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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에 잠식된 조선족 원사 김녕일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2월2일 14시55분    조회:6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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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녕일

           연구실서재에서
간발의 차이 때문에 그는 레닌(列寧)과 서로 같은 날에 만나지 못했다. 레닌은 러시아공산당의 수령으로,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추앙하는 위대한 도사. 나중에 부친은 ‘레닌’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고 또 하루라는 의미의 하나 ‘일(一)’을 보태여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녕일(寧一)’, 조선족 치곤 어딘가 희소한 이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저의 생일이 양력으로 4월 21일인데요, 레닌의 탄생일보다 단 하루가 빨라요.” 김녕일은 이렇게 그의 이름에 담긴 비화를 이야기한다.

한겨울이지만 따뜻한 햇살이 차창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북경 서쪽 변두리의 호텔에서 만난 김녕일은 인제 60대에 접어드는 원숙한 학자였다. 회의 참석차로 북경에 잠깐 들린 그는 시도 때도 없는 전화 벨 소리에 자주 인터뷰를 끊어야 했다. 그 무슨 프로젝트요, 논문 심사요 하는 단어들이 대화에서 심심치 않게 뛰어나오고 있었다.

김녕일은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의학과학원의 바이러스학 연구원이자 전문가이요, 박사 지도교수이다. 논문 400여 편, 양성한 석․박사 300여명 그리고 완료된 연구과제만 해도 67건… 이런 따분한 숫자로만도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다망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얼마 전 중국공정원 원사(院士)로 선정되면서 그는 더구나 바삐 돌아치는 듯 했다. 원사는 국가에서 설립한 과학기술 영역의 최고의 학술칭호로 종신영예이다.

잠깐, 어느 작명원(作名院)의 도인이 이 기회를 빌어서 “사주팔자는 선천 운명이요, 이름은 후천 운명이요” 하고 성명학(姓名學)을 운운할 법 한다. 기실 김녕일의 청년 시절의 ‘하향’ 경력이나 훗날의 학문을 닦던 과정은 그의 이름과 한데 잇기 어렵다.
 
새로 공정원 원사로 선정된 길림성 원사들과 길림성성장 당위서기와 함께
어찌하거나 김녕일 본인은 원사의 월계관을 머리에 얹게 된 영예를 제일 먼저 부모에게 돌리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김녕일을 대신하여 부모는 그의 딸 둘을 도맡다시피 키우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 큰딸은 국내의 명문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작은 딸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단다.
“부모님이 뒤에서 항상 말없이 밀어줬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거지요.” 김녕일은 관절통 때문에 늘 고생하는 어머니를 이야기하다말고 울컥한 듯 잠시 말을 멈춘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사랑은 누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실제로 아들의 이름에 담은 부모의 사랑의 소원은 ‘바이러스’처럼 줄곧 김녕일을 잠식하고 있었다. 원사라는 이 화려한 ‘피라미드’는 실은 이런 ‘바이러스’와 엮인 이야기로 쌓이고 있었다.
 
바이러스1
1990년, 김녕일은 일본 교토대학 바이러스연구소에 가서 에이즈 백신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우두(牛痘)에서 추출한 바이러스에 에이즈의 유전자를 넣어 만든 바이러스가 에이즈의 예방에 가능한가를 검증하는 프로젝트였다. 이에 앞서 일본의 박사 2명이 이 과제를 연구했지만 그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김녕일은 그때의 프로젝트에서 대두한 문제점을 한마디로 콕 집어내고 있었다. “백신을 만들 때 외래의 바이러스 유전자가 들어가면 어떻게 높은 효율로 그걸 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자아 증식이 가능한 세포와 달리 숙주의 존재가 필요하다. 숙주의 세포 표면에 붙어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주입하고 세포소기관을 이용하여 새로운 바이러스를 복제하며, 복제된 이 바이러스가 다시 세포 밖으로 나오는 순환을 반복한다. 이때 백신의 역할은 바이러스 자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세포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바이러스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세포막에서 그 어떤 작용의 메커니즘을 가지는 것이다.

김녕일은 일찍 1985년부터 새로운 백신 개발에 종사하면서 유전자와 관련한 각종 소프트웨어의 배합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공동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은 것도 실은 논문에 드러난 그의 이런 연구 수준이 작용하고 있었다. 나중에 김녕일은 HIV-1, HIV-2의 유전자를 이용하여 다종 구조단백질, 면역조절 단백질을 대량 발현시키는데 성공한다. HIV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를 말하며, 에이즈는 HIV에 감염되어 면역세포가 파괴되어 면역기능이 떨어짐으로써 생기는 후천성 면역결핍 증후군(AIDS)을 말한다.

교토대학 바이러스연구소는 이듬해 곧바로 김녕일을 일본 문부성 교수로 초빙했다. 초빙학자로부터 초빙교수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김녕일은 연구소에서 석사와 박사 각기 1명을 지도한다. 공동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연구소는 김녕일을 수석과학자로 초빙할 의향을 밝혔다. 연구소 소장과 동일한 수준의 노임을 지불하고 주택을 무상 제공하는 등 현혹할 대우가 잇따랐다.

“그런데 하고 싶은 연구에 몰두하는 데는 아무래도 제한이 있었지요.” 김녕일은 나중에 일본 체류를 포기한 원인을 이렇게 한마디로 일축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연구자가 선정하는 게 아니라 연구소나 회사의 몫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른다면 성공을 위해서는 한계적인 시간과 정력을 여러 곳에 투자하기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어느 한곳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년을 즐겁게 보내는 김녕일원사의 부모
솔직히 김녕일 본인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의 부친 이야기의 복제판으로 들리고 있었다. 부친 김광우(金光宇)는 연변대학 제1기 물리학과 졸업생으로 통화에서 물리교원으로 있었다. 그는 1950년대 통화시 교육국의 공무원으로 취임할 기회가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물리를 가르치는 게 최대의 낙이라고 하면서 일언지하로 이 청구를 거절했다고 한다. 눈앞의 작은 재미와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다보면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친의 이런 가치관은 ‘바이러스’처럼 아들에게 ‘전염’되지 않았을지 한다. 김녕일은 일본행을 계기로 또 한국 서울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에 가서 에이즈 백신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최종적인 귀소(歸巢)는 나중에 그를 ‘원사’로 성장할 환경을 만들어준 군사의학과학원 군사수의연구소이었다.

정말이지 바이러스는 마땅한 숙주가 없이는 생존, 증식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바이러스2
1982년 김녕일은 연변농학원을 졸업한 후 학교에 조교로 남았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어깨를 으쓱하던 그 시절 대학교 교사는 더구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김녕일은 불과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군사수의대학의 석사과정을 밟는다.

사실상 학문에 대한 열망은 그가 일찍 하향생활을 할 때부터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1974년 7월, 김녕일은 중학교를 졸업하자 그때 그 시절의 여느 졸업생처럼 농촌으로 내려갔다. 그는 통화 부근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면서 하향생활을 했다. 산에 다락 밭을 만들고 평야에 관개수로를 만드는 등 따분하고 힘든 ‘재교육’ 생활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강냉이밥을 대짜의 큰 그릇으로 먹어도 맨 날 배가 고팠어요.” 허기에 시달리던 기억은 김녕일의 하향생활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고 있었다.

쇳덩이도 삼키면 녹일 수 있다고 하는 열혈의 젊은 시절이었다. 배가 고파도 정말 고팠다.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날벌레라도 집어먹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한 배고픔은 창자가 아닌 머리를 아프게 갉고 있었다.

“앞으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어요.”

무연한 옥수수의 ‘수풀’에서 앞날은 한보 밖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순 노동이 지속되는 다락 밭에 미래를 묻고 관개수로에 미래를 흘러 보내기에는 젊은 나이가 너무나도 억울했고 또 답답해서 병이 날 지경이었다.

김녕일은 저녁이면 등잔 불 아래에서 《모택동선집》과 《마르크스-엥겔스선집》, 《레닌선집》, 《반듀링론》 등 서적을 탐독했다. 그 시절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던 이런 사회과학 서적은 그에게 궁극적으로 자연과학 연구의 길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 계기로 되었다.

이때부터 김녕일은 향후의 진로에 하나의 깃발을 뚜렷하게 세우고 있었다.

“그 무슨 결론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자연과학은 바로 근거와 증거로 문제를 설명하고 있지요.”

1977년, 무려 10년 동안 중단되었던 전국 대학입학 통일시험이 시작되었다. 김녕일은 대학 지원란에 청화대학과 길림대학 등 명문대학을 기입했다. 일찍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기로 정평이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동물 ‘바이러스’와 떨어뜨릴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었던가, 종국적으로 그는 연변농학원 수의(獸醫)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생활은 김녕일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재교육’의 현장인 옥수수 밭에서 그가 정할 수 있은 목표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연구원들과 함께

“그때 유감스러웠다면 시초의 목표를 대학으로 정한 거지요. 목표가 너무 낮았습니다.”

김녕일은 석․박사의 2차적인 강화훈련은 그의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바이러스학 영역에 몰입, 미생물 영역에서 전염병과 면역을 결합한 연구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석사학위의 과정으로서는 학문연구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어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목표를 확실하게 세우고, 또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강화 과정으로 자체 수준을 높여야 해요.”
새로운 바이러스가 자기집체의 메커니즘에 의해 서로 집합되어 성숙되듯이 김녕일은 어느덧 바이러스학과 인수(人獸) 공환(共患)의 병원체(病原體) 분야에서 이름난 학자, 전문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바이러스3

세계 3대 과학저널인 ‘네이처(Nature)’, ‘사이언스(Science)’ ‘셀(Cell)’에 자신의 논문을 싣는 것은 모든 과학자들의 하나같은 목표이다. 김녕일은 상기 과학저널에 모두 그의 유수의 논문을 게재하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로 부상했다. 지난 32년 동안 그는 18종 바이러스의 특성과 면역 기능 등을 연구했으며 3종 바이러스 단백질발현 벡터 계통의 플랫폼을 구축했다. 김녕일이 만든 이런 플랫폼은 국내외에서 모두 업계내의 최초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과학연구의 길에서 미세한 변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하지요.” 김녕일은 후학들에게 그의 성공의 경험을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과학연구는 갈수록 여러 학과의 교차와 융합 작업을 필요로 하고 있다. 실제로 김녕일은 생물학과 유전공학, 분자물리학 등 다양한 학과를 섭렵하고 있었다. 작은 변화가 누적되면 나중에 시너지의 큰 변화를 져올 수 있다는 게 그의 일가견이었다. 아주 작은 개념 하나가 결과적으로 큰 성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1998년부터 김녕일은 동물의 유전자 기능과 관련하여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암세포에는 영향을 주지만 정상세포에는 영향이 없는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암치료 연구에서 획기적인 계기로 될 수 있는 이 프로젝트는 수천만원의 자금이 투입,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걸 생각해야 하고 남이 뭔가 할 때는 그 일을 끝내야 하지요. 또 남이 걸을 때는 뛰어야 합니다.”

김녕일은 1년 365일을 거의 모두 실험실에서 보낸다고 한다. 그에게 출장은 곧 휴식이었다. 아직도 거의 날마다 자정이 넘도록 공부를 한다고 한다. 관련 여러 학과의 최신 정보와 연구 성과는 그가 걸탐을 하는 내용으로 되고 있었다.

원사가 아닌 그제 날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학생의 모습이 투영처럼 비껴오고 있었다. 레닌의 출생일보다 하루 빠른 그제 날의 ‘유감’도 이름처럼 그냥 사라지지 않고 있는 듯 했다. 김녕일의 학문의 만족 없는 또 하나의 ‘유감’은 그가 생활신조처럼 간주하는 좌우명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겸허한 사람이라면) 알아도 모르는 척 하고, 잘나도 못난 척 하고, 있어도 없는 척 해야 합니다.”

기실 원사를 신청할 때 그는 이미 발표한 690여 편의 논문을 줄여서 400여 편으로 기입했다고 한다. 논문 숫자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떠들썩하게 제 자랑을 늘여놓는 것 같아서 그랬단다. 남을 돕는 것도 마찬가지, 현재 그가 음으로 양으로 자금후원을 하고 있는 학생들만 해도 20여명 된다고 한다.

김녕일은 말과 행동으로 그의 생활신조를 지켰고 또 이 생활신조로 남을 대했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원사는 공식적인 정년퇴직이 70세이다. 김녕일은 나중에 퇴직하게 되면 학문에서 대를 이을 더 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고 말한다. 기력이 다할 때까지 학문 연구의 ‘굴레’를 달갑게 쓰고 있겠다는 것.

그러고 보면 김녕일은 학문이라는 ‘바이러스’에 여러 가지로 깊숙이 잠식된 원사였다. 정말이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거인’에게 어떤 ‘백신’인들 유효할까?…*

<중국민족>잡지 2016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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