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 (92)
1930년 4월 5일, 룡정시 조양천진 덕신촌에 출생
1950년 연변제1고중 2학년때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 38군 114사에서 전령병으로 근무. 3등공 3차 수여받음.
1953년 3월 중국인민지원군 축구팀에 입단. 체계적으로 축구훈련 받음.
1955년 8월 길림성축구팀 초창기 멤버로 입단. 이후 1963년까지 선수로 활약.
1956년 제16회 올림픽 출전준비 중국국가대표팀에 선발.
1956년 상해에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 하룡원수의 접견을 받음. 《중형땅크》라고 칭찬받음.
1959년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축구운동건장칭호를 수여받음. 길림성팀의 일원으로 주은래총리의 접견을 받음.
1960년 길림성 체육계를 대표해 전국문화교육계통군영회에 참가. 이후 길림성팀의 코치, 감독, 체육훈련반 주임 등으로 활약하다가 문화대혁명기간 박해를 받음.
1973년 길림성축구팀 총감독으로 활약.
1975년 연변대학 체육학부로 조동. 이때로부터 199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부주임, 주임으로 사업. 1천여명의 체육인재들을 양성.
2002년 6월 타계.
사회직무:
연변조선족자치주 정협위원, 길림성축구협회 위원, 연변축구협회 부주석,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 부회장, 원 길림오동팀 고문, 연변로인축구협회 회장, 고문 등.
부인 최혜숙 녀사와 백년가약을 다지면서.
2012년 7월, 선후로 다섯번 중국국가팀의 감독을 맡았던(1963년부터 1986년까지) 년유사(年维泗)가 연변을 찾았다. 중국축구계의 태두로 불리는 년유사는 그번 연변행에서 중국에선 오직 연변만이 《축구의 고향》이란 칭호를 가질수가 있다며 연변축구의 부활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연변축구 중진웅풍(延边足球 重振雄风)》이란 글발을 남겼다. 그때 그는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중국조선족축구건장들을 꼽았는데 그중에는 《중형땅크》라는 별호까지 언급하며 수차 곱씹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중국조선족축구계의 거장- 고 리광수(1930년~2002년)선생이였다.
최근 기자는 리광수선생의 친인들과 동료 및 생전에 그를 취재했던 기자를 만나 중국조선족축구계의 거장 리광수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친인들이 들려주는 프로필
《파란만장했다고 할가요…》
리광수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애틋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부인 최혜숙녀사(1933년. 유명한 배구선수. 중국에서 첫패로 배구운동건장칭호를 수여받음.), 녀사가 들려주는 선생의 프로필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선생의 찬란했던 과거를 돌아보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1930년 4월 5일, 리광수선생은 룡정시 조양천진 덕신촌의 한 농민가정의 2남 1녀중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어릴적부터 신체소질이 좋았던 그는 뛰여난 총기와 천부적인 운동자질을 갖고있었다. 8살때부터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축구를 즐긴 그는 소학교로부터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학교축구팀의 주력공격수로 맹활약했다. 거기에 륙상, 배구, 롱구 등 운동에도 능했으며 학교에서의 학습 성적도 늘 학년에서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던 1950년 연변제1고중 2학년 때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그렇게 소원이던 학업을 접어두고 나라의 호소를 받들어 전쟁터로 나갔다.
1960년 7월, 조선방문경기시의 리광수선생(오른쪽 세번째 사람).
1953년 3월 중국인민지원군 38군 114사에서 전령병으로 근무하고있던 그에게 지원군 총정치부에서 전근령이 내려왔다. 며칠 낮, 며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싶이 하며 목적지에 도착하고보니 놀랍게도 지원군축구팀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지원군총부에서는 1951년에 축구팀을 꾸렸었는데 팀 선수들이 너도나도 지원군에 입대한 리광수를 추천하기에 오래전부터 그를 수소문했다는것이였다. 지원군축구팀에 입단해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던 선생은 전쟁이 끝나자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념에 단연히 8.1팀의 높은 대우도 뿌리치고 귀향했다. 허나 그가 학업에 정진하려고할 때 상급에서 또 그를 찾았다. 길림성팀을 창단하려고 하는데 주력멤버로 나서라는것이였다. 대학공부가 꿈이였건만 《운동을 하는것도 나라와 인민의 수요》라는 사상이 사람들의 뇌리에 붉게 각인돼있던 그 시대, 개인의 욕심은 금물이였다. 황차 1954년 전선에서 3등공을 세우고 그해 입당까지 했던 그이였음에랴!
1955년 8월, 드디여 조선족들을 위주로 한 길림성팀이 고고성을 울렸다. 그때로부터 길림성팀에는 《리광수》란 웅장한 체격에 준수한 미모를 가진 공방지휘자가 나타나 경기장을 주름잡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1956년 상해에서 경기가 끝난 뒤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인 하룡원수가 그를 접견했다. 원수는 리광수선생을 《튼튼하고 용맹하고 완강하며 훌륭한 돌파능력과 공격능력을 가진 중형땅크》라고 높이 치하했다. 선생에게 《중형땅크》 라는 별호가 생긴 계기였다. 이어 3년 뒤인 1959년, 제1회 전국운동대회에서 선생은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축구운동건장칭호를 받음과 아울러 길림성팀의 일원으로 주은래총리의 접견을 받게 되였다. 이때 하룡원수가 주은래총리에게 《이 선수는 길림성팀의 유명한 중형땅크》라고 선생을 특별 소개했고 그의 이름은 다시 한번 만방에 알려지게 되였다.
민족의 후대들에게 축구의 꿈을 심어주며.
1956년 제16회올림픽 출전준비로 국가팀에 선발되여 한시기 있다가 다시 길림성팀에 돌아와 10여년간 줄곧 중앙공격수로 활약한 기간 길림성팀은 선생을 중견으로 한 독특한 전술풍격을 형성해 국내축구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키가 크고 몸집이 웅장한 선생은 중앙공격수로 늘 상대편의 방어진에 뛰여들어 수비진을 크게 휘저었는데 그때면 눈치가 빠르고 폭발력이 뛰여난 손중천이거나 속도가 빠르고 《대포알슛》으로 이름있는 지청룡이 인차 그의 량편에 붙어 선생이 교묘하게 찔러주는 공을 득점으로 련결하곤 했다.
1958년, 전국갑급팀련맹경기에서 길림성팀은 4등의 영예를 따냈다. 그해 팀은 국가를 대표해 구 쏘련에 가서 친선경기를 치르게 되였다. 우즈베끼스딴가맹공화국 수도 따슈껜뜨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게 됐는데 마침 중앙아세아에 계시는 선생의 친척할아버지가 일가친척들을 거느리고 200리길을 달려왔다. 그는 《훌륭한 후손을 두어 대단히 기쁘다》면서 선생에게 선물로 시계 6개에 사진기, 라지오를 주었다. 중앙아세아에 거주하는 수만명의 백의동포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선족 위주로 구성된 길림성팀을 응원했다. 그번 방문시합에 길림성팀은 7전 4승 2무 1패의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때 선생은 유일한 우수선수로 뽑혀 표창을 받았는데 구쏘련신문들에 그의 사진과 함께 사적이 실리기도 했다.
1960년 길림성 체육계를 대표해 영광스럽게도 전국문화교육계통군영회에 참가했던 선생은 같은 해 길림성팀을 따라 조선방문경기에 나서면서 또 조선축구계를 들썽했다. 당시 길림성팀은 조선에서 강팀으로 알려져 있던 조선교통성팀을 5대1로 대승했는데 그번 경기에서 4꼴은 선생이 도맡았던것이다.
연변대학 체육계 제1임 주임 채송철선생(오른쪽 사람)과 함께.
선생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길림성팀의 주장, 조리감독, 감독, 체육훈련반 부주임 등 직을 맡으며 자신의 재능을 남김없이 과시했다. 잔디밭에서 용맹을 떨치던 그가 체육행정사업에로의 이행을 준비하며 남다른 공헌을 예고하고 있을 때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선생이 그토록 애착을 품고 일심정력으로 건설해왔던 길림성팀은 해산되였고 본인은 외국에 친척이 있다는 리유로 《외국특무》라는 어이없는 죄명까지 들쓰며 농촌으로 《로동개조》를 내려가야만 했다.
《아버진 그토록 축구를 사랑했건만 상급에선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직위싸움>도 아닌 단지 연변축구를 위해 해보겠다는데도 말입니다…》
선생의 자제분인 리영철(1962년출생)씨는 부친의 과거를 회억하며 지금 생각해봐도 참 리해할수 없는 일이라며 허구픈 웃음을 짓는다.
《파쑈감독》, 《외국특무》로 투쟁받으며 훈춘현 영안의 한 농촌으로 쫓겨갔던 선생은 1972년 훈춘시체육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잠시 사업하다가 1973년 길림성팀의 총감독을 거쳐 1975년 연변대학에 몸을 담그게 된다.
본인은 그토록 축구가 소원이였건만 그 소원은 이런저런 원인으로 실현될수 없었고 결국 실망을 품은채 연변대학으로 발길을 향한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연변대학에 오자마자 그런 불쾌한 일들은 뒤로 하고 자신의 맡은바 사업에 열심한다. 당시 비록 대학학력을 갖고있지 못한 선생이였건만 다년간의 탐구와 실천경험은 그로 하여금 맡은바 대학교수 과제를 넘쳐 수행하게 했다.
선생은 1992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대학 체육학부 부주임, 주임직을 력임하면서 허준호, 방인권, 리호은, 주청렬, 김민영, 최영숙, 김복순, 박경희 등 1000여명에 달하는 체육인재들을 양성해냈다.
퇴직 이후에는 또 길림성축구협회 위원, 연변축구협회 부주석,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 부회장, 원 길림오동팀 고문, 연변로인축구협회 회장,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정력적으로 조선족축구사업을 위해 분투했다. 그런데 하늘의 풍운조화는 예측할수 없었다. 로년에도 그토록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며 어린 축구꿈나무들을 이끌어가던 선생은 2002년 6월 불행히도 뇌출혈로 타계한다.
전 길림성축구팀 정종섭감독이 리광수선생을 그리며 남긴 글.
예고없는 선생의 장엄한 락조
길림성팀의 후배로 줄곧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해왔던 정종섭(1960년대 길림성축구팀 선수, 전 길림성축구팀 감독, 전 중국국가축구팀 선수)선생은 지금도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가졌던 식사시간을 잊지 못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 고조로 치달아오르고있던 무렵, 선생과 함께 룡정시 개산툰진의 어느 한 시골마을로 소풍을 나갔다 연길로 돌아온 이들은 더위를 쫓을겸 식사도 할겸 공원교 부근의 랭면집을 찾아들어갔다. 그때 그 국수집 대청에 걸린 텔레비죤에서 한창 월드컵소식을 생방송으로 전하고있었는데 그것을 보던 리광수선생이 버럭 화를 내는것이였다.
《상당히 기분 잡친 표정이였습니다. 원체 마음씨가 비단 같아서 좀체로 화를 내지 않던 분이셨는데…》
말끝을 흐리는 정종섭선생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하다면 그때 선생은 왜 화를 냈던것이고 그 뒤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것일가?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이 무패기록으로 조별경기에서 출선해 16강에 들자 당시 중국 CCTV의 이른바 <축구평론가>들은 한국팀이 <안방>이란 우세로 심판의 덕을 보아 16강에 들었다고 비하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대표팀이 8강을 거쳐 4강신화를 이룩하자 중국 CCTV의 <한국폄하> 론평은 더욱 로골적이였다. 그러자 연변의 조선족 축구로장 리광수옹은 장거리 전화로 중국 CCTV방송국의 축구프로 리포터 류건홍(刘健弘)과 설전을 벌였다.
연변대학 체육계 시절 처음으로 졸업생들을 내보내면서.(앞줄 오른쪽 네번째 사람).
<나는 조선족이지만 중국인이고 또 중국축구를 사랑한다. 하지만 당신들이 무턱대고 한국팀을 비하하는건 참을수 없다. 당신들이 무슨 근거로 한국팀이 심판의 덕을 보고있다고 하는건가?!>
<중국축구가 아시아와 세계에서 꼴기없이 무너지는건 우리 중국축구의 자체 문제이다. 반드시 우리가 반성해 봐야 한다. 남을 폄하하기보다 우선 자신한테서 문제점을 찾는것이 중국축구인들의 자세다.>
류건홍씨와 전화로 설전을 벌이던 중 화가 난 리광수옹은 갑자기 전화수화기를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지나친 흥분으로 뇌출혈이 발생했던것이다…》
리광수선생의 생전에 그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던 년륜있는 스포츠기자 김철균(종합신문 스포츠기자, 본지축구사이트 평론가)씨는 지금도 선생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애석함을 금치 못한다.
《선생은 쓰러져서 3일만에 타계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민족축구와 중국축구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때 연길시장의관은 선생의 마지막 길을 환송하러 나온 사회 각계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선생의 최후를 스포츠신문을 비롯한 여러 언론사에 추모의 문장으로 생생하게 밝혀왔던 김철균씨는 자신보다는 먼저 박만복, 지청룡, 허명룡, 최철봉, 동경춘 등 동료 축구인들의 취재를 알선해주며 그들의 사적을 마치 자기가 겪은것처럼 구수하게 들려주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며 말끝을 흐린다.
연변대학 체육학원 허준호 전임원장이 선생을 그리며 남긴글.
애제자 마음속의 스승
《한마디로 스승님은 문무가 겸비한 분이셨습니다…》
1975년부터 연변대학 체육계에서 첫패로 리광수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애제자중의 한분인 허준호(연변대학 체육학원 전임 원장)교수는 감명깊게 선생을 추억한다.
그의 인상속의 스승으로서의 리광수선생은 확연히 남들과 다른 독보적인 존재였다. 대부분 체육인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라면 운동신경이 남보다 발달했을뿐 일반적으로 문화정도가 낮고 표달력이 낮다는데 반해 선생은 체육실기에서 뿐만 아니라 교학에서도 뛰여났다고 한다. 특히 매번 대학교측에서 펼치는 실무평의때면 뛰여난 교학실기로 사생들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자아냈다. 그만큼 선생은 자신이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단점을 미봉하기 위해 평시에도 늘 개인학습과 실무에 연찬했고 리론수양을 높이기에 앞장섰다. 또한 노래, 무용 등 예술면에서도 장끼를 보여주고있었는데 당시 그런 선생을 두고 많은 분들은 만약 선생이 체육을 하지 않고 다른 분야를 선택했어도 학자로 크게 대성할수 있는 분이라고 엄지를 내들었다고 한다. 오늘도 체육계통을 둘러보면 많은 체육인들이 문화정도가 낮고 그에 따른 표달능력 미달로 하여 전반 대오건설에 난관을 겪고있는데 리광수선생같은 분이 연변대학 체육계에서 사업하게 된것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연변체육계의 다행이요, 영광이 아닐수가 없다는 얘기다.
선생은 중국말수준도 상당했는바 한족들과의 교류에서 방언과 사자성어 응용은 한족들을 초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번은 당시 연변대학교의 박규찬교장이 운동원출신인 선생이 대학교 체육계 책임자사업을 어떻게 하고있나? 알아볼 생각으로 갑자기 그를 불러 사업회보를 시켰는데 한족들 뺨치는 중국말솜씨로 조리정연하게 회보하는 그를 보고 연방 엄지를 내들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다.
부인과 함께 즐거운 소풍.
선생은 틀거지가 없이 제자들과 어울렸고 상급을 존중하고 후배들을 이끌었다. 절대로 자신의 성적이거나 성과를 남한테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러한 그를 많은 사생들이 인간적으로 숭배하고 따랐다. 선생은 책임자사업을 하면서 청년교원들을 제때에 진수를 보내고 학습반을 꾸려 업무제고에 앞장섰으며 다른 학부의 명교수를 청해 강좌를 열어 학부의 실무를 제고하기에 힘썼다. 선생이 체육계 주임사업을 하던 기간 연변대학 축구팀은 전국대학생축구시합에서 련속 3년간 1등을 따냈는데 거기엔 선생의 로고와 심혈이 많이 깃들어있었다.
1970년대 말 금방 결혼한 젊은 선생 한분이 대학교에서 준 사택에 들게 되었는데 엄동설한에 굴뚝이 마사져 곡경을 치르고있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리광수선생은 휴일도 마다하고 자신이 직접 널빤지들 사가지고 와 굴뚝을 새로 만들어 세워주는 등 생활에서 애로를 겪는 청년교원들을 도와주는데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갓 결속된 이후 한때 체육계 내에서는 민족단결모순이 두드러졌는데 선생은 이 문제들을 타탕하게 처리하여 1/3을 차지하는 한족교원들이 오히려 리광수선생의 말을 더 믿고 따랐다고 한다.
《겨울철 학교빙상장을 만들 때도 선생님은 저녁 퇴근을 하기 바쁘게 늘 몸을 적셔가며 물을 실은 밀차를 끌고 얼음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무렵 연대운동장 풍경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였지요…》
애제자 마음속은 스승은 하나의 거대한 산이였다.
사료에서 찾아보는 선생의 《전설》
결혼식날(1959년 10월 25일) 신부 최혜숙녀사를 맞아들인 뒤 하객들과 대충 점심식사를 하고 연길공원에 자리잡은 체육장으로 향발, 길림성팀의 주력으로 전국갑급팀련맹경기에 등장해 감독진을 아연케 했다는 리광수선생에겐 지금도 세인에 회자되는 《전설》들이 참 많다.
1998년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제11권 체육사(윤학주 허준호 집필)》에는 다음과 같은 선생의 재미나는 축구일화가 실려 눈길을 끈다.
연변대학 빙상장에서 제자들과 함께.(오른쪽 두번째 사람)
1959년 제1회 전국운동대회 축구경기는 9월 중순 북경과 천진에서 각각 결승경기를 진행했었는데 태원경기구 예선에서 1등한 길림성팀은 북경선농단경기장에서 하북성팀과 맞붙게 되였다. 그때 하북성팀에는 국가팀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적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엄덕준(严德俊)이였다. 하북성팀의 중앙방어수를 담당하고있던 엄덕준은 길림성팀과의 대결을 앞두고 감독진으로부터 《중형땅크》로 소문이 난 리광수선생을 중점 방어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시합이 개시되자 엄덕준은 리광수선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는데 찰떡수비가 따로 없었다. 그러던 전반전 경기가 중반을 막 넘어갈 무렵이였다. 어쩌다 두 선수가 한데 엉켜붙어 공을 쟁탈하게 되였다. 워낙 장사같은 몸집을 가진 선수들이라 그들의 접전은 성구 그대로 용쟁호투, 둘이 다 어떻게 힘을 썼던지 그만 새 축구공이 《쾅!》 터져버리고 말았다. 순간 본인들을 물론 경기장의 선수와 심판이 아연실색했고 뒤미처 관중석이 《와!》하고 끓어번졌다. 이 광경을 이튿날 《체육보》에서 《<중형땅크>와 <검둥이 셋째(엄덕준의 별명으로 그의 얼굴이 철색이고 등번호가 3번이라는 데서 생겨난것임)>의 대전》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고 한다.
2002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룡정시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문화총서 《일송정》 제5기에 실린 《잔디밭의 땅크》(김춘극)에는 1970년 리광수선생이 훈춘시 영안향 부민촌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하던 나날 향운동대회에서 있었던 재미나는 에피소드를 이렇게 적고있다.
당시 부민촌의 축구팀은 리광수선생을 제외하고 모두 한족으로 구성되였는데 선생은 축구재간이 형편없는 그들을 데리고 용케도 결승전에까지 올랐다. 1등을 다투는 결승전에서 부민팀은 해마다 1, 2등안에 드는 영안팀과 맞붙게 되였다. 강팀앞에서 선생은 모두를 방어에 나서게 하고 저 혼자 공격수로 나섰다. 내내 공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실점없이 전반전을 마쳤다. 후반전에 들어서서 부민팀은 어쩌다가 오른쪽 코너킥을 얻게 되였다. 기회였다. 선생이 나서서 오른발로 바나나킥을 날렸다. 공은 멋진 호선을 그으며 대문 왼쪽기둥에 맞히더니 보기 좋게 그물안으로 굴러들어갔다.
《와, 귀신뽈이다!~》
순간 온 장내에 환성이 터졌다. 사기가 오른 부민팀은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응전에 나섰는데 이번에는 왼쪽 코너킥을 얻게 되였다. 선생이 재차 나섰다. 이번에는 왼쪽발로 바나나킥을 날렸다. 공은 묘하게도 이번에는 대문 오른쪽기둥을 맞히더니 휙-하니 그물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로년축구팀의 든든한 기둥으로(뒤줄 왼쪽으로부터 다섯번째 사람).
연변축구의 재기를 위해 심혈
원 연변OK축구구락부 총경리로 사업했던 박운철(1963년출생)씨는 리광수선생이 구락부 고문으로 계셨던 기간 현단계 연변축구사업의 중점을 청년, 소년, 아동들의 양성에 둘것을 강조하면서 2001년부터는 몸소 연변청소년축구발전기금회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해왔다고 전했다. 특히 그무렵 길림오동팀(감독 고훈)의 고문으로도 초청받아 정력적으로 사업을 펼쳐나갔던 선생은 년말이면 구단에서 지불한 고문비용을 받아서는 번마다 1전 한푼 다치지 않고 어린선수들의 훈련비용에 보탬해라며 봉투채로 박운철씨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박운철씨는 선생은 그때 이미 청소년 축구양성 16자방침-《어릴 때 양성하고 여러해 훈련하고 기초를 잘 닦고 점차 제고하자(从小培养,多年训练,打好基础,逐步提高)》-을 확정한데 이어 구체방법과 조치(1, 전심전의로 축구사업을 위하는 일군이 나서서 2, 우수한 어린 인재를 발굴, 모집하고 3, 문화, 품덕, 신체소질 교양을 강화하고 4, 공평 경쟁 환경을 조성해주고 5, 아동심리와 취미, 건강 특점에 알맞는 과학적인 훈련을 모색하고 훈련해야 한다.)들까지 세워놓고 연변축구의 재기를 위한 청사진을 그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이대로 착실히 실행해나가기만 한다면 조만간 연변축구가 다시 일어날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생전에 그토록 연변축구의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심혈을 기울여왔던 중국조선족의 축구거장- 리광수선생, 선생이 타계한지도 어언 12년 세월이 흘러갔건만 연변의 축구는 지금도 저곡의 심연에서 배회하고있을뿐이다.
언제 어느때 누가 꺼냈던 말인지는 확인할수 없지만 일찍 연변의 항간에는 이런 말이 떠돈 적이 있다. 《연변에서 축구를 모르면 지도자를 할수 없다!》고 말이다. 일시적인 흥분과 감정에 튀여나온 말인것 같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많은 축구팬들과 체육인들 그리고 사회 각계 지성인들이 리광수선생을 잊지않고 기리고있는 리유가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길림신문 김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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