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단군문학상 수필상 수상자 장정일 수필가.
“예전에 동료들이 그러더라구요. 저의 사무실을 노크할 땐 웬지 모르게 긴장된다구요. 제가 그렇게도 다가서기 어려운 사람인가요? 사실은 면양같이 순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늘 차분한 말투와 정제된 물처럼 완벽을 추구할것만 같은 그의 이미지는 때론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어려운 인상으로 비쳐질 때가 많았다. 아마 필요한만큼의 얘기만 하고 쓸데없는 잡담을 삼가하는 그의 성격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면양”같이 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바로 제1회 단군문학상 수필상을 수상한 장정일수필가이다. 수필집의 제목- 《세모의 설레임》이 말해주는것처럼 그는 설레임을 안고 사는 사람, 마음속에 늘 격정과 랑만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한 설레임과 격정과 랑만은 그의 수필들에서도 가감없이 표현됐다.
사실 장정일수필가의 수필창작은 의도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가 한창 현직기자로 뛰고있던 80년대, 문화대혁명이후 다시 흥기한 조선족문단은 소설과 시가 주류를 이끌고있는 이른바 문단의 생태불균형현상이 나타났다. 평론이 적고 개인의 독립적인 사고를 피력하는 칼럼은 거의 불모의 상태였으며 수필도 희소했다. 하여 장정일수필가는 《연변일보》에 “사색의 여울목”이라는 란을 설치하여 신문학과 문학을 접목시켜 부드러운 필치로 대중에 접근할수 있는 칼럼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려는 노력을 했다.
“나무는 그 뿌리와 줄기도 튼실해야 하지만 가지가 풍성하게 뻗어야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할수 있습니다. 우리 문단도 마찬가지여서 소설과 시가 뿌리와 줄기로 문학의 전반을 이끈다면 수필도 나무의 가지처럼 잘 자라야지 문단의 생태가 평형을 이룰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그동안 장정일수필가는 수필창작, 칼럼집필 및 수필평론을 평행적으로 이어가면서 모름지기 우리 민족 문단생태의 균형을 맞춰가려 애썼다.
그의 수필에는 또 한가지 빼놓을수 없는 주제가 있다. 바로 예술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랑이다. 중앙소학교 3학년을 다니던 장정일수필가는 우리 민족 저명한 작곡가 정진옥이 이끄는 연길시 소년합창단 단원으로 뽑혔는데 그것을 계기로 그의 한없는 음악사랑이 시작됐다. 그러던 중학교시절, 바이올린을 욕심내는 손자가 안쓰러워 할머니는 시가지 살림인데도 돼지를 키워 팔아서 돈 15원을 쥐여주셨다. 거기에 어머니가 8원을 보태주어 그는 끝내 그렇게도 갖고싶었던 바이올린을 살수 있었으며 당시 예술학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리명헌선생한테서 1년, 이후 리명헌선생의 제자로부터 1년 동안 바이올린공부를 했다. 그후로는 사정이 여의치않아 더는 정규적인 음악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예술에 대한 애착때문에 그는 부지런히 예술의 자양분을 흡수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장정일수필가는 예술의 모든 분야는 통일을 이루며 내적으로 련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술의 깊이에 심취해있지 못하면 문학의 깊이도 운운할수 없다고 믿는다 했다. 그 또한 문학의 길을 걸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어쩌면 그것보다 더 열렬하게 음악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했다며 그가운데의 에피소드는 밤을 새도 모자랄것이라고 평소 과묵했던 모습과 달리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그의 일과는 책을 읽고 산행을 하는 외에도 국가대극원사이트에서 교향음악을 찾아 감상하는것, 이모저모의 공연과 전시회를 찾아다니는것이 주를 이룬다. 뿐만아니라 텔레비죤에서 방송되는 음악프로는 빼놓지 않고 시청한다.
초중시절의 그는 시 한수에도 밤잠을 설치던, 소년관람불가의 영화를 보려하다 학생증을 압수당하던 불온의 소년이였다. 고래희를 넘긴 나이지만 그 호기심 왕성하고 꿈에 설레여 하던 소년은 여전히 장정일수필가의 내면에 살고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의 설레임이 시작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거기에서 살고싶다고 말한다.
“글은 그 사람(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장정일수필가에게는 그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그만큼 우리는 그의 수필을 통해 인간 장정일을 훤히 들여다볼수 있다.
연변일보 글 사진 박진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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