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복 간력
1945년 2월, 길림성 돈화 출생
1965년 8월, 사업에 참가
1966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돈화현계획위원회 과원(科员), 돈화현당위 조직부 간부 력임
길림농업대학 졸업, 경제관리 전공, 석사연구생 학력
돈화현 돈화진당위 부서기, 돈화현 사하교공사 당위서기, 돈화현당위 농공부 부부장, 돈화시 부시장, 돈화시당위 부서기, 안도현 현장 력임.
1991년 6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 1996년 5월, 연변주당위 부서기, 1997년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력임
2003년 1월, 길림성제10기인대 상무위 비서장, 당조 성원, 2005년 1월 29일부터 2008년 7월까지 길림성인대 부주임 력임.
1990년대 초반, 남상복의 이름은 온 연변에 자자했다. 이는 그가 연변주 부주장으로 있으면서 두만강지역 개발초기 연변의 대외경제를 크게 발전시킨것과 관련되거니와 더우기 인생의 관건적인 시각에 고통을 겪으며 큰 소용돌이에 휩싸인적이 있기 때문이다.
《시련을 통해 나는 교훈과 경험을 쌓았으며 그후 더 지혜롭게 사업을 전개할수 있었다.》고 남상복은 담담하게 말한다.
연변에서 태여나 농민의 아들에서 안도현 현장, 연변주 부주장, 주장으로 있으면서 남상복은 원견성이 있게 또 대담하게 더우기는 실제적인 일을 해놓으며 활약을 펼쳐 호평을 받았다.
그는 연변에서 기초건설을 통해 크게 인정을 받았으며 경제발전의 모식을 조정하여 연변의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며 직업생애에 력력한 발자국을 남기였다.
남상복은 연변의 향진에서 10년, 현에서 10년, 주에서 12년 사업한후 길림성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 직에 부임했다가 지금은 퇴직하고 장춘에서 안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여생을 보내고있다.
일전 기자는 남상복(69세)을 만나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수한 평상복차림에 편안한 신발을 신고 나온 그는 취재하는 두시간 반동안 기자의 물음에 온화하고 솔직하고 명쾌히 답복하면서 지난 인생려정을 되새겼다.
향에서 10년, 현에서 10년... 종합실천경험 쌓다
원래 명월진에 소재해있던 안도현정부는 명월진과 멀리 떨어진 송강진으로 옮겨갔었다. 안도현 북부에 있는 송강진은 남부에 있는 명월진보다 교통이 엄청 불편했다.
하여 현정부를 다시 명월진으로 옮겨왔는데 그 사이 명월진 거리는 말이 아니였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가 없이는 못살 정도》였다.
안도현 현장으로 사업하는 기간에 남상복은 종합적으로 계획하여 여러가지 큰 압력을 이겨내고 간고한 분투를 거쳐 끝내 명월진을 현성으로 변모시켰다. 그동안 도로공정, 수도물공정, 배수공정건설에 밤낮을 이어가며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고 신화를 이루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남상복은 《명월진을 종합계획하고 새로 개조할수 있었던것은 향진에서 10년, 현에서 사업하면서 정부 여러 부문의 사업기능을 환히 알고 또 그것을 한데 꿔맬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명월진 개조는 총 7-8년이란 시간이 들었다. 남상복이 주정부로 전근해 간지 얼마 안되여 명월진 도로건설 개통식이 있었다. 이날 안도현정부에서는 남상복부주장을 초청했건만 그는 사양했다. 백성들은《제일 수고를 많이 한 남현장을 다시 만나고싶다》며 그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을 표했다.
연변 개혁개방 위해 하늘길 열다
개혁개방전 연변은 《목이 조인 주머니》로 불리웠다. 교통이 페쇄되고 정보가 페쇄됐다. 인적교류, 정부교류를 위해서라도 하늘길을 열어야 했다.
연길공항 개조확장건설 총지휘자에 남상복이 적임자였다. 1991년 6월, 남상복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승진하여 연변의 대내외 경제 관련 업무를 주관하며 연길공항건설 총지휘직을 맡는다.
남상복은 《주당위의 공항건설 결책이 정확하다》며 사업에 집착을 보였다. 연길공항을 건설할 때 주정부에는 자금이 700만원밖에 안되였다. 그러나 실지 수요되는 건설자금은 3억여원이란 천문학적 수자에 이르렀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남상복은 총지휘로 책임을 맡은 이상 《앞에 가시밭길이라 해도 끝까지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국가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불편한 북경행을 하였다. 북경으로 기차를 타고 가자면20여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5-6년사이에 북경을 60-70차나 달려갔다.
덕분에 국가와 성 해당 부문 령도들의 리해와 관심, 지지를 받아내여 원래 건설순위가 100자리에 머물러있던 연길비행장건설 차례를 일곱번째 순위로 앞당겨 먼저 건설할수 있도록 시간을 쟁취하였으며 자금을 수차 조달받아 끝끝내 1993년에 연길 하늘길을 시험적으로 열어제끼는데 성공한다.
《그때 만약 연길공항을 개조하지 않았더라면 그 구석진 곳을 찾는 투자자들과 방문객이 드물었을것이고 연변의 자원개발과 대외경제무역의 개발개방은 없었을것이다. 연변의 신속한 경제발전속도는 주당위의 연길공항 개조결책과 갈라놓을수 없다.》
연길공항이 개조된후 대중형 비행기가 리착륙할수 있게 되였는데 이는 연변의 대외 형상, 국내형상에 직접 관계되였으며 두만강하류지역의 개발개방과 연변의 개발개방에 활기를 뿜어주었다.
연길공항외에도 그는 연변의 고속도로건설, 에너지와 통신건설, 대외통로건설을 위해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연변의 경제발전모식을 바꾸어놓다
중조로 3국 접경지대에 위치한 연변은 주변 국가들이 대외경제무역을 실행하면서 대외경제발전의 가치가 아주 컸다. 게다가 삼림자원과 광산자원이 풍부하고 특히 장백산의 천지자연보호구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외향성 경제를 발전시킬수 있는 여건이 충족하였다.
《대외경제무역을 발전시키는 길만이 연변을 부강에로 이끄는 출로이다. 그외엔 다른 뽀족한 길이 아직 안보인다.》
남상복은 로무경제와 대외경제를 발전시키고 변경무역과 개체경제를 발전시키는데 모를 박으며 연변의 경제발전모식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량식생산이 위주가 아닌 연변과 같은 산간지대에서, 도시인구는 보다 많은 상황에서 농촌의 잉여로동력을 국외로 눈을 돌리게 하는것은 자못 정확했다.
《진정한 개혁개방은 공항건설, 도로건설, 통로건설이 아니라 인민들의 개혁개방의식이다.》. 남상복은 《농민, 도시직원, 당정기관의 간부를 포함한 매 공민이 사상의식면에서 연변개방의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부주장으로 부임된지 1년이 되던 1992년 5월, 그는 《전 주 개체경제 발전 사업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그는 돈화시 부서기로 있을 때 관련 인원들을 이끌고 강소, 절강을 고찰한 경험을 실례로 들면서 연변의 실정에 결부하여 개체경제와 변경무역, 대외무역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회의의 목적은 연변의 경제모식을 조정하여 연변의 경제를 대폭적으로 발전시키자는것이였다. 회의는 연변인민들의 강한 호응을 받았다. 그후 그는 규모가 큰 회의와 작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간부들과 군중들에게 《시야를 대도시로, 대외에 돌려 대외무역, 변경무역, 개체경제, 민영경제를 발전시킬것》을 바랐다.
《연길 - 북방의 소향항(小香港)》으로 불려지다
남상복의 지도와 호소하에 도시와 농촌의 개혁개방력도는 특별히 컸다. 1990년대초 연변의 로무송출비률은 이미 3%에 달했다. 남상복은《그때 연변의 개혁개방의식은 주로 출국로무자들이 이끌었다》고 말한다.
로무송출로 통해 로무자들은 외국의 선진적인 기술과 관리경험을 배워왔며 외화를 벌어들이고 항목을 끌어들였다. 이는 그들의 관념을 바꿔주었으며 선진적인 사유방식과 방법을 더 많이 터득하게 했다.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던 1992년 연변의 도시화수준은 이미 55%이상에 달했다. 남상복은 1993년에 발부한 국무원 33호 문건인 《변경무역과 물물교환을 발전시킬데 관한 문건》을 활용하여 변경무역을 활성화시켰다. 그해 연변의 대 조선무역은 력사적으로 최고치를 이룬 4억 3천만딸라를 넘었으며 대 로씨야와의 무역도 1억3천여만딸라에 달했다.
연변의 경기 호황은 특히 연길시에서 전례없는 성황을 보였다. 택시가 전국 현급 중등도시와 연해도시중 1위를 차지했으며 연길서시장은 동북3성 의류잡화집산지 가운데 하나로 우뚝 일떠섰다. 밤마다 100개 정도의 가라오케 영업소는 밤가는줄 몰랐으며 백산호텔은 날마다 파티와 축제로 흥성거렸다.
연길시는 어느새 《휘황찬란》한 신흥도시로 발돋움하였으며 《북방의 소향항(北方小香港)》으로 불리였다. 중앙TV방송를 비롯한 국내외 유명 매체의 시선과 조명도 이곳을 향했다.
조선족사회 발전에 깊은 관심을
남상복은 재직시 한국방문시에도 조선족로무자들을 한데 모여놓고 수시로 간담회를 하는 등 조선족 가정과 사회 문제과 교육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돌렸다.
퇴직후에도 그는 조선족 농민들이 토지를 황페화시키는 현상, 도시에서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지 않는 현상, 조선족총각들의 장가 가기 힘든 등 조선족 현황에 대해 잘 알고있었으며 조선족중소학교발전, 조선족향촌발전에 대해 몸소 관심과 지지를 주기도 했다.
그는 《조선족들이 가정을 파탄시키지 말고 잘 경영하여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교육민족으로 거듭나고 우리 민족이 언어우세와 인맥관계 우세를 잘 활용하여 개인경제와 민족경제를 튼튼히 발전시키기 바란다.》고 말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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