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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야(古来惹)》돌이켜보는 그녀의 무용인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8월29일 15시28분    조회: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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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최미선

- 연변대학예술학원 무용학부 최미선교수를 만나

고등학교무용정품교수전시공연을 마치고

최근 전국 72개 종합대학들이 참가한 2014년 고등학교무용정품교수연구토론회(장춘)에서 연변대학예술학원 최미선교수일행이 무대에 올린 조선족무용《표현조합》(表演组合)《고래야(古来惹)》는 그 제목부터 범상치 않음을 시사하며 대절찬을 받아안았다.

중국무용연구대가 반지도선생은《〈고래야〉표현조합은 고상하고 우아하며 기품있고 차원높은 정품학과》라고, 길림성무용가협회 왕소연주석은 《세계무대에 올려도 추호의 손색이 없는 조합풍격이 뚜렷하면서도 모든 특점들을 아주 잘 표현한 학과목》이라고, 《무대에 나선 최미선교수는 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전같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블랙커피를 마시며

 

 

예술학교시절(왼쪽첫사람).

 

연구토론회에서 갓 돌아오자바람으로 연길낭뜨카페에서 마주앉아 블랙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최미선교수는 저으기 열띤 기분이였다.

《평생의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 모아도 지금에 비할수 없을것입니다. 여태껏 소박하고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온 인생입니다. 세상은 언제든 열심히 사는 사람을 알아주는가봅니다.》

평생을 무용교수로  뛰여온 벅찬 나날들속에 어느덧 퇴직을 맞게 된 최미선교수는 이제 해야 할 일들을 헤아려보았다.

선인들이 만들어놓은 교재류실이 안타깝게 느껴졌고 춤의 민족성과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리론과 자료를 하루빨리 정립해야 할 절실함이 가슴을 짓누르는듯했다. 

그는 중국조선족무용의 선구자의 한사람이며 교육자인 은사 박용원선생(朴容媛)이 창립한 조선족무용교수체계의 하나인 《표현조합》을 완성하여 영상교재를 만들고 또 그것으로 자신의 퇴직고별무대를 대신하고싶었다.

 

민속춤의 주역.

《표현조합》이란 무용동작을 작품으로 이어가는 훈련과정이다. 최미선교수는 그 《표현조합》의 정수를 절제되고 유려한 몸짓으로 승화시킴과 동시에 은사님의 슬하에서 사사받은 춤을 기본으로 현실에 맞게 재창조하여 가시화한 무용교재를 만들어내려 하였던것이다.

6월 5일, 연변대학예술학원예술극장에서 최미선교수의 교수(教学)성과작품전이 개최되였다. 《옛 고(古) 올 래(来) 이끌 야(惹)》로 《옛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해온 감성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성을 이끌어낸다》는 의미를 담았던것이다.

미국 초청공연길에서.

일본초청공연길에서.

박용원스승이 창작한 춤사위《유향》의 절제되고 함축된 몸짓으로 민족의 고고하고 단아한 심성을, 결이 부드럽고 선이 길고 폭이 넓으면서 정성스러운 민족정서를《도라지》춤으로, 부드러운 정서와 엇박의 멋으로 인생을 영위하는 민족의 지혜를 《양산도》 춤가락으로 , 여성스러움과 강인함이 다분한 끈덕진 춤사위로 곡절많은 삶의 려정에서 너와 나 우리 모두 믿음과 사랑으로 아름다운 날들을 가꿔가려는 한 무용지성인의 소망을 핍진하게 그려냈다.

 

20대의 시절. 

《우리 춤의 절제됨은 최고의 미이며 매력으로서 이름할수 없는 묘미를 발산하며 폭발하는 열정과 의지로 창조하고 성취하는 민족성격특징을 펼쳐보이기도 합니다.》

 

성황을 이루었던 그 밤의 공연은 사람들에게 황홀한 감동과 함께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춤을 추는 박사님

몸의 움직임으로 춤을 추고 그 춤을 가르치는데 박사라니.

우선 박사공부까지 마치고보니 사람이 된  같았다고 한다. 어린 그때는 자신은 못하는 춤이 없고 완성 못할 춤동작이 없을것 같았으며 학교를 졸업하면 대단한 인물이 되는줄로 알았다.워낙 시골현성인 왕청에서 문화혁명후 첫기의 추천생으로 연변예술학원 무용반에 입학한 그는 무용에 빠져지냈다. 무용실에서 하루종일 보내다싶이 하는 그를 박용원선생은 몹시 총애하였다.

전국제7차녀성대표대회 대표로 북경에서.

1975년 졸업시 모두가 그를 학교에 남는줄로 알고있었지만 운명의 작간으로 그는 화룡문공단에 배치되여갔다. 바람과는 엇갈려나간 현실에서 스무살의 청춘은 《억울하여》 울었다. 하지만 박용원선생은 몇년후 그를 정식으로 연변예술학교 교단에 서도록 하였다.

박용원선생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어느 하루 그는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은 어찌하여 저를 무용교원으로 발탁시켜주신겁니까?》 소리없이 웃으시던 선생님은 잠시 침묵을 지키는가싶더니 입을 여시였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너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그다지 거창하지도 않은 대답이기에 저으기 김이 빠지기도 했지만 자신을 그토록 이뻐해주며 헌신적으로 가르치는 스승님인지라 그 가르침을 받들어 열심히 배우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박용원선생님이 창작한 《도라지》춤을 추면서《연변의 도라지꽃》으로, 《새장구춤의 대명사》로 불리웠고 선후로 전국제1차문예경연(1980년) 3등상, 연변자치주 30돐 문예경연 표현 1등상 등 전국 무용경연에서 보좌에 오르군 하였다.그 시기 그는 제8기길림성인대대표, 전국 제7차녀성대표대회 대표로도 당선되였으며 미국, 일본, 한국 등 국내외 초청공연장의 꽃으로 인기를 누렸다.

그러던 1993년 한국대전박람회에 참가하여 다종다양한 민족춤의 세계를 접하게 되면서 그는 우리 춤의 원형은 무엇이며 그 뿌리는 어디에 있을가 하는 관심을 갖게 된다. 하여 끝내는 류학의 길에 오르며 1998년경에는 한국세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2004년에는 명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냈다.

《거창하게는 〈뿌리찾기》를 떠난겁니다. 그러나 너무 힘들었지요. 주유소에 가서 90도 경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어조의 패턴으로 론문답변장에서 교수님들한테 퇴박을 맞고 눈뿌리 아프게 눈물을 참으면서 답변을 마쳤던 그 날들에 우울증에 걸려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가정까지 잃었구요…》

하지만 무용에 대한 애정 하나로 뜻한바를 이루고야마는 승벽으로 끝까지 박사공부를 해내고야말았다. 《박사공부도 필경은 기초공부였습니다. 무용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니 미학공부를 해야 했고 서양미학 동양미학을 배우면서 민족심미특성을 연구하게 되였고 따라서 그 민족의 사상과 추구, 지향을 읽게 되였습니다. 결국 그런것들이 쌓이고 쌓여 문화축적을 이루고 또 그것이 우러나 춤사위가 되고 작품의 여운이 되며 향기가 되는거였습니다. 그러는가운데서 소신을 갖게 되고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걷게 된거지요.》

《몸학》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민족에 따라 체형과 체질이 다름을 밝힌다. 우리 민족 녀성들의 이목구비가 동그스름하고 한복이 잘 어울리는 리유, 우리 춤의 형태와 가락은 왜 우리들의 심성을 즐겁게 하는지, 우리 춤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몸학으로 깨우치게 된 그때에야 박용원선생님이 말씀하시던 〈치마저고리 입은 네모습〉의 참뜻을 알게 되였다고 한다.

실패와 좌절과 시련을 겪으면서 근 10년이라는 세월동안 배움에 정진하였던 그 시점에서 민족과 사회와 인간과 사물 전체를 아우를수 있는 도량을 갖게 되였으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사는 법을 알게 되였다고 한다.

춤이 녹아 인생이 되고

《춤이 녹아 인생이 되고 인생이 녹아 춤이 되는 수필같은 인생을 사는것이 저희 꿈이였습니다.》

 

 
최미선교수는 자신의 교수성과작품전시무대를 마련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이룩한 성과중 일부 작품으로 교학종목(教学剧目) 쟝르를 구성하였다. 그의 창작으로 된 《토지》《비약》등 작품들은 현실사회에서 우리 민족이 안고있는 문제와 해법을 고민하게 하고 탈출과 해결의 방도를 고안하도록 촉구할뿐더러 리상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있었다.

 

《그토록 추상적이고 순간적인 무용을 너와 나가 마주하고 스스럼없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듯이 쉽게 접수하고 감동받을수 있도록 하는것이 내 춤의 목표였습니다. 이러기에는 무궁무진한 춤의 언어를 동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에 춤의 경지가 있는 법, 그런 경지의 춤을 추기까지에는 긴 시간이 걸렸고 많은 문화적인 축적이 안받침되여야 했습니다. 》

《최미선 교수성과작품전》을 펼치는 그 밤, 북경무용대학 교수들이 위챗으로 소식을 접하고 자비를 팔며 찾아왔다. 북경무용대학 객원교수였던 최미선교수는 초청강연시면 땀참봉이 되면서 학생들에게 조선족무용의 진수를 가르쳤다. 북경대학에서는 다년간의 교수과정에서 조선족무용은 기본동작묶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률동의 다양성을 통하여 민족특성을 구사할수 있는것이 《표현조합》임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표현조합》의 난도와 중요성을 잘 알고있는 교수들은 그 학과정을 완벽하고 구사하고있는 전시무대에 꽃다발을 아름아름씩 안아올렸다.

최미선교수의 교수성과작품전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며칠 뒤 또 전국 고등학교무용정품교수전시에 다시 추천되면서 거듭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것이다.

《어쩌면 이 무대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것 같기도 합니다.〈표현조합》자료는 지금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전국고등예술학교들에서도 절실히 필요한 자료입니다. 그리고 〈표현조합》은 또한 박용원선생이 우리앞에 남겨놓은 과제였습니다. 저의 무용삶에는 스승인 박용원선생의 영향이 아주 컸습니다. 그는 당시의 사범학교 졸업생이였고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5년간이나 연수를 받고 그 춤을 연변땅에 토착화시킨분입니다. 아주 지성의 춤을 추셨던분이지요. 평생을 그 어떤 매명이나 상술이나 권위주의를 모르고 오로지 춤 하나에만 삶전체를 바쳐온 그 진실과 인간다움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이번 기회를 빌어 은사님으로부터 사사받은 무용기예와 실천과정을 종합하여 노력과 성실이 들어간 저의 방식으로 하나의 하모니를 끌어내려고 시도하였을뿐입니다.》

인연으로 맺어온 무대를 고별하며.

그렇다고 뒤돌아보면 가슴 뿌듯한 성취감도 별로 느낄수 없고 별일도 아닌데 괜히 눈물만 흘러내리며 아쉬움만 남는게 인생이 아닌가싶기도 하다고, 그러나 누가 뭐라든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꿈을 좇아 40여년간 달려온 이자리에서 성품이나 인격을 떠나 그래도 참 믿을만한 무용교사였다는 느낌을 그 누군가가 받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고 영광스럽고 《행복한 교사생활을 했구나》 하는 안위를 받을것 같다고 한다.그것이 결국 박용원스승님의 바람이였고 또 자신이 원했던 《성실한 무용인》 의 삶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스승을 모르고 그 뜻을 이어가지 않으면 그건 곧 배신이며 근본을 모르고 오늘의 자신만 안다면 그건 완전 누어서 침뱉기라고 한다. 그는 나젊은 후배들에게 기술을 배우기전에 꼭 인간되기를 먼저 배우고 근본과 전통을 알고 계승할줄 알아야 한다고 석쉼한 육성으로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였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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