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련옥
“찾아줘스리(찾아줘서) 증말(정말) 아슴채꾸마.(‘고맙습니다’의 방언)” 노인은 기자의 손을 꼭 잡은 채 이렇게 거듭 말했다.
그녀의 말씨에는 95세 나이의 오랜 연륜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고향 연길현(延吉縣)의 옛 시공간이 할빈의 이 아파트에 날아와서 머물고 있는 듯 했다. 연길현은 조선인 이주민들의 중심지였던 연변의 용정 등 지역을 아우른 옛 행정지명이다.
노인은 어릴 때 부친을 따라 흑룡강성의 동북쪽 모서리에 위치한 요하현(饒河縣)으로 이삿짐을 옮겼다. 당시 그녀가 살던 요하현의 소가하촌(小佳河村)에서 신련옥(申連玉)이라고 하는 이 이름은 지금도 하나의 전설로 전하고 있다고 한다.
소가하촌 부근의 대정자산(大頂子山)은 해발 801m로 이 일대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산의 낙엽이 쌓인 남쪽비탈은 엉덩방아로 미끄럼을 할 수 있도록 경사가 심했다. 약 80년 전의 어느 날 항일연군은 대정자산에서 일본군과 한바탕 격전을 벌였다. 그때 신련옥은 부상병 한명을 산기슭의 마을까지 후송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을 신련옥의 자택으로 안내했던 장평(張平)은 이 이야기가 나오자 대뜸 감탄부터 했다.
“촌장 어른은 할머니의 성함을 말하니 엄지손가락부터 내미는 겁니다.”
항일련군 후대 장평(张平),신련옥, 필자 (왼쪽으로부터)
장평은 동북항일연군 장령의 후대로 동북항일연군 역사를 연구, 선전하는데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사람이다. 그는 몇해 전 승합차에 신련옥을 모시고 일부러 그녀의 고향으로 다녀왔다고 한다.
신련옥이 후송한 부상병은 키가 1m 80을 넘는 거구였다. 촌장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혀를 연신 내두르더라고 한다. 신련옥은 불과 키가 1m 50도 안 되는 왜소한 체구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중태에 빠진 부상병을 혼자 몸으로 어떻게 산기슭의 마을까지 데려왔는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때 신련옥은 부상병을 업고 안고 끌고 하면서 그에게 상처를 더 입힐까봐 여간 조심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한두 걸음을 걷기 바삐 비탈에 엎어지고 뒹굴고 했다. 나중에 부상병은 치료를 받아 눈을 떴지만, 그녀가 몸의 여기저기 입은 상처는 아직도 후유증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전투 이야기가 나오니 신련옥은 금세 눈언저리를 붉혔다. 당시 몇 걸음 밖에 웅크리고 있던 전사가 포탄에 맞아 가랑잎처럼 날아갔다고 한다. 방금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생명체가 일순간 흙덩이처럼 형체 없이 사라진 것이다.
“에구, 울 엄마가 또 눈물을 흘리네…” 일행을 동행한 막내딸 장숙화(張淑華)가 근심조로 하는 말이다.
항전시기의 옛 이야기가 나오면 신련옥은 며칠 동안 아주 상심한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누군가 와서 신련옥에게 그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질색이라고 한다.
바깥의 추운 날씨처럼 침체된 분위기는 다행히 곧바로 흩어졌다.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증손녀가 재잘거리며 신련옥에게 감겨들었던 것이다. 이 증손녀는 그녀의 최고의 보배요, 웃음단지라고 한다.
신련옥의 어린 시기의 회억은 망을 보던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교원 출신인 부친은 항일지사들과 함께 지하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이 온돌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비밀리에 회의를 할 때면 어린 신련옥은 바자굽에 서서 망을 보았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때 부친과 함께 비밀회의를 하던 항일지사는 기억의 아득한 고개 너머에 그들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신련옥의 회억은 세파에 씻겨 드문드문 끊어지고 있었다. 일부는 주변 사람들의 추억을 더듬고 그녀의 잊힌 기억의 편린을 찾아서 화상(畵像)을 그려야 했다.
실명(實名)의 항일지사가 신련옥의 기억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936년이었다. 이영호(李永皓), 그는 선후하여 중공 요하현 현위서기와 동북항일연군 제7군단 제7연대 정치위원 등을 역임하고 1956년 주중 조선대사로 있었던 거물급 인물이다. 그해 이영호는 16살의 신련옥에게 훗날의 80년 인생을 결정하는 단초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영호)이 도와줘스리(도와줘서) 군대에 입대했스꾸마.(입대했어요)”
이영호는 소가하에서 남쪽으로 수십㎞ 상거한 삼의툰(三義屯)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다. 그가 언제 어떻게 신련옥이 살고 있는 소가하에 나타났는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있다.
그러나 신련옥이 말하는 군대가 동북항일연군 제7군단을 지칭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제7군단은 1937년까지 병력 1,500여명을 보유, 선후로 대소 전투 200차를 겪으며 일본군 사상자 700여명, 괴뢰군과 경찰 사상자 800여명이라는 전과를 올린 부대이다. 이 제7군단은 1930년대 초반 최석천(崔石泉) 등이 세운 “조선독립군”을 모태로 삼고 있다. 최석천은 훗날 선후로 조선 민족보위상, 내각 부수상을 담임했던 최용건(崔庸健)의 다른 이름이다.
1937년, 제7군단은 여성부대(婦女隊)를 설립하였다. 신련옥은 여성부대의 일원으로 되어 밀영에서 전우들과 함께 군복을 짓고 급양을 제공하는 등 작업을 했다. 이듬해 그녀는 분대장으로 되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이때 당 소개인은 최석천이었다. 1939년, 신련옥은 제7군단 제3사단 피복(被服)공장에 전근되었다.
군부대에서 신련옥과 이영호의 인연은 계속 남다른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해 그녀는 이영호의 처남 유씨(劉氏)와 사랑을 속삭이며 그의 아내로 되는 것이다.
1939년 겨울, 전례 없는 혹한이 만주를 덮쳤다. 일본 관동군은 70만명의 일본군과 30만명의 괴뢰군을 동원하여 동북항일연군에게 “대토벌”을 진행했다. 그들은 또 백성들과 항일연군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집단마을을 만들고 인가를 강박하여 한데 모이게 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제일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
이해 겨울, 하늘마저 야속하게 큰 눈을 뿌렸다. 땅에 수북이 쌓인 눈은 무릎을 쳤다고 한다. 누군가 앞장에 서서 걸으면 뒤의 사람들은 그의 발자국을 밟으며 걸었다. 이때 신련옥은 어느 결에 대오의 뒤에 처지고 있었다. 열댓근이나 되는 수동형 재봉기가 가냘픈 등을 태산처럼 짓누르고 있었고, 참기 힘든 허기가 주린 창자를 바늘처럼 찌르고 있었다. 잠깐 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려던 신련옥은 갑자기 먼발치에 보이는 누런 군복에 깜작 놀란다. 한 무리의 일본군이 눈위에 찍힌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오고 있었던 것이다.
“왜놈, 왜놈이 저기서 따라 와요!”
신련옥은 미끄러지듯 땅위에 내려오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때 부대는 일본군의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흘 동안 대정자산 부근의 이 산 저 산을 전전했다고 한다. 요하가 제7군단의 요람이라고 한다면 현성 서북쪽의 대정자산은 제7군단의 대본영이었으며 대정자산 부근의 산봉우리와 산골짜기는 제7군단의 숙영지였다.
일본군은 심산의 밀영을 수색, 소각했고 후방 근거지를 파괴했다. 항일부대는 일본 토벌군과 하루가 멀다하게 전투를 벌였다. 신련옥의 신혼한 남편 유씨도 이 시기 벌어졌던 어느 한 전투에서 숨졌다고 한다. 여성전사들은 전장을 넘나들며 부상자를 구급하고 그들을 안전지대로 후송했다.
신련옥이 부상자를 산기슭의 마을에 후송한 이야기는 이 무렵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부대는 전투가 끝나기 바삐 진지를 옮겼다. 부대는 숙영지의 전이를 일상으로 삼으면서 급양보급이 더 어려워졌다. 여성전사들은 언 땅을 파서 풀뿌리를 캐고 나무에 올라 버섯을 따서 식량으로 보탰다. 그러나 이런 풀뿌리와 버섯을 식용할 수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엄마는요, 그때 이런 풀뿌리와 버섯을 첫 사람으로 시식했다고 해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장숙화가 이렇게 말했다.
신련옥은 자기가 분대장이기 때문에 전사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채집한 풀뿌리와 버섯에 언제나 먼저 손을 가져갔다. 사고는 시한탄처럼 끝내 터졌다. 신련옥이 독버섯을 잘못 먹었던 것이다.
신련옥은 혼미상태에 빠져 수풀 속에 쓰러졌다. 박달나무가 얼어터진다는 만주의 추운 겨울철이었다. 미구에 그녀의 발뒤축에서 살덩어리가 거죽과 함께 고드름처럼 떨어졌다. 이때부터 신련옥은 걸음걸이가 힘든 상이군인으로 되고 말았다.
“엄만 신이 자꾸 벗겨져서 말째예요. 발뒤축이 허울뿐이거든요.” 장숙화의 말이다.
신련옥 노인이 항일전쟁연대 사용하던 재봉기
겨울의 산악지대는 신련옥에게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라 일본군보다 무서운 존재로 되고 있었다. 1940년 2월, 신련옥은 강 건너 소련 극동지역으로 호송되게 된다. 이때 신련옥은 임신한 몸이었고 또 발뒤축의 상처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재봉기를 기어이 등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뒷이야기이지만, 훗날 이 재봉기는 그녀와 함께 중국 땅으로 건너와서 막내딸에게 전해지며 다시 지방의 항일연군 박물관에 기증된다.
“전사가 어떻게 무기를 던져요? 재봉기는 엄마의 목숨이나 다름없었지요.”
국외의 안전지대에 가서 좋은 치료를 받게 되었지만 신련옥은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흐느껴 울면서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혹여 그녀는 이로 하여 시작될 자신의 비극의 역사를 미리 예감한 게 아닐까…
이 무렵 동북항일연군의 대부분은 연이어 소련 극동에 철퇴하여 교도여단을 설립하고 정비와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교도여단은 소련 극동군 소속 제88보병여단이라는 번호를 수여받으며 일명 “국제여단”으로 불린다.
신련옥, 진뢰, 왕옥걸, 이민 (좌로부터)
중국에서 소련에 철퇴한 여성 전사들도 훈련과 학습에 들어갔다. 진뢰(陳雷, 전 흑룡강성 성장) 등 교관이 그들에게 정치과목과 문화과목을 강의했다. 그러나 이런 훈련과 학습은 극동의 수림을 스쳐 지나는 찬바람처럼 짧은 시일뿐이었다.
제7군단 여성전사였던 왕옥결(王玉潔)의 회상기에 따르면 얼마 후 그녀와 신련옥은 하바롭스크 교외의 국제여단 2호 농장에 배속된다. 이때 건강상황으로 국제여단의 정상적인 훈련에 참가할 수 없는 인원들은 부근 농장이거나 화원(花園)에 분산, 배치되었다고 한다.
소련과 독일 전쟁이 고조된 1942년 소련의 일상생활은 최악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농장의 국제여단 인원을 포함, 소련 공민에게 날마다 단지 300그램의 검은 빵이 배급되었다. 이마저 일찌감치 줄을 서서 수령해야 했으며 늦게 가면 그마저 얻기 힘들었다. 이때 국제여단의 전우들은 후방부대의 기준에 따른 일별 600그램의 빵을 지급받고 있었다.
“(밭에 나가) 언 감자를 캐서 먹었스꾸마.(먹었습니다)” 신련옥은 그때 그 시절의 슬픈 정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 잠깐 말을 끊고 있었다.
그녀는 이름이 농장이지 실은 “감옥”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전사들이 군령에 발목이 잡혀 서로 내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탓인지 신련옥이나 왕옥결은 모두 농장에 배속된 국제여단의 전사가 구경 얼마나 되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해마다 가을철이면 국제여단의 전사들이 어김없이 농장에 와서 수확을 했고, 또 철에 따라 곡물과 채소, 과일, 가금을 트럭에 실어갔다. 농장은 여단 장병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농장에는 당 조직이 없었으며 여단의 장령들도 농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포했다. 이 무렵, 국제여단의 중국인 전사들과 가족은 소련군을 따라 동북으로 돌아가며 조선인 전사들과 가족은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런데 농장에 남은 전사와 가족에게는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통지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름은 국제여단의 명부에서 싹싹 지워졌을까? 혹여 국제여단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아예 망각했을까? 아니면 국제여단은 그들을 자생(自生)하다가 자멸(自滅) 하도록 훈련지 밖에 내버려두었을까…
어찌됐거나 이 사건은 당사자들이 모두 작고한 이때 더는 해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은 전면 경제건설의 시기에 들어섰다. 고양이의 손도 빌어서 쓸 만큼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던 소련은 극동지역에 남은 항일연군 전사와 가족을 극진히 배려했다. 한편 해방(8.15)이 된 얼마 후 중국 대륙에서 국내전쟁이 시작되었다. 극동지역에 잔류한 항일연군 전사와 가족은 잠시 귀국을 포기해야 했다. 소련정부는 이런저런 점을 감안하여 그들을 소련에 남게 하기로 결정하며 소련국적을 부여한다.
“저의 오빠와 언니는 모두 소련 이름을 갖고 있어요.”소련에서 태어난 장숙화도 러시아 말로 “요라”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무렵 왕옥결의 가족은 소련 집단농장에 옮겨갔고, 신련옥은 하바롭스크의 빵집에서 빵을 구웠다. 신련옥은 1947년 그녀처럼 소련에 남은 이전 제6군단의 상이군인 장홍원(張洪遠)과 다시 혼약을 맺는다. 그 후 신련옥 부부는 소련 내무부 농장에서 일하다가 실험농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이 농장이 해산된 후 건축부문에서 근무했다.
그럴지라도 부친이나 모친은 오매불망 중국으로의 귀환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무조건 중국어를 배울 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무슨 영문인지 귀국 길은 생각처럼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중국 측에서 그들의 신원확인 증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국제여단, 아니 당당한 항일연군의 전사가 내국인들에게 신원불명의 사람으로 되고 있다니!… 미상불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들의 귀국에 한사코 방애를 놓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일은 지난 수십년 동안 그들에게 내내 풀 수 없는 마음의 응어리로 되었다.
“(최용건은) 살아있기만 하믄(하면) 아무 때나 찾아와도 증명을 서주겠다고 했스꾸마.(했습니다.)” 신련옥의 말이다.
그러나 남편 장홍원은 조선에 연락하려는 신련옥을 살아서 꼭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극구 막아 나섰다.
귀국 절차에 따르면 장홍원은 고향 산동에서 그의 원적 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많은 곡절 끝에 그들 식솔 여섯은 해방된 10년 후인 1955년 비로소 다시 중국 땅을 밟는다. 전우 왕옥결도 이 무렵인 1953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국적 회복도 귀국과 마찬가지로 쉽지 않았다. 신련옥 가족은 1960년 국무원 주은래 총리의 친필 수표를 받은 후 비로소 꿈에도 그리던 중국 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입적허가증서
신련옥 가족은 최종적으로 할빈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신련옥은 가정부로 있으면서 아무런 공직도 맡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공무원으로 근무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게 아니었다. 흑룡강성 민정청(民政廳)은 신련옥의 사업배치에 대해 지시를 내렸는데, 이 공문서는 2,3년 전에야 비로소 자식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1958년 6월 21일자로 발부된 이 공문서는 그동안 신련옥의 사물함에서 내처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몸이 나빠스리(건강이 좋지 않아서) 일하믄(일하면) (정부에) 부담이 될까봐 그랬스꾸마.(그랬습니다.)” 신련옥이 변명조로 하는 말이다.
신련옥 일가족
증손녀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즐기는 신련옥
장숙화는 그러는 모친 신련옥을 안쓰럽게 바라본다. 그녀가 공직을 맡았더라면 부친 한 사람의 노임으로 지탱하던 가족의 생활에 큰 개선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련옥은 귀국한 후 단 한 번도 정부에 그 무슨 대우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만 희생된 전우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살고 있는 자체가 행복이라고 늘 말씀해요.”
지난 수십년 동안 신련옥이라는 이 항일투사의 이름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투명인간처럼 실종된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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