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재일류학생5]《제1사진가》에 도전한 사나이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9월29일 13시26분    조회:672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변소화
㈜카와(스튜디오아키라)사장 변소화와의 인터뷰

변소화사장

성공은 일종의 습관이다.

《성공한 전문가는 태여나는것이 아니라 선택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성공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는 로씨야 문학가 똘쓰또이의 명언이다.

지난 6월 28일, 필자를 마중한 ㈜카와 변소화사장이 바로 자기가 무엇을 하는가를 분명히 알고있는 사람이며 하는 일에 노력을 습관화한 사람이다.

《농촌문인》의 후세

1981년 겨울 변소화(邊肖和)는 길림성 통화시 류하현 오도구진 용산촌에서 태여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불리우는 《농촌문인》으로 해마다 모든 조선문신문과 잡지를 주문했고 여러가지 악기에 테프판까지 구전하게 소장하였다. 그래서 농촌에서 문화행사가 있다면 조직자들이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바로 그의 할아버지 《농촌문인》이였다.

《할아버지는 연변사람 못지 않게 예술세포가 발달했습니다….》

연변출신은 아니지만 소화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조선족문화에 관심을 가진데서 대학1지망이 연변대학 예술학원이며 동생까지 예술학부를 택하게 했단다.

《우리 형제가 서울에서 멋진 정복차림으로 고향사람들앞에 나서면 부모들은 당년에 못살 때를 곁들면서 두아들 자랑으로 남들의 눈치가 보일 정도입니다.》소화가 부모자랑을 했다.

자식농사도 역시 《씨는 뿌린 대로》였다.

또다시 일본으로

소화는 매하구시 직업고중 음악반을 졸업하고 대학입시때 제1지망인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락방되자 다시 재학하여 시험을 봤다. 뜻밖에도 동북사범대학 음악학부 통지서를 받았다.

그에게는 복이 쌍으로 떨어졌다. 그가 한창 성악공부에 열중할 무렵 친구들의 연줄로 2003년 8월에 일본류학길에 올랐다.

그는 언어학교에서 2년간 일어공부를 하고 다시 중국에 돌아와 대학공부를 마쳤다. 대학졸업증을 들고 2005년에 다시 일본에 진출했다.

소화는 일본 조선족사회에서의 활동가이고 인기 스타였다.

학교에서 규범화 된 기교를 배운것을 토대로 늘 무대에 올라 사회를 하고 노래도 불렀다. 월드옥타 등 사회단체에서 조직하는 체육, 송년회 행사에서 늘 조직자이자 출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2년 남짓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의 두뇌에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는 누구나 시간을 빼면 할수 있는 무기술 일터다. 나는 부모들의 투자로 대학공부까지 했는데 그냥 아르바이트로 뛴다는것이 무능한 표현이며 부모한테 미안한 일이다. 나는 남들에게 당당하게 로임을 주는 사장이 될것이다!》

굴뚝 같은 결심과 용기는 모순속에서 헤매던 소화의 가슴에 《도꾜 꿈》을 심어 주며 주춤없이 희망의 원정길에 오르게 하였다.자기 삶의 목적을 정신적 완성에로 두는 사람은 그 어떤 외부조건에도 두려움 없다.

도꾜땅에서 행장을 푼 소화의 첫 삶터는 인맥으로 맺어진 인터넷 《무지개》잡지사였다. 《무지개》는 일본의 첫 조선족잡지로 한창 잉태중이였다

소화는 재일 조선족잡지의 개척자 김충걸과 손잡고 《무지개》잡지 6기까지 도칠하면서 아름답고 황홀한 촬영세계에 입문하게 되였다.

돈을 주는 사장으로

초창기《무지개》는 투자만 있고 수익은 없다. 농촌태생인 소화가 아직은 돈뿌리 없는 《무지개》에서 받는 월급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종종 뜬 눈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하면서.

가뭄의 비라 할가, 때마침 소화는 지인의 소개로 광고회사를 운영하는 한국인 사진관 카메라조작원으로 채용되였다. 그에게는 《가는 날이 장날》이였다.

경제불경기로 사진관이 수익성이 없자 회사측에서 사진관을 접겠으니 그더러 2007년 1월부터 영업사원을 하란다.

소화의《도꾜 꿈》에는《영업사원》이란 단어가 없다.

소화는 언녕부터 사진관을 꾸리려는 머리속의 화폭을 바탕으로 2007년 3월에 아예 사진관을 인수받고 독립으로 사진관을 경영했다. 돈이 없으니 벽문을 뜯어서 작업시설로 꾸미고 돌아가며 친구들의 돈을 빌려서 집세를 내고 설비를 가설했다. 나중에 빌린 돈을 갚자고 하니 빚문서가 첩첩하기로 누구 돈부터 먼저 갚아야 할지 어리둥절해졌다.

시각문화의 아름다운 경지는 참말로 황홀했다.

2009년 8 월 소화는 주식회사를 설립, 친구의 성원으로 아름다울 가(佳)에 화할 화(和)로 작명했다. 《佳和》의 화는 소화도 상징하고 일본도 상징하기에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사를 만든다는 의미라고 소화는 부언했다.

그의 희망찬 야심에서 자기 완성을 위해 앞을 내다보는 30대 사나이의 웅심을 읽을수 있었다.

동생과 함께 《기억발전소》를 가동한다.

소화는 2011년3월에 길림예술학원 미술학부를 졸업한 동생 변소명까지 일본에 데려가서 함께 세계적인 사진왕국에서 사진문화의 거두로 되려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2013년 11월, 높아만 가는 고객들의 수요에 만족을 주고저 매달 월세만 32만엔인 90평방짜리 영업집을 임대맡고 도꾜에서 중국인으로 규모가 가장 큰 사진관(스튜디오아키라)으로 탈바꿈 시켰다. 스튜디오아키라의 아키라는 동생 소명의 명(明)자 일어 발음이란다.

스튜디오아키라를 찾는 단골 손님은 조선족이 30%, 재일 한족이 60%, 타이 등 기타 나라 손님들이 10%라 한다.

《중국가격 + 한국기술 + 일본서비스》 = 성공

이는 스튜디오아키라의 경영공식이란다.

그의 경영공식에서 글로벌시대의 기업가 안목을 알게 되고 그들의 성공노하우가 쉽게 안겨왔다.

필자는 미술학부를 졸업한 그의 동생의 평가를 들어 보았다.

《형님은 아주 멀리 내다보는 사장입니다. 형님은 저의 선생으로서 저의한테 상당한 조건을 만들어줍니다.》

《바램이라면 작품창작에서 경험에만 의거하지 말고 관념을 갱신하고 좀 더 감성적인 작품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동생은 형님이 확실히 남들이 말하는 《신심으로 가득찬 사장》이 틀림 없단다.

예술을 창조하는 사진가로

예술은 과학과 함께 인간을 진화시킨다.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키는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소화는 예술을 기반으로 사진을 만드는 사람을 사진사와 사진가로 분류했다.

즉 돈벌이를 목적으로 사진을 만들면 사진사고 파는것만이 아니고 사진이란 시각문화로 예술을 창조하면 사진가란다.

사진이란 시각문화의 아름다움은 특징과 그 시대의 분위기, 만든 사람의 배경 등을 통해 그속에 담긴 뜻을 찾는다.

《사진사는 사진만 잘 찍어서 팔기만 하면 된다지만 사진가의 머리에는 항상 대중은 어떤 사진작품을 원하며 현대인과 현대사회 문화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가? 팔리고를 떠나서 공짜로 준다고 해도 상대방이 나의 작품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을가? 등 많은 의문을 품고 들에, 산에, 거리를 활보하면서 사진을 찍고 또 찍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기 작품에 대해 실망하고 심취를 넘어 도취되고 자신만의 최고 작품으로 치부하며 만족을 감수한다.》

《일본의 제1 조선족사진가로 소화의 꿈은 세계적인 사진기생산 왕국에서 카메라맨으로 나서고싶고 이름을 날리기싶다》며 기어코 전 일본사회에 도전할 뜻을 재삼 밝혔다.

사진문화는 긍정의 힘을 심어주는 사회의 예비기업이며 사진문화예술은 《나》를 들여다보며 삶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재발시키는 《기억발전소》이다.

《사람마다 사진으로 쓰는 자서전과 시대의 력사로 개개인의 기억들이 모여서 전기를 돌리면 긍정과 희망의 불을 밝힐수 있다》는 소화는 《기억발전소》 모터를 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갈등

사진가의 갈등

내가 하고싶은 일, 내가 할수 있는 일을 잘 선택했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기에 정말 행복하다는 소화가 현재 모대기고있는 갈등도 회피없이 자백하였다.

가족적인 갈등

ㅡ자식교육과 효도문제로 하여 일은 일본에서 하는데 일본에서 살아야 하는가로 고민하고있다. 일본에 오기전에는 절대 국적을 안 딴다고, 일본에 와서도 귀화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데 두 딸애의 교육을 중국에서 하겠다는 생각이 없다. 자녀교육은 일본이 한국보다 앞자리를 섰다는 그의 생각이다.

ㅡ 제일 가슴아픈 문제가 부모효도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있는 부모들을 1년에 겨우 두번 정도로 만난다. 만약 부모들이 80세까지 산다고 해도 이제부터 부모를 만날 차수가 너무나 적어서 진정 슬프다. 그렇다고 일본에 모셔오려니 아직은 현실적이지 못되고 부모들도 일본에 오려 안한다는것이다.

ㅡ 부모들이 한국에 정착하는것도 문제다. 의료시설을 보면 한국이 중국보다 좋다. 그렇다고 한국에 계속 있자면 고향에 있는 근사한 집을 두고도 세집살이를 해야 하니 말이다. 고향에 돌아가자고 해도 고향사람들의 99%가 고향을 떠났기에 돌아가도 외롭다. 연변이라면 100%로 돌려 보내련다. 나는 연변에서 살아보고싶은것이 꿈이였기에 대학 지망도 연변예술학원을, 노래를 불러도 연변의 해란강 노래와 《설날이 왔어요》를 부른다. 매체에서 산재지역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눈길을 돌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업적인 갈등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작품에 만족된다며 문자로 감사를 보낸다. 그런데 일부 손님들은 마음을 먹고 열심히 작품을 만들었는데도 아니라며 리해하지 못할 때 정말 안타깝다. 눈을 감고 팔면 돈은 버는데 그것이 아니다.

손님의 요구대로 만들어 줘야 만 하는 《아닌 작품》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민족적인 갈등

ㅡ 조선족이기때문에 일을 해냈고 또 조선족이기때문에 막히는 일이 있다.

우리는 중, 한, 일 3개 사회가 겹친데서 살고있다. 우리는 중한문화를 알기때문에 사회활동에서 일본사람들의 경어(敬語)까지 사용할수 있어 일본인들과 사소한 일에서도 극단화를 줄이고 최대한 소화시킬수 있다. 그러기에 재일 중국의 기타민족들은 우리를 따라 오지 못한다.

조선족이기때문에 각국 시장을 고찰하고 새로운 《바늘구멍》시장까지 개척할수 있다. 일본인이나 재일 중국의 기타민족들은 우리보다 못하다.

조선족이기때문에 막히는 일도 많다. 좋은 잡지, 좋은 광고, 좋은 작품을 만들려니 중문과 중어수준이 낮아서 문제로 된다.

조선족들이 배울 점이 너무나 많다.

지식보다도 인문관계에서 말이다. 우리가 존경을 받는 민족이 되려면 대방을 잘 리해하고 잘 배려해야 하며 허심하게 대방의 우점들을 따라 배워야 한다. 두루 살펴보면 조선족들의 생활습관이나 기타면에서 더한층 대방을 리해하고 발언 해야 하는데 주관적인 판단이 너무 앞선다.

한국에 가보니 조선족들이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는 때와 장소,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아무데서 불만을 표하고 대방에게 불쾌한 막말을 한다.

 재일 치바옥타문예야회에서

가장 기쁜 일이 무엇인가는 물음에 《안해를 맞아들인 일이고 한걸음한걸음씩 성공의 기쁨을 맛볼 때, 돈을 벌었다기 보다 나의 작품과 상품에 손님들이 만족을 느낄 때이다》고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에 《행복은 년령변화에 따라 변화되는데 아직까지는 돈을 벌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수입이 있어서 좋지만 부모와 자식이 건강하고 가족간에 서로 모순없이 잘 꾸며지는 것이다.》고 말하는 소화이다.

필자는 소화를 기쁨과 행복을 숨김없이 드러낼줄 아는 사람이며 평생 자기 완성을 위해 앞만 바라보는 사람이며 시각문화의 아름다움 행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멈출줄 모르는 사람이며 후회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오기활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룡정시문화관 관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리광평씨는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집단이민사 연구에 떨쳐나섰습니다. 그는 자비로 오토바이, 사진기,비디오 등을 갖추었습니다. 회갑나이를 넘긴 그가 수십킬로그람 되는 사진기재 들을 지니고 수만킬로메터를 달린다는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매년 ...
  • 2006-03-02
  • [한겨레] 재일동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권투영웅’ 홍창수(31) 선수가 27일 세계 챔피언의 영광과 짐을 스스로 벗어던졌다. 홍 선수는 이날 세계복싱평의회(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 도전자인 동급 1위 호세 나바로(24·미국)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꺾은 뒤, 타이틀 반납을 선언했다. 그는 “...
  • 2006-03-01
  • [img count='1' width='400' img] 28일 2005전국10대법관으로 당선된 연길시 인민법원집행국부국장 비운룡이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 2006-03-01
  •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 단주앙번 일가견 기자는 25일 오후,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이며 현재 북경민족대학박사생 도사, 2년간 운남성 성장조리직을 맡았던 단주앙번(장족)을 만날수 있게 되였다. 3년전 처음 연변을 다녀온적이 있는 그는 먼저 연변조선족의 미풍량속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특히 《...
  • 2006-02-28
  • 26일, 최고인민법원, 인민일보, 중앙텔레비죤, 법제일보에서 련합으로 주최한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평의활동이 북경에서 있었다. 연길시인민법원 형사재판정 부정장 비운룡이 2005년 길림성10대 우수법관에 이어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으로 평의되여 최고인민법원 원장 소양으로부터 《금법추상》(金法槌奖)을...
  • 2006-02-28
  • [한국일보 2006.02.26 18:19:24] “그는 한 많은 이국 땅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25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젠덴쓰(全電通)노동회관에서 지난해 12월 28일 타계한 재일동포 고 김경득(金敬得)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한국인과 일본인, 민단과 조총련을 가리지 않고 회장...
  • 2006-02-27
  • [원제: '신선족'으로 중국서 떳떳이 살고싶다] -흑룡강지역 첫 한국류학생 김재윤씨 최근년간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이 많아지면서 '신선족'이라는 신조어가 동포사회에서 류행되고있다. 한국 웹사이트인 네이버 오픈사전에 따르면 신선족을 "류 학, 현지 근무 등의 명목으로 중국으로 건너왔다가 아예 중국땅에 눌러앉아 살...
  • 2006-02-27
  • 국내 최장기 연재 집필 이규태 떠나다 [조선일보 2006-02-25 22:03] 조선일보 이규태(李圭泰·73) 전 논설고문이 25일 오후 4시쯤 지병인 폐암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자 본지에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 지난 23일자 신문에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사를 싣기까지 모두 6702회...
  • 2006-02-26
  • 얼마전에 연변의 한 문학지가 마련한 모임에서 성보호텔 정영채회장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여러 말이 오간 가운데 연변은 일본, 한국과의 물류관문으로서 장차 동북아물류중심이 될 복된 고장이라는 얘기와 더불어 지금은 문화인들이 어렵지만 이렇게 어려움속에서 성취를 해야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는 정회장의 말씀이 인상...
  • 2006-02-24
  • 민족력사에 혼 앗긴 리광인씨 《잠적》 10년동안에도 수백만자 력사서 써내 력사학자 리광인씨한테서 도합 4권으로 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한국학술정보[주])를 받아든 기자는 책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느낄수 없었다. 《남성편》(1, 2권), 《녀성편》, 《소년아동편》으로 묶어진 책은 총 125만자, 140편의 전기가 수...
  • 2006-02-2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