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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와 선택, 그리고 풍부한 삶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12월28일 23시22분    조회:8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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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정만흥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정만흥 명예회장

 -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정만흥 명예회장 인터뷰

우리는 살면서 무한한 기회와 부딪치게 되고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기회는 사람들에게 모두 평등하게 차례지지만 선택은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 선택의 결과 혹자는 탄탄대로 혹자는 가시덤불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 성공이거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대련정흥석유화학유한회사 정만흥 회장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기회와 선택의 난제를 풀어가고 있다.

정만흥 회장이 경영하고 있는 석유화학회사는 중국 동종의 회사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회사이다. 특히 아로마일 공급은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 중국석유화학공업그룹에 이어 제3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대련의 조선족기업가협회 설립과 운영에서 선두주자로 나서고 있으며 현지의 조선족사회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선택에 있어서 기준이 중요하지요. 저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에 초점을 둡니다."

정만흥 회장은 이렇게 그의 선택의 해법을 말한다.

애초 굴지의 출판사 편집인으로부터 오늘날 업계에서 인정받는 기업인으로 우뚝 서기까지 하나하나의 기회와 선택으로 이어진 그의 여정을 찾아가본다.

책, "내"가 선택한 세계

어릴 때의 정만흥 회장의 세계는 말 그대로 책의 세계였다. 정치간부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았다면 누군가는 혹여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부친은 늘 저작이며 이론저서를 보물처럼 손에 들고 놓지 않았다고 한다. 정만흥 회장도 어렸을 때 그런 부친을 본받아 고사리 손에 곧잘 책을 들었다.

훗날 지식청년으로 되어 농촌에 있는 동안 그는 밭이랑을 타면서 진짜 그만의 책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시골의 따분한 일상은 그를 더욱 미지의 책의 세계에로 이끌었다.

정만흥 회장은 "수호전"을 읽으면서 "양산협객"의 의협심에 함께 주먹을 불끈 쥐었고, "삼국연의"를 읽으면서 천하를 주름잡는 영웅들의 패기에 박수를 보냈다. 이런 책의 세계가 훗날 정만흥 회장의 프로필에 내처 굵직한 선을 긋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중국정부가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한 후 정만흥 회장은 길림농업대학에 입학하여 이공과를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연변인민출판사에 배치되었다. 책의 세계에서 자란 그에게 출판사업무는 결코 낯선 분야가 아니었다.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출판사에서 자기의 재능을 한껏 펼 수 있었다. 나중에 편집실주임으로 근무하다가 출판사 사장 후임자로 내정되기에 이른다.

이때 정치학습의 기회가 나타났다. 사장후임자가 거쳐야 할 필수의 코스였다. 그러나 이공계인 그에게 정치학습은 생소한 분야로 기회이자 도전으로 나서고 있었다.

"정치에 입문하려면 먼저 정치를 학문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치학과의 석사수료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이 선택은 정만흥 회장에게 동북3성당학교 정당건설학 대학원 수강생이라는 낯선 신분을 얹어준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 "나"의 필연적 선택

수료를 마칠 무렵인 1990년대 초반, 중국은 개혁과 개방의 새로운 열풍이 불고 있었다. 시대적 조류의 변화는 정만흥 회장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정만흥 회장은 시골바닥을 떠나 하루빨리 그 열풍에 탑승하고 싶었다.

이때 고향 연변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련이 그의 시선에 떠올랐다. 대련은 남쪽으로 한국, 북쪽으로 조선과 잇닿으며 바다를 이웃하고 일본과 마주하고 있다. 그런 독특한 지리위치 때문에 동북의 개방의 전연기지로 되고 있었다.

정만흥 회장은 대련시 개발구외자유치국에 신청서를 넣었다. 이때 면접관은 단 일주일내로 "한국경제의 어제와 오늘, 내일"에 관한 견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이튿날, 정만흥 회장은 밤새껏 정서한 1만여자의 글을 면접관의 사무상에 올려놓는다. 면접관은 하루 동안 맨손으로 베끼기도 버거운 그 작업물에 혀를 내두르더라고 한다. 물론 정만흥 회장은 쉽게 시험의 관문을 통과하고 공무원으로 되었다.

"출판사에서 근무하면서 글을 많이 다뤘던 경험이 큰 도움으로 되었습니다."

기회는 선택하는 사람의 갈고 닦은 재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 준비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기업참관행사

"나"의 창업기준: 익숙한 방향보다는 필요한 방향으로

얼마 후 정부가 공무원들의 하해(下海)를 적극적으로 격려하는 정책이 출범되었다. 정만흥 회장은 또 한 번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정만흥은 숙고 끝에 "철밥통"을 버리고 하해를 결심했다. 그게 바로 대련에 올 때 품었던 초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1994년 대련정흥국제무역회사가 대련에서 고고성을 터뜨린다. 이 회사는 아로마오일, 방직품, 전기기계제품, 화학공업제품, 농산물수출입을 위주로 하는 종합무역회사였다. 중국과 조선,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대련의 지리적 우세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타산이었다.

"기회의 선택에서 익숙한 방향보다는 필요한 방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정만흥 회장은 그의 선택의 기준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

초창기의 회사가 수출하는 냅킨은 한국시장의 80%를 점유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 시기 정만흥 회장은 조선에 공장 7개를 임대해 냅킨을 가공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방문

기실 조선과의 특이한 인연은 정만흥 회장의 책의 세계에서 맺어진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정만흥 회장은 인맥관계를 통해 어렵게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게 된다. 그는 이때 비로소 조선의 근현대사와 현황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을 나뿐만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만흥 회장은 나중에 조선측으로부터 회고록의 번역판권을 받아서 번역에 뛰어들었다. 정부 공무원으로 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회사를 꾸린 후에도 여가시간을 반납해서 완역을 했다. 그는 이 노고 때문에 조선 정부측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

정만흥 회장은 회고록을 번역하면서 조선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고 또 그 인연 때문에 업무적으로 조선측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공업은 날로 세분화되고 있었다. 정만흥 회장의 회사도 어느 시점에 부득불 기업의 전환이라는 위기를 맞았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였다.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는 것은 기회를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지요."

이공과와 사회학과를 전공하면서 키워온 깊고 폭넓은 사고방식 그리고 출판사에서 기른 깐깐한 습관은 정만흥 회장의 사업아이템 선정에서 빛을 발했다. 정만흥 회장은 지속적이고 시장잠재력이 있는 아이템이 무엇일가 신중하게 고민했고 최종적으로 에너지제품이 적격이라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2004년부터 에너지제품 경영을 전문 배우면서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연간 왁스 유통량은 400만 톤이었고, 중국의 수요량은 140만 톤이었다. 정만흥 회장은 왁스의 수입과 수출을 동시진행하면서 고급과 저급수준의 왁스를 수입하고 중급수준의 왁스를 수출하는 무역방식을 취했다. 회사는 점차 경영품목을 확대 , 왁스 외에도 윤활기유, 고무가공유, 파라핀, 천연고무 등 석유화학제품을 경영하였다.

현재 정만흥 회장이 경영하는 대련정흥석유화학유한회사는 세계 23개 나라, 지역과 석유제품무역을 진행, 연간 무역액이 인민폐 3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서 아로마오일은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 중국석유화학공업그룹에 이어 제3위의 공급업체로 거듭났다.

현재 중국에서 석유제품의 시장은 크지 않고 자원의 수입통로가 제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정만흥 회장은 "양산박" 하나에 매어있지 말고 "삼국의 영웅"처럼 세계를 종횡해야 했다.

정만흥 회장은 보다 큰 세계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고자 50대에 영어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누구든지 모르는 게 잘못이 아니라고 봅니다. 뭐든지 하려는 결심이 없는 게 잘못이지요."

스스로 변화하면 기회가 오는 법, 현재 정만흥 회장은 직접 영어로 중동과 아랍국가의 비즈니스맨들과 소통하면서 사업규모를 확장하고 있다.

"나"의 관리철학: 보스보다는 리더로

오늘날 회사가 업계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정만흥 회장의 두리에는 항상 든든한 "양산협객"들이 서있었다. 직원들은 다들 "양산협객"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회사 운영에 동조하고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회사는 번마다 어려운 고비를 쉽게 넘기고 새로운 기회와 선택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직원과의 소통, 관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만흥 회장은 회사 운영과 관리에 대한 일가견을 이렇게 밝혔다. 직원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고 단합시키는 게 가장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업경영에서 항상 신용을 가장 중요시해온 정만흥 회장은 신용을 지키는 표본이 되어 직원들의 마음을 신용이라는 큰 그릇에 모으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에는 기어이 근무시간을 비워 등산, 배드민턴 등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고 다른 회사와 경기를 치르기도 하면서 직원들의 협동심을 육성하고 있다. 그리고 회사에서 직원 부모들에게 카드를 지급, 달마다 직원들의 이름으로 효도금을 입급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정만흥 회장은 직원들의 기계적 움직임보다 정신적인 활력, 소통, 단합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관리방식도 일종 선택이다.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보스다운 익숙한 관리방식보다 그는 대화를 하고 선두에 서서 조직의 힘을 이끌어내는 리더다운 필요한 관리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법인등기증서 발급의식

"나"의 길: 홀로 질주보다는 함께 활보

회사가 어느 정도 기반을 닦고 추진될 무렵 그는 또 한 번 놀라운 선택을 한다. 바로 대련시 조선족기업가들의 통합의 무대인 조선족기업가협회를 설립한 것이다.

"대련의 조선족 인구는 대부분 동북3성 여러 곳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에 집거지가 없고 현지인맥 등 자원에서도 기타 민족의 단체와 비길 바가 못 됩니다."

정만흥 회장은 타향에서 힘든 창업의 길을 걷는 조선족기업가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오랫동안 협회의 창설을 기획, 고안했다.

2009년 7월 정만흥 회장은 7명의 민족기업인들과 의기투합해서 조선족기업가협회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2010년 6월 대련시 조선족기업가협회가 정식 발족, 대련시위 통전부 산하 1급 협회로 정식허가를 취득했다.

제18대 한국대통령 취임경축 재외동포초청리셉션 참석

협회 회원들의 경영활동에 편리와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정만흥 회장을 비롯한 협회 임원진들은 중국 국내 정부기관 및 한국, 조선, 일본 영사관, 국내 여러 기업가협회 및 지역협회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면서 다양한 행사를 추진했다. 정만흥은 회원들을 거느리고 제18대 한국대통령 취임경축 재외동포초청리셉션, 세계한인무역협회포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65주년 경축의식에도 참석했고 일본, 한국, 조선 3개국에 대한 경제고찰을 통해 양호한 무역협력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기업탐방, 국내외기업가 포럼을 조직하고 중국은행, 민생은행 등 은행 및 담보회사와 협력해 회원들의 융자난을 해결해주고 있다. 그외에도 "조선족민속문화절", "조선족각계대표신년하례회", "조선족역사연구토론회" 등 행사를 통해 대련시 기업계, 학술계, 문화관 등 인사들의 교류를 추진했다.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제1회 제6차 상무이사회

정만흥 회장의 인솔하에 이 협회는 회원이 최초의 7명에서 현재는 3천여명으로 늘었다. 본 협회 제1회 이사회는 지금까지 총 316차 행사를 진행, 평균 5.8일에 한번씩 행사를 조직한 셈이다.

협회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정만흥 회장은 협회주제가 "뭉치자, 기업가들!"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창업의 길에 겪은 고생

그 누가 알랴마는

성공의 길에

기쁨만은 우리 함께 나누네…"

홀로의 질주보다도 함께 활보하는데 즐거움을 두고 있는 정만흥 회장의 선택의 길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협회가 정상궤도에 들어서면서 정만흥 회장은 차기회장에게 계주봉을 넘기고 명예회장이라는 새로운 위치에서 협회를 위해 협조해주고 있다.

기회는 선택을 요하고 현명한 선택은 삶을 더 풍부해지게 한다. 기회가 다가올 무렵 우리는 늘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해야 하는 것"의 내면전쟁으로 고민하고 있다. 누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행복을 저축하는 일이라고 했다. 정만흥 회장은 오늘도 즐거운 일을 하기 위해 행복을 저축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가…

[취재/글 권향화]


중국국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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