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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고 정경락선생,신문사업에 바친 일편단심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9월16일 17시07분    조회:7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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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일 오후 1시 20분경 페암과 박투하던 정경락선생은 치료에 효험을 보지못하고 향년 64세에 총총히 우리곁을 떠나가셨다. 그러나 일편단심 당에 충직한 신문사업일군으로서 중국조선족신문출판업의 개혁과 혁신발전을 위해 힘다한 그의 뛰여난 공적은 영원히 사책에 기록될것이다.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내드린 지우 오기활선생에 따르면 선생은 림종시에 "추도식에 술을 붓지 말고 생화 64송이를 놓아달라."고 부탁하셨다. 자신의 향년 64세를 뜻하시는것이였다. 몇년전 선생의 아버님이 장례식 때도 고인의 향년 84세를 뜻하는 의미에서 생화 84송이를 올린것이 미담으로 전해졌다. 항상 시대를 따르고 센스가 있는 선생이시다.

선생은 항상 시대의 흐름을 미리 읽고 대국면(大局)의 큰 틀에서 신문출판이나 보도의 방향을 잡고 방안을 기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따라서 선생의 앞선 사유는 신문계에 정평이 나있었다.

선생은 조선문신문 4대지에서 제일 젊은 신문인 길림신문의 개척과 발전에 두단계로 나누어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나는 1990년 3월부터 1995년 2월까지 5년간 길림신문사 부총편집으로 사업하실 때였고 하나는 퇴직하신후 길림신문사 고문으로 활약하실 때였다. 근 20년간 나는 선생의 가까이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함께 길림신문의 격변기를 보냈다.

길림신문 본사 장춘이주에 로심초사

1990년 3월 선생이 길림신문사 부총편집으로 부임했을 때 마침 신문사 지도부는 본사 장춘이주를 본기 지도부의 력사적사명으로 간주했다. 선생은 이주기획, 당과 정부해당부문의 청시비준, 신문사내 이전준비사업, 사상동원 등에 적극 나섰다. 장춘이주의 구체사업을 책임진 선생은 장춘에서의 신문의 판면제작, 인쇄 및 발행을 “길림신문의 제2차 창업”이라는 기치로 들고 직원들 사상동원을 하고 구체조직과 지도를 했다.

 

 
길림신문 본사 장춘이전을 위해 1991년 정경락부총편집(우1)은 직접 이 사업을 진두지휘하였다. 사진은 당직을 서러 간 팀원들과 함께 집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있는 장면. (우2는 필자임)

 

당시 연길에 있는 전체 기자편집들을 3개팀으로 편성하여 한달씩 장춘에 가서 당직을 서게 했다. 장춘시 향운가의 헐망한 사무실 한층을 빌어 한팀이 한달씩 당직을 서면서 십여명 팀원들이 집체화식을 하고 자면서 신문을 꾸렸다. 마침내 1993년 1월 1일, 길림신문은 마침내 장춘에서 출판, 발행되고 1995년 봄에는 성당위와 정부에서는 길림신문 장춘이주를 정식 결정했다.

길림신문의 장춘이주는 당시의 사상해방의 동풍을 타고 대담히 장춘으로 진출한것이 큰 역할을 놀았으며 이 과정에 직접 현장지휘를 책임진 선생이 중요하고도 관건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신문사의 다년간 숙원이 이루어질 때 선생은 사업의 수요로 다른 단위로 전근하게 되였다.

기획보도의 물고를 튼 사람, 신문개혁의 기수

선생은 타고난 신문인이고 신문기획자였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기획하고 그걸 또 부지런히 실천에 옮겼다.

원 길림신문사 부주필로 선생과 함께 사업한적이 있는 리원철선생(현재 연변인민출판사 부사장)은 "지난 세기 90년대 길림신문의 시리즈 물꼬는 정경락 당시 부총편집이 기획, 추진한 ‘2000년으로 달리는 사색’(1991. 7—1991. 11)의 한 부분인 ‘인기화제로부터 본 연길현상’으로부터 텄다고 할수 있다. 그때로부터 길림신문 인기시리즈는 급물살을 타 굵직굵직한 시리즈가 기획되고 륙속 독자들과 만났다."고 회고하고있다.

 

 
고 정경락선생은 고문으로 길림신문 "연변25시"특간의 취재편집을 지도했다. 사진은 특간 관계자들과 도시락으로 정심식사를 하고있는 모습 (오른쪽 두번째) (오기활 제공)

 

길림신문은 개혁개방이 금방 시작된 훈풍을 타고 태여나 항상 열린 사유, 앞선 사유로 조선족사회의 여론을 선도하며 달려왔다. 특히 길림신문의 기획계렬보도는 "개혁개방후 중국조선족력사를 하나의 산맥으로 보여준다."고 평가받고있다. 길림신문은 시대흐름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참신한 기획보도들과 무게있고 깊이있는 계렬보도로 특색을 갖추었다.

선생은 기획보도집필시 사상을 내놓고 정예부대로 필진을 짠다음 마지막 원고를 다듬는 작업을 했다. 1991년 7월, 인기현상으로부터 본 연길현상은 연길시 각 부분을 나누어 기자들을 취재하게 하고 직접 취재일선에서 지휘했다. 특히 보도에서 독자와의 호흡과 보도후 효과를 중시하였다. 그는 신문을 꾸림에서 틀을 대담히 깰수 있다는것을 배워주었다. 그날  8면 전부를 이 계렬보도로 꾸렸다. 또 기자들은 신문이 출판된 날 몇천부의 신문을 안고 연길시 거리에 나가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배포하였다.

시민들은 놀람과 희열로 우리가 나누어준 신문을 보면서 연신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이 기획보도는 전반 연변신문계를 들썽했으며 연길시 시장은 직접 우리 기자를 시정부에 초대하고 연회까지 차렸다. 그만큼 길림신문의 일대 특색인 시리즈와 기획보도의 초석을 마련한 사람이 정경락선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직후에도 선생의 앞선 사유와 신생사물접수소화능력은 젊은 세대들보다 오히려 앞서군 했다.

길림신문 개혁의 "심수특구"로 불리웠던 "연변25시" 특간은 고 박금룡지사장이 이끄는 연변분사가 해낸 걸작이였다. 알고 보면 이 막후에는 당시 길림신문사 고문으로 계신 선생의 기획과 지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문매대에서 파는 당보, 백성의 즐기는 신문"을 취지로 한 길림신문 "연변25시" 특간이 발간되였다. 이 특간은 "백성중심 백성참여 백성봉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층에 심입하고 독자의 관심사에 중점을 두고 여러가지 형식으로 백성을 참여시키는 새로운 신문을 꾸리는 바람을 불러일으켜 조선족신문계에 소문났다. 백성의 열점과 애로문제를 관심사로 반영하고 정확히 여론을 인도하며 적극적으로 사건에 참여하고 해결하는 길림신문의 대표적인 계렬보도였던 방문취업보도 등 일련의 보도기획과 추진에 선생은 관건적인 역할을 놀았다.

길림신문 온오통합방안을 비롯, 길림신문 인터넷의 브랜드인 포럼 전문란건설, 길림신문과 연변도서관 전국문화정보 교환공정 등 온라인 길림신문의 발전에도 선생은 중요한 기여를 했다.

신문사업에 대한 일편단심

선생께서 마지막에 나에게 보내온 워챗메시지는 연변팀이 경기에서 승리한 이튿날이다. "15년전의 연변오동팀을 보는것 같았소. 각 언론의 반영을 분류별로 종합하면 볼게 있을것 같소. 중국구단은 돈축구가 아닌 진짜 축구를 갈망하고있소. 그게 바로 우리요."라고 하면서 "연변팀에 대한 국내 여론의 평가와 종이신문 페간, 과연 그렇게 중요할가."라는 위챗기사를 추천해주셨다. 병환이 위독하면서도 항상 신문에 관계되는 조언을 하시거나 좋은 자료들을 보내주셨다.

 

 
평소에 기층에 내려가 조사연구하는 습관이 있는 고 정경락선생(좌)은 지난해 가을 병마를 무릎쓰고 농촌마을 전간에 내려가 답사하고 있다. (오기활 제공)

 

지난 5월, 내가 선생을 위문했을 때 그것이 마지막 영별일줄을 몰랐다. 통화출신 의사가 연길에 꾸린 진료소에서 항암중약을 링게르로 맞고있었는데 치료법이 독특하다면서 무척 희망에 찬 모습이였다. 항상 그러하듯 병문안할 때면 "일없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면서 남의 일 애기하듯 일축하고는 또 버릇처첨 신문에 관계되는 화제를 꺼내시군 하셨다. 이미 말기(나는 몰랐다)에 접어든 병환으로 한두마디 하시고는 줄기침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셨지만 호흡을 가다듬고는 또 말씀을 이으셨다. 나는 또 습관처럼 추진하는 일들을 말씀드리면서 선생의 조언을 경청했다. 선생께서 알심들여 기획한 인터넷전문란이 시작되지 못하고있는것과 조선 라진선봉 기획취재를 못한것을 몹시 아쉬워하셨다. 또 축구전문란에 대한 여러가지 조언도 하셨다. 얘기가 한시간가량 오가자 선생의 줄기침은 말을 할수 없을 정도로 더 잦아졌다. 하는수없이 다음번을 약속하고 나는 자리를 떴다.

병환에 계시는 동안 나는 선생을 여러번 만났지만 선생의 그 소탈한 성격이나 그늘 한점없는 어린이같은 환한 미소는 번마다 변함없었다. 척 앉기만 하면 첫마디부터 신문사업얘기를 하시는 선생을 보면 평소와 아무 구별이 없기에 불치병을 앓으며 하루하루 죽음과 사투하는 중환자임을 전혀 느낄수 없었다.

 

 
2007년 한국 취재길에서

 

선생은 나에게는 멘토와 같은 분이였다. 선생이 신문사 고문으로 계실 때는 물론 고문직을 내놓은후에도 나는 변함없이 신문사업을 두고 자문을 구하는것이 버릇처럼 되였다. 선생은 때때로 사업상 불찰이나 문제점이 있으면 정곡을 찔러 편달하기도 했다. 전화를 하거나 위챗을 보내와도 그 내용은 전부 신문 관련 이야기들이였다.

신문사업에 대한 선생의 열애는 지극했고 길림신문에 대한 선생의 애정은 특별했다.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바라는것이 없이 그냥 일편단심이라고 할수 있다. 길림신문사를 떠난후에도 우리 신문을 그냥 관심했으며 퇴직을 하신후에도 신문사에서 요청하자 선뜻 고문직을 접수하였다. 고문사업을 하신지 8년이 되자 선생은 "고문직이 없어도 신문사일을 힘껏 도울것이다."며 우리의 만류에도 극구하고 고문직을 내놓으셨지만 길림신문에 대한 관심과 지도에는 털끌만한 변함도 없었다.

선생은 애주가였다. 선생과 마시는 술맛이 특별히 좋은것은 비싼 술이나 고급안주가 있어서가 아니였다. 아주 간단한 안주지만 진짜 "안주"는 술상에서 끝나지않은 사업이야기였다. 술을 마시면서 샘물처럼 튀여나오는 아이디어, 명철한 분석과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조언으로 술 한번 함께 마시고나면 수확도 많고 머리도 맑아진다. 선생에게서 술은 알콜이 아니라 사업의 윤활제였다. 몇년전 선생이 광주에서 복장공장을 차린 아들의 사업을 도우러 간 동안 나는 선생을 오래동안 뵙지못했다. 마침 전국소수민족지역신문년회 참가차로 광동에 가게 된 나는 그 기회에 선생을 만나게 되였다.

이미 신문사 고문직을 내놓으셨지만 늘 전화자문을 구하던 나는 한번 또 만나서 조언을 듣고싶었다. 선생은 가이드가 되여 하루종일 심수특구를 안내하였으며 심수의 개혁개방정신과 신문사업을 련계시키며 이야기했다. 점심은 거리에서 빵으로 에우고 저녁엔 광주에 돌아와 우리는 조선족슈퍼에 들려 고추장, 오이, 명태 등 안주와 맥주를 사들고 내가 든 호텔로 돌아왔다. 우리는 침대우에 두다리를 토스리고 마주앉아 술잔을 마주치며 새벽까지 사업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이 림종시에도 지인 오기활선생의 손을 잡고 특별히 부탁한것도 다름아닌 채 끝내지 못한 신문사업이였다. 자료들을 컴퓨터 어디에 저장했으며 채 완성하지 못한 투병일기도 마무리해 줄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갑자기 병환이 위독해지면서 계획하던것을 마무리짓지 못한것이 너무 마음에 걸린다며 림종전까지 걱정하신것이였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

선생께서는 세상뜨기 며칠전 "세상 할일이 너무 많았는데 떠나려고보니 내것은 하나도 없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선생은 항상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베푸시는 분이였다.

며칠전 전화통화에서 선생의 부인 최옥자녀사는 "너무 잘해주시고 너무 자상하신 분이기에 더구나 잊지 못하겠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통화중 오열하면서 수차 말을 잇지 못했다.

 

 
애재중지 귀여운 손녀와 함께(유가족 제공)

 

최옥자녀사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것에 최선을 다하는 분이였습니다. 페암진단을 받은후에도 병치료에도 애쓰면서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사셨습니다. 병마와 싸우는 모든 체험과정을 일기로 남기셨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모든 최선을 다하셨지만 결국 떠나가버리고말았습니다. 책을 많이 보시는 분이기에 이미 말기인 자기병세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고 약이나 주사를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고 치료비를 아끼기 위해 비싸고 중복되는 치료는 아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절약한 치료비를 모은 1만 5천원을 아들이 매대 사는데 보태라고 내놓으셨습니다. 병환에 계시는 몸이였지만 늘 내 몸보신에 좋은 약을 사놓군했으며 늘 아침밥과 저녁밥을 해놓고 기다리셨습니다. 38년 결혼생활, 너무도 자상하신 분이니까 그래서 더 잊을수 없습니다. 림종전에 남편은 저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미안한것이 사업만 사업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공부뒤바라지를 제대로 못하고 재산을 남겨주지 못한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난해 9월부터 기침이 심해지더니 마지막엔 기침때문에 숨도 바로 쉬지 못했습니다. 병 발견시 이미 말기직전이여서 수술을 할수 없었지만 지인들이 도와주고 힘을 주었기에 2년남짓이 더 살수있었습니다…"

추석전야에 나는 지인이 보내온 선생의 생전의 사진을 바라보고있다. 사진속의 선생의 자애로운 눈매와 때묻지 않은 미소를 보니 선생은 마치 살아계시는것만같았다. 선생은 우리곁을 떠나가셨지만 길림신문에 남긴 선생의 정신적유산은 아니 우리 민족 신문출판업계에 남긴 귀중한 정신적유산은 영원히 력사에 기록될것이다.

추석을 맞으며 이 글을 선생님 령전에 삼가 올리는바이다.

                                                                                                      한정일 2016년 9월 14일 장춘에서

[고 정경락선생략력]

1952년 음력 8월 9월  연길현 태양향 횡도촌에서 출생, 연변사범학교 한어학부 졸업, 연변대학 조선어통신학부 졸업

선후로 연길현 세린하중학교 교원, 연변일보사 기자, 편집부 부장, 부총편집,

길림신문사 부총편집, 중공연변주위 지부생활잡지사 총편집, 편심, 연변주 출판협회 부주석,

연변주 제10기 정협위원, 연변주정협 문사위원회 부주임, 길림신문사 고문 등 력임

대표작 통신 "총서기와 백성" 론문 "신문과 관념갱신"

평론 "길은 책속에 있다"가 전국지방당간행물연구회 2등상

저서: "잊을수 없는 추억", "신문학과목" 등 편집출판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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