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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망 높고 후덕한 고급간부 전철수서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2월9일 14시58분    조회: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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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전철수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 (88)

대형계렬보도 《백년백인》평의위원회는 조선족의 우수한 지도자의 한분인 전철수동지를 100명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였다. 본사기자가 직접 취재를 다녀오지 못한 상황하에서 오늘 원 길림신문사 사장,《장백산》잡지사 사장인 남영전선생의 특별기고로 전철수동지의 한 단계의 업적을 보여주련다.

                                                     - 편집자로부터

 
 
2005년 11월 17일 길림신문사를 방문한 전철수/신승우기자 찍음

전철수 간력:

1952년 3월생, 길림성 룡정사람, 연구생학력.

현임 중앙통전부 부부장, 전국공상련 당조서기, 상무부주석, 중국빈곤구제사업(光彩事业)촉진회 부회장.

중공 제 15기, 16기, 17기 중공중앙 후보위원이며 제18기 중공중앙 위원, 제8기 전국인대 대표, 제 11기, 12기 전국정협 상무위원이다.

현임 중공중앙 위원이고 중공중앙통전부 부부장, 전국공상련합회 당조서기, 제1부주석 요직에 있는 전철수서기가 장춘을 떠난지 벌써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가 길림성당위 부서기로 있을 때 길림신문사와 조선족에 대한 크나큰 관심과 배려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동적이다.

2004년 10월의 어느날, 성당위 선전부 려흠문상무부부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잡지사(《장백산》잡지사)를 방문하려고 하는데 지점이 어딘가고 물었다. 나보다 2년우인 려부장은 문학평론가이다. 예전에 종종 함께 성작가활동에 참석하면서 그와 나는 비교적 가까이 지냈다. 후에 그는 성당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승진을 하였다.

그가 갑자기 나를 찾는데는 꼭 무슨 용건이 있는것 같아 내가 직접 부장의 사무실로 가겠다고 하니 그는 기어코 잡지사 사무실을 둘러보겠다고 하였다. 잡지사 사무실에 들어선 려부장은 《장백산》과 나의 창작생활을 문의한후 이번에 그가 온 뜻을 밝혔다. 길림신문사 사장 인선(人選) 때문에 나를 찾은것이다.

나는 난감함을 표했다. 첫째, 이제 3년이 좀 더 지나면 곧 퇴직할 나이. 둘째, 《장백산》(필자는 당시《장백산》잡지사 사장이였음) 하나만으로도 매일 바삐 도는 상황, 셋째, 나도 작가로서 창작계획이 있는데 또 하나의 번중한 짐을 걸머진다는것은 무리가 아닌가? 려부장은 실정을 토로했다. 당신이 원치 않는다는것을 선전부에서도 알고있기에 여러모로 사람을 물색해보았지만 적당한 인선이 없다는것, 신문사직원들은 당신이 사장직을 겸해줄것을 련명으로 선전부에 제출했다는것, 그리고 전철수서기도 당신이 신문사사장직을 겸하는것을 중시하고있다고 하였다.

전철수서기란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성당위 주요지도자가 조선족신문을 위하여 조선족일군에게 기대를 한다는데 내가 내 일만 내 일이라고 고집해서는 안되지.이리하여 나는 려부장께 이런 태도표시를 하였다. 현재 신문사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 만약 내가 신문사사장직을 겸한다면 성당위에서 신문사의 난제해결에 성원을 줄것을 바랐다. 려부장은 날보고 안심하라고 하였다.

2005년 4월 6일, 나는 정식으로 신문사 사장직을 겸하였다. 정작 신문사에 몸을 담그고보니 신문사의 어려움은 나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였다. 고마웠던것은 사회각계 인사들의 성원으로 우리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수 있었고 신문사 전체 직원들의 열성이 높았기에 우리는 독자들의 환영을 받는 신문을 꾸리기 위해 신문개혁의 일련의 일들에 착수할수 있었다.

2005년 11월 17일 길림신문사를 방문하여 남영전사장(오른쪽 세번째)의 안내를 받는 전철수(왼쪽 두번째)  /신승우기자 찍음  

그해 11월 17일, 이날은 길림신문사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중요한 날이였다.

이날 오전 8시 30분, 전철수서기는 길림신문사를 고찰하였다. 그를 안내한분들은 성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 부장인 마준청, 성당위 선전부 신문출판담당 부부장 림군, 성재정청 문교담당 부청장 마명, 길림일보신문그룹 사장 장력화, 총편집 필정 등 5명이였다. 전철수서기의 뜻이 뚜렷함을 나는 느꼈다. 우리 신문과 관계되는 중요한 관원들을 모두 령솔하여 현지에서 조사연구(調硏)를 한다는것은 우리들을 힘껏 밀어주기 위함이였다.

신문사 전체 직원들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나는 전철수서기일행에게 그동안 신문사가 해온 두가지 일을 먼저 회보하였다. 하나는 길림성당위가 중시하는 성급 조선말언론매체인 《길림신문》을 길림성의 개혁개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는 신문으로 만들기 위한 몇가지 신문개혁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장춘공항벌금사건추적보도상황이였다.

그해 년초 한국법무부는 한국불법체류 중국조선족로무자들에게 우대정책을 실시하여 5년미만인 불법체류자는 반년후 다시 한국으로 입국, 5년이상의 불법체류자는 1년후 다시 한국에 입국하라는 비자를 주어 귀국하게 하였다. 혜택을 받은 조선족로무자들은 3월부터 대량 귀국하기 시작했다. 장춘공항은 이런 조선족들에게 일인당 5000원씩 벌금을 안겼다.

그해 6월, 벌금을 당한 조선족들은 신문사를 찾아 장춘공항의 혹독한 벌금사건을 피로하였다. 벌금집행자들은 돈을 챙기는것이 목적이였기에 즉석에서 돈을 내는 사람들은 인차 풀려나왔고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봉고차에 실려 구류소에 끌려가 언제까지라도 친척들이 돈을 가져와야 사람이 풀려나올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구류소로 끌려가는 도중에 친척들이 돈을 가져와서 다행이 구류소신세를 면했다고 한다.

장춘공항의 벌금소식을 들은 길림성사람들은 벌금을 피해 심양, 대련, 할빈, 청도, 천진, 북경, 심지어 상해, 광주 공항을 통해 입국했기에 고생이 많았다고 하였다. 전국적으로 벌금하는 공항은 장춘뿐이라면서 신문사가 나서서 이 일을 바로잡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신중하고 신속히 대응해야 할 사항이였기에 우리는 여러명의 변호사들을 요청하여 련속 세차례의 변호사자문회의를 가졌다. 관련문건을 면밀히 연구하고 검토한 결과 최종결론을 얻었다. 장춘공항의 벌금사건은 집법자들의 위법행위인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장춘공항벌금사건을 신문지면에 련속 보도하였고 《내부참고》(內參)문건을 작성하여 해당 상급기관에 올려보냈다.

장춘공항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승인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자신들의 특수신분으로 우리의 담당기자에게 위협,공갈의 전화를 걸어왔다. 담당기자를 협조해나선 변호사는 겁을 먹고 줄행랑을 놓았고 담당기자는 눈물이 글썽해서 나를 찾았다. 나는 담당기자에게 이 일은 사장이 시킨 일이기에 그들더러 할 말이 있으면 사장을 직접 찾으라고 하였다.

며칠후 사건의 관련 관원은 비서를 데리고 나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우리의 《내부참고》문건을 펼치면서 자기들의 정당한 집법행위를 신문사측에서 간섭한다는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 말을 먼저 들어본다음 말하라고 하였다. 첫째, 집법자가 벌금임무를 수행할 때 공식적인 벌금통지서가 있어야 하고 어느 조례에 근거하여 얼마를 벌금한다는것이 명확해야 한다. 둘째, 피벌금자는 벌금통지서를 읽고 동의한다는 싸인을 하여야 한다. 셋째, 벌금한 금액은 모두 국고에 들어가야 한다. 당신들의 소행은 이 세가지 규정조례에 부합되는가?

그는 그만 말문이 닫혔다. 나는 신문사의 태도를 표명했다. 당신들의 소행은 위법이란것을 부인할수 없다. 문제는 엄중하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잡을 생각은 없다. 즉시 벌금행위 중단, 그리고 피벌금자들에게 돈을 반환하는것이 우리의 요구사항이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들의 소행을 당신들의 상급검찰기관에 반영하는것이 신문사의 책임이고 임무이다. 어느쪽을 선택하는가는 당신들에게 달렸다. 3일안으로 확답을 주어야 한다.

위풍이 당당하게 들어섰던 두사람은 그만 풀이 죽어 돌아갔다. 그후 3일만에 관련기관은 기자회견을 갖고 자기들의 착오를 승인하였고, 즉시 벌금중지, 그리고 피벌금자에게 금액을 반환할것을 승낙했으며 신문사는 자기들의 실행을 감독해줄것을 요구한다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그때까지 장춘공항에서 벌금을 당한 사람은 600여명, 벌금금액은 300만원을 넘겼다고 한다. 그후 장춘공항은 자기들의 승낙을 실행하였고 벌금돈을 받아간 조선족들은 신문사에 감사하다는 글발이 새겨진 기발을 들고 와서 소식을 알렸다.

  《길림신문》 창간 20주년, 《장백산》 창간 25주년 기념좌담회에 참가한 전철수(앞줄 중간).

전철수서기는 장춘공항벌금사건회보를 듣고 사뭇 격동된 어조로 이런 말을 하였다. 공항벌금사건이 발생한줄은 몰랐다. 격분할 일이다. 조선족농민들은 국외로무를 위해 높은 리자로 보통 5∼6만원, 심지어 10여만원의 빚을 지거나 집을 저당하고 외국으로 나간다. 그들은 외국에서 고생하면서 돈을 버는데 해당 부문은 리해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대신에 벌금을 안겼다니 한심한 일이 아닌가? 농민들의 애로를 이야기할 때 전철수서기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를 배동한 기타 지도자들도 감촉이 컸을것이다.

전철수서기는 나더러 이제는 신문사의 곤난을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신문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신문사의 어려움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하였다. 신문사는 성재정차액지원단위, 28명의 직원에 매년 고정경비 72만원, 매달 평균 6만으로 28명 직원의 기본로임을 지불하고나면 일전도 남지 않는 상황, 때문에 다년간 직원들은 해빛로임, 의료보험, 개인난방비가 없었고 신문사청사는 전기시설이 로화되여 수시로 화재의 위험을 안고있었으며 난방시설은 녹이 쓸고 막혀 겨울에는 솜외투를 입고도 추워서 일을 못하는 형편, 나젊은 기자들은 신문사의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뿔뿔이 신문사를 떠난 상황. 다행인것은 사회각계 인사들의 성원으로 전기시설, 난방시설은 개선이 되였고 신문은 개혁에 들어섰지만 신문사의 재정은 언론사중 찾아볼수 없는 극빈호라고 말하였다.

전철수서기는 나의 재정상황회보를 조목조목 기록하였고 나의 회보가 끝난 다음 그는 정식으로 연설하였다. 우리를 또 감탄하게 한것은 전철수서기는 길림신문사를 밀어주기 위하여 사전에 경제조건이 우월한 타성의 조선문신문사 재정상황에 대하여 상세한 료해를 하였던것이다. 그는 우리들이 해온 일을 충분히 긍정하면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는 신문사가 이토록 어려워서야 말이 되겠는가? 신문사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아무래도 재정체제를 바꾸어야 할것같다고 제기하였다.

전철수서기의 말을 받아 재정청 부청장 마명은 길림신문사의 어려움은 성재정에서 해마다 100만원씩 림시보조를 해준다 해도 근본문제를 해결할수 없기에 길림신문사를 반드시 재정전액지원단위로 만들어야 한다고 태도표시를 하였다. 선전부 부장 마준청, 부부장 림군 등 모두가 동감이였다. 전철수서기는 재정전액지원단위로 바꾸는 일은 마준청부장이 책임지고 락착하는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마준청부장은 흔쾌히 접수하였다.

전철수서기는 또 신문사 재정난의 조목을 하나하나 라렬하면서 성재정이 년말 림시보조를 110만원쯤 해결해줄것을 마명에게 부탁하였다. 전철수서기는 또 올해는 《길림신문》창간 20주년, 《장백산》창간 25주년인데 집안이 아무리 어려워도 생일은 쇠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자기도 기념회의에 참석하고 연설을 할것이며 여기 온 여러분들도 다 참석을 할것이라고 하였다.

전철수서기의 고찰활동은 오전 11시까지 진행되였다. 전철수서기와 그의 일행을 전송하면서 우리는 곧 도래될 신문사의 새 희망으로 하여 가슴이 설레이였다.

그후 전철수서기의 지시로 성재정청의 관계일군은 신문사에 와서 전액경제지원준비를 위한 재정상황을 료해하였으며 년말보조금 80만원을 먼저 주고 나머지 30만원은 다음해에 전달하기로 하였다.

마준청은 성당위 회의실에서 성편제위원회 주임, 길림일보사 사장 그리고 내가 참석한 회의를 열고 전철수서기의 지시에 좇아 길림신문사를 재정전액지원단위로 바꾸는 절차문제를 토의하고 신속히 락착할것을 강조하였다.

《길림신문》창간 20주년 기념좌담회가 끝난후 전철수(앞줄 오른쪽 7번째)는 본사 임직원들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해 12월 24일 오전,《길림신문》창간 20주년,《장백산》창간 25주년 기념좌담회가 성당위 청사옆의 송원호텔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기념좌담회는 관례를 타파한 특수한 행사였다. 회의에 참석한 관계부문의 책임자와 각계의 대표인사  20여명은 모두 전철수서기가 직접 지명한 인물이고 회의실 설계, 좌석배치, 회의통지, 손님영접 등 회의의 모든 준비사항은 성당위 판공청 비서처 분들이 직접 맡아나섰다. 우리 직원들은 회의에 참석만 하면 되였다.

그날 회의 사회자는 길림일보신문그룹 총편집 필정이였고 나는 사업보고를 하였다. 그다음 길림일보신문그룹 장력화사장, 성신문출판국 주동국장, 성민족사무위원회 강광자주임, 성작가협회 양정옥주석 등 책임자와 각계인사 대표들이 발언을 하였다.

전철수서기는 연설에서 《길림신문》과 《장백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금후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각 부문 책임자들의 성원과 지지를 강조했고 성재정의 특수한 보살핌을 부탁했다. 이번 회의는 명분이 신문사, 잡지사 행사이지 실상은 성당위에서 소집한 고규격, 고품위의 회의였다. 아마 신문사, 잡지사의 력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행사일것이다. 전철수서기가 손수 이렇게 안배한것은 《길림신문》과 《장백산》의 사회위상을 올리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함이란것을 우리는 잘 알고있었다.

기념회의가 있은 일주일후는 2006년 양력설이였다. 이날부터 길림신문사는 성재정전액지원단위로 되였다. 당해의 성재정지원은 72만원으로부터 배로 뛰여올라 156만원, 2007년엔 200여만원, 한해에 50여만원의 상승세였다. 누구나 다 알다싶이 재정차액지원사업단위가 재정전액지원사업단위로 변신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전철수서기와 같은 지도자가 계시고 그의 높은 위망과 강한 추진력이 있었기에 안되는 일이 현실로 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성당위와 성정부 판공청은 련합문건으로 《길림신문》은 길림성 성급조선문당보라고 규명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 모든 일은 꿈만 같다.

전철수서기가 길림신문사와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2006년 봄, 장춘의 한 조선족 퇴직로교원이 신문사를 찾았다. 그의 남편은 전국모범교원칭호를 받은 퇴직로교원, 다년간 엄중한 간병으로 공비의료약은 효험을 보지 못해 해당되는 약을 쓰다보니 4만원의 빚을 져서 지금은 더 약을 쓰기는커녕 생활도 유지하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하였다. 료해한 결과 그의 상황은 실정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내부참고》문건을 만들어 직접 전철수서기에게 반영하였다. 그후 얼마 안되여 그 로교원은 다시 신문사를 찾았다. 전철수서기가 성교육청에 지시를 했기에 성교육청과 장춘시교육국에서 자기네의 어려움을 원만히 해결해주었다고 전철수서기께 감사함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2005년 4월, 내가 신문사에 발을 들여놓고 신문사의 어려움때문에 골치를 앓고있을 때, 성로동보장청 신봉철청장은 설중송탄(雪中送炭)으로 지원금 20만원을 보내와 큰 도움이 되였다. 2006년에도 그는 계속 신문사를 지원하려고 하는데 지도부내에서 입을 열기가 좀 딱했다. 하여 신청장은 전서기께 편지를 올렸다. 전서기는 이 일을 고맙게 생각하고 성로동보장청을 주관하는 부성장 리빈에게 《길림신문》은 조선족의 창업취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는데 당분간 어려움이 있기에 로동보장청에서 관심하고 지지할것을 부탁했었다.하여 그해 신청장은 또 신문사에 지원금 20만원을 보냈고, 그 몇년사이에 신문사와 잡지사에 도합 140만원의 자금을 보내주어 우리에게 큰힘을 실어주었다.

그해 가을의 어느날, 전철수서기는 나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었다. 그는 나보고 승용차를 꼭 가지고싶은가고 물었다. 전철수서기는 지난해 신문사를 고찰할 때 내가 회보한 일을 기억하고있었다. 신문사는 만신창이 되여 페기처분해야 할 승용차 한대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 차를 끌고 공항에 손님마중을 갔다가 돌아오는도중에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크게 놀랐지만 다행히도 사고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한적이 있었다.

전화를 받고난 나는 너무 반가와 승용차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전철수서기는 나더러 속히 보고서를 올리라고 하였다. 며칠후 그에게서 소식이 왔다. 기관사무관리국 왕국장에게 말해놓았는데 그와 련락을 하라면서 왕국장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내가 왕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열정적으로 지도자의 지시가 있었다면서 차는 며칠후 인차 해결될것이니 소식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며칠후 홍기표 새 승용차 한대가 신문사에 미끄러져왔다.

2005년 11월 17일부터 2006년 11월 중순까지 일년이란 짧디짧은 기간내에 전철수서기는 길림신문사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길림신문사는 력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이하게 되였다.

전철수서기는 14년동안 길림성 부성장, 길림성당위 부서기를 력임하면서 민족교육에 대한 기여가 크다. 내가 아는것만 해도 그는 매하구시조선족중학교, 통화시조선족중학교, 길림시조선족중학교, 서란시조선족중학교, 영길현 차로하조선족중심소학교, 장춘시조선족중학교 등 많은 민족학교에 지원금 200만원을 전달하였다. 그때 이 돈은 큰 돈이였기에 각 학교에서는 허다한 문제들을 해결할수 있었다.

전철수서기는 또 연변대학 캠퍼스건설에 국가의 지원금 3000만원을 쟁취해주었다. 전철수서기는 또 2004년 유수시 연화조선족향의 농가를 일일이 돌아보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향위생원의 건설자금과 엑스레이(ⅹ光线)의료설비 등을 해결해주었고 또 1000만원의 전용자금을 내려보내 60년동안 품어오던 연청땜(延靑攔河壩)건설꿈을 이루게 하여 조선족향과 한족향의 수전농사에 물이 부족한 난제를 풀어주었다.

전철수서기는 14년동안, 자신의 후덕(厚德)한 인품, 높은 리론수준, 뛰여난 창의력과 추진력으로 길림성의 외사, 대외무역, 신문출판, 문화교육위생 등 각 관할분야 간부들의 존중을 받았고 위망이 높았다. 때문에 길림성의 기관간부들은 그가 더 잘 되기를 바랐다. 2006년 11월말, 그는 전국공상련합회 당조 서기(정부장급)로 임명받았다. 모두들 그의 승진을 축하하는 한편 또 아쉬움을 금치못했다.

12월 8일 오전 10시 30분, 그는 항공편으로 북경으로 떠나야 했다. 그날 아침 길림성당위 청사 앞마당에는 성당위기관과 성정부기관의 모든 간부들이 그를 환송하느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부 성급 로간부들과 각계의 인사 100여명이 공항까지 나가 그와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송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그 장면은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고 고급촬영기자 신승우는 그 감동적인 장면을 연신 카메라에 담느라 분망하게 뛰여다녔다. 이러한 장면은 길림성의 력사에서 찾아볼수 없는 사례이다.

그후 연변의 중국소년보사 사장 한석윤선생이 북경에 갔을 때 전철수서기를 만나뵌 장소에서 전철수서기는 우리들에게 안부를 전하라고 부탁하면서 자기가 장춘에 좀 더 있었더라면 길림신문사를 위해 좀 더 많은 일을 해줬을텐데 그러지 못한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우리들의 심금을 또 한번 울려주는 대목이다.

/ 남영전 2014년 12월 4일 장춘에서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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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쿠밥솥 중국에 정착한다 이영한총경리: 《청도에 발판 마련 다음역은 동북》이라고 밥솥 하면 한국에서 소비자 지명도가 99%에 달하는 유명브랜드 쿠쿠(CUCKOO), 한국에서 년간생산량이 280만대로 시장 점유률이 65%, 세계 30여개 나라에 수출되는 쿠쿠밥솥. 이 쿠쿠밥솥이 중국에 정착하고있다. 한국 쿠쿠전자가 중국대륙...
  • 2005-10-07
  • [원제:춘천마라톤 누가 먼저 손 치켜들까] [조선일보 김왕근 기자] 국가대표 제인모냐, 조선족 정운산이냐. 아니면 제3의 선수냐. 5일 등록이 마감되면서 제59회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엘리트부문 레이스의 윤곽이 드러났다. 1999년과 2002년 춘천마라톤에서 우승한 제인모(29·국민체육진흥공단)는 우승 상금 3000만원이 걸려...
  • 2005-10-06
  • (서울=연합뉴스) [美법원 보호관찰 집행정지…조만간 고국 방문 김씨 "끝까지 포기 안한 건 국민 성원 때문"] (서울=연합뉴스) 조성현 기자 = 미국에서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수감됐다 풀려난 뒤 보호관찰을 받아온 로버트 김(64ㆍ한국명 김채곤)이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로버트 김은 5일 연합뉴스와 가진 국제통화에서...
  • 2005-10-05
  • 미국의 로이 글라우버 교수와 존 홀 교수, 독일의 테오도어 헨슈 교수 등 3명이 올해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4일 오전(현지시간) 레 이저에서 나오는 빛의 입자(광자)가 동일한 주파수와 속도, 방향으로 움직임을 반복한다는 것을 밝힌 글라우버와 레...
  • 200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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