지만 돈 많은 사람은 돈을, 부동산전문가는 전문지식을,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정력을 내는 등 각자의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면서 이와 같은 큰일을 추진하고 있는것이다.
김의진 회장은 “사람들이 나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능력을 인정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조선족기업가협회라는 큰 조직이 뒤받침되지 않았으면 이와 같이 큰 힘을 모으기 힘들었을것”이라고 강조한다. 제주중국성개발건은 조선족사회는 물론 한국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한국인들은 조선족기업가 수십명이 공동으로 투자한다는 말을 듣고는 대단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자신과의 약속, 그리고 아름다운 퇴임
협회 설립 3주년을 앞두고 항간에는 김의진 회장의 퇴임설과 함께 김의진 회장의 퇴임을 아쉬워하는 목소리와 김의진 회장의 퇴임으로 기업가협회발전에 영향을 미치게 않겠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고 있다.
“3년전 기업가 협회를 설립하면서 초대회장으로 추대되던 그때 저는 황무지를 일구는 마음으로, 빈터에 집을 짓는 마음으로 협회가 기틀이 잡히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을 때까지 열심히 봉사하고 협회가 정상궤도에 들어서면 계주봉을 협회를 계속 잘 이끌어나갈 차기 회장에게 넘기기로 작심했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데 임기 3년간에 자신과의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말 정력적으로 헌신적으로 일해왔다고 자부합니다. 협회의 기틀도 기본적으로 잡아놓았고 협회를 자타가 인정할 만큼 유수의 리더단체로 키워 놓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자리를 비워주어야 하지요. 그렇게 하는것이 협회의 발전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의진 회장이 털어놓은 고백이다. 지난 3년간 김회장은 협회 리더로서 마음고생도 적지 않게 하고 협회를 위해 시간과 돈도 많이 빼앗겼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되고 누군가는 욕을 먹을 각오를 해야 되고 누군가는 헌신해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뛰여왔다. 이런 원인으로 회원들에게 미안하지 않고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게 떳떳한 심정으로 퇴임할수 있었다. 협회 성원들도 “우리 김회장이 쉽지 않았다”, “큰일을 해냈다” 등 김의진 회장의 로고를 높이 평가해주고 아쉬운 심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김의진 회장은 이제 계주봉을 리춘일 차기 회장에게 넘겨주고 초대회장이라는 새로운 위치에서 리춘일 신임 회장 및 협회를 위해 적극 협조하게 된다. 김회장은 그동안 조직다운 조직을 만들기 위해 모든 심혈을 기울여왔다.
김회장과 그가 이끄는 초대회장단은 협회의 기틀을 잘 다져놓았으며 3돐을 맞는 협회는 이미 멋진 스타트를 떼놓은 상황이다. 향후 3년간 북경조선족기업가협회는 이를 발판으로 리춘일 신임 회장의 인솔하에 새로운 도약의 나래를 훨훨 펼치게 될것이다. ▣
리호남
《중국민족》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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