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오사까’스시 레스토랑트 전태호 사장의 이야기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 샬롯에서 ‘오사까’스시 레스토랑트를 운영하고 있는 전태호 스시맨(초밥스푸) 는 20여년간 ‘스시’라는 한 우물만 꾸준히 파고 있다. 그동안 그는 크고 작은 가게를 무려 11번이나 개업하고 팔면서 파란만장한 미국이민생활의 ‘드라마’를 쓰고 있다.
스시맨 전태호 사장
1961년 길림성 화룡현에서 태여난 전태호는 어릴 때부터 륙상을 비롯한 체육운동에 각별한 흥취와 재능이 있었다. 그는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승부욕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왔다.
83급 연변대학 체육학부를 졸업한 전태호는 룡정1중에서 체육교원으로 있다가 친구의 요청으로 1996년 8월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생선 잡을 줄 아십니까?
‘생선 잡을 줄 아는 유경험자 요구’한다는 ‘남가’라는 한일관의 구인광고 요구대로 전태호는 5백딸라나 주고 사사미칼(생선 얇게 써는 칼) 두 자루와 스시유니폼까지 쎄트로 사서 면접보러 갔다. 남사장이 이미 내장이 깨끗하게 손질된 큼직하고 신선한 연어를 앞에 내놓으며 전태호더러 한번 잡아보라고 했다. 그때서야 그는 일식집에서 생선 잡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였고 남사장 또한 왕초보는 사양한다고 했다.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생선 잡는 기술을 배워주시던가 아니면 사장님께서 저의 이 칼과 유니폼을 사주시던가 하십시오.” 전태호의 간절한 마음에 남사장은 그를 받아들였다. 전태호는 3주 동안 무보수로 허드레일을 하는 한편 세밀한 손재간이 있어야 하는 회 뜨는 기술을 배우게 되였다.
스시맨을 위한 료리솜씨 익히다
1996년 10월 전태호는 이윤영 스시사부의 요청에 의해 스시헬퍼(도우미)로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그린스보로에 갔다. 흥취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덕에 ‘킴스한식’에서 8개월 만에 주방장으로 진급했다. .
1년 뒤 가게주인이 바뀌면서 ‘하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고 30년 간 한국료리를 한 료리사 두분을 뉴욕에서 모셔왔다. 어깨너머로 두분의 료리솜씨를 흠모하며 보아오던 전태호는 반년 사이에 신용을 얻고 이들이 가보 1호로 여기는 30년 한국료리 밀방까지 전수받았다. 이는 전태호의 료리인생에 큰 도움이 되였다.
1998년 전태호는 유태인이 운영하는 ‘가보또’ 한일레스토랑트에서 6년 동안 주방장으로 일했다. 철저하고 혹독한 훈련과 로동을 거쳐 전태호의 료리솜씨는 스시와 한국료리 전문가 수준에 이르게 되였다.
대 사면 받고 영주권 취득
운동선수의 기질이랄가 모든 일에서 스타트가 빨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태호는 1996년 11월 9일에 일찍 영주권 신청에 들어갔다.
클린턴 대통령 임기에 불법체류자들이 벌금 1,000딸라만 내면 인터뷰신청 (I-485)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대 사면을 한다는 혜택이 있었다.
전태호는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4년 동안 그린스보로를 떠나지 않은 보람으로 2000년에 아주 보기 드물게 일찍 영주권을 취득하는 행운을 가졌다.
도적 강도 들이닥치는 비운 맞다
전태호는 ‘가보또’에서 일하면서 안해 먼저 미국에 입국한 처제에게 처음으로 자그마한 그로서리(잡화점) 가게를 인수해 주었고 2002년에 그 가게를 팔고 윈스톤 쌀럼 흑인동네에 있는 성업중인 큰 가게를 50만딸라를 주고 인수해 처제에게 넘겼다.
2004년 9월 4일 미국의 로동의 날의 이른아침, 처제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가게에 달려가 보니 밤새 도적이 가게 천정을 뚫고 들어가 돈을 훔쳐갔던 것이다.
다행히 지역사회와 친척친구들의 도움으로 3일 만에 6만딸라를 후원받고 간신히 위기를 벗어나게 되였다. 그후 전태호는 돈을 버는 족족 이 6만딸라를 모두 돌려주는 감동의 이야기도 있다.
전태호가 자기로 가게를 운영할 때의 어느 날, 권총을 든 세 흑인강도가 복면을 한 채 안해와 동서를 앞세우고 집까지 들이닥치는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총앞에서 전태호는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현금 4,000딸라를 내놓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2주 후 그 강도 셋은 똑같은 수법으로 또 총을 들고 재차 전태호네 집에 들이닥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현금 4,000딸라를 강탈해 가는 난동이 또 벌어졌다.
현실로 다가온 아메리칸 드림
2005년에 전태호는 드디여 그동안 갈고닦은 스시맨의 실력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노스캐롤라이나 하이포인트지역에 미국인의 입맛에 맞는 일식(日食) ‘미국스시’(US SUSHI)라는 브랜드를 창출했다. 꿈에도 그리고그리던 스시레스토랑트를 오픈하게 된 것이다.
‘가보또’ 단골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하고 한달도 채 안돼 줄 서는 손님들이 늘어나 가게 문앞까지 테이블을 놓는 상황이였다.
하이포인트에서는 해마다 세계 가구박람회가 봄, 가을로 2회 개최되는데 매 시즌마다 근 8만명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전태호는 이 절호의 기회를 리용해 마케팅까지 펼치면서 ‘미국스시’를 홍보했다. 그야말로 대 성황을 이루었다.
스시는 고급스럽고 깔끔한 음식으로서 중상층 미국인들과 특히 동양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음식이다. 전태호는 자기가 정성껏 만든 스시를 맛있게 먹고 행복해하는 손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시맨으로서의 자부심과 보람을 느꼈다. 일할수록 신명이 났다.
2007년 전태호는 그린스보로에 두번째로 ‘미국스시’레스토랑트를 오픈했다. ‘프랜들리센터’ 라는 유명쇼핑몰에 입성하는 과정에 조건이 까다로워 거절도 당하기도 했지만 전태호의 끈질긴 노력으로 입성에 성공했다. 가장 중요한 황금위치를 잡았기에 오픈하기 바쁘게 완전 대박이 났다.
2009년 전사장은 또 자신만만하게 윌링톤 캐롤나이나비치에 있는 고급몰에 ‘도꾜원오원’이라는 이름으로 세번째 스시비즈니스를 오픈하였다.
주위에서 “미스터 전이 손님들을 몰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전사장의 스시는 입소문이 나 오픈할 때마다 인기몰이였다.
가게가 집과 왕복 6시간 되는 거리에 있어 전사장은 이 가게를 오픈해서 4개월 만에 자신만의 노하우로 원래의 투자금보다 7, 8배 높은 값에 가게를 팔았다.
비지니스는 승승장구로 잘되였고 돈은 놀랍게도 전태호사장을 따라다니는 듯했다. 그는 노스캐롤라 지역을 주름잡으며 담대하고 통 크게 스시레스토랑트를 사고팔고 반복하면서 자기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돈을 벌어들였다.
미국에서 노력한 만큼 아메리칸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캘리포니아주, 그를 반기지 않았다
전태호 스시맨은 돈을 많이 벌수록 돈 욕심이 더 생겼고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듯했다.
노스캐롤라이나가 돈을 벌기에는 무대가 작다고 생각한 전사장은 미국에서 가장 큰 캘리포니아주로 떠나기로 작정했다.
지인들은 너무 멀리 떠나지 말라고, 돈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말라고 조언도 하고 충고도 했지만 가슴이 부풀어오른 전태호의 귀에 들어갈리 만무했다.
그의 머리가 뜨거워졌고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듯했다. 그의 타고난 황소고집을 누구도 꺾지 못했다.
2011년 그는 안해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사짐을 꾸리라고 통보만 내렸다.
당시 캘리포니아주에서 근 25년 간 인기를 누리던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정통 스시 뷔페는 점차 하향선을 긋는 추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태호는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6년 동안 함께 일해왔던 매니져와 함께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새크라멘토에서 20만딸라로 스시레스토랑트를 샀다.
몸으로 부딪쳐가면서 느껴지는 캘리포니아의 스시비지니스 세계는 전태호가 꿈꾸어오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별도의 세계였고 원재료값과 인건비도 예상보다 훨씬 비쌌다. 한달 매출을 10만딸라 이상 올렸지만 건물임대료가 판매액의 8% 이상을 초과하면 적신호이고 위험수위라는 것을 전태호는 잘 알았다.
더 이상 머무를 필요없이 가게를 팔고 떠나려 하자 매니져가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캘리포니아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급했던 지라 전태호는 오래동안 같이 일하면서 믿어온 사이이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바꾸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뒤정리를 깨끗하게 마치고 떠나자는 안해의 권고는 마이동풍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캘리포니아에 팔고 온 스시가게가 큰일이 터져버렸다. 매달마다 가게 임대료를 내라는 청구서가 꼬박꼬박 전태호사장한테 날아들었다. 가게를 판다고 했는데 서류상에는 전태호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 화근이였다.
매달 1만 7000딸라에 달하는 가게임대료와 련방정부의 세금까지 내야 하는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게 되였다.
미국 법정에 서다
당시 캘리포니아를 떠난 전태호는 2012년 2월,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 있는 ‘오사까’를 인수하고 운영하던 중이였다.
같은 시기 전사장은 또 110만딸에 달하는 6천스퀘어피트(약 560평방메터)짜리 단독 식당을 구매하고 스시와 하바치(일본철판볶음료리)를 동시에 경영하는 ‘미국스시’레스토랑트를 오픈하였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장사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오픈한 ‘미국스시’ 매니져마저 잘못 만나 분쟁이 생겼고 비지니스는 바닥을 쳤다. 미국은 ‘소송의 나라, 변호사의 천국’이라고 하더니 매니져가 법정에 소송을 걸었고 전태호도 어쩔수 없이 고급변호사를 청하고 미국법정에 나서는 곤욕을 치렀다.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악렬한 상황은 전태호를 곤경에로 몰고 갔다.
아메리칸 드림이 벼랑끝에 몰린 처절한 최악의 상황에 닥쳤다. 전태호는 ‘나 전태호, 절대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꿋꿋이 버텼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시가게와 ‘미국스시’가게를 팔고 법정재판에서 이겨 배상금을 받기까지 무려 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비즈니스철학 - 믿음
지금 6명 스시주방장을 비롯해 종업원 21명을 둔 전태호 사장은 한결 여유롭게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오사까’레스토랑트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부자이고 그 어느때보다 넉넉하다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전태호 사장의 비지니스 철학은 ‘종업원을 믿고 일을 맡긴다’이다. ‘오사까’ 의 7,8명 종업원에게 가게 대문열쇠를 맡기고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는 믿음을 준다. 주인의 믿음에 종업원들도 주인의식으로 일을 찾아한다, 새로 구상한 메뉴가 있으면 언제든 가게에 와서 시도해 보고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조언하며 새 메뉴를 연구한다. 뿐만 아니라 상호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함께 마케팅전략도 계획한다.
스시일을 배우러 오는 제자들한테 전태호 사장은 우선 생선 잡는 법과 관리법을 알려주고 소스를 만드는 비법 등 핵심적인 것도 철저히 가르쳐주군 한다. 다음 차요한 일을 가르쳐주는데 이들이 스시기술을 배운 후 언제든 어디에 가든 쉽게 취직하도록 배려해주는 그다.
앞으로 스시비즈니스 고문으로
가게를 11번이나 개업하고 팔고 하는 과정에서 얻은 교훈이 뭔가는 물음에 전태호 사장은 이런 말을 한다.
“사업이 잘되고 번창할 때일수록 더 명석하고 랭철한 머리로 사업해야 한다. 눈앞의 리익만 보지 말고 늘 멀리 내다보고 큰 꿈을 키우며 과감하게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면서 전태호 사장은 “30여명 스시맨을 키우고 이들 중의 3명에게 내가 운영하던 레스토랑트를 넘겨주었는데 훌륭하게 경영하고 있다. 모두 잘사는 모습을 보여줘서 정말 보람이 있다”고 말한다.
전태호 사장은 영주권후원자가 되여 종업원들의 신분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도 뿌듯한 일이다고 덧붙여 말한다.
전사장은 ‘오사까’를 탄탄하고 성실하게 운영하는 한편 일식분야에서 더 많은 후계자들을 육성해 이들이 미국땅에서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제 계속 할 일이다고 한다.
전사장은 “요즘들어 상업건물만 구입해 놓고 스시맨을 구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경영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정해 주는 ‘스시비지니스고문’을 해달라는 요청도 있는데 무척 흥취가 있다.”고 하면서 “스시맨은 안정적이고 수입도 괜찮은 기술일이고 해서 미국 이민자들에게는 비전이 있는 직업이다.”고 추천하고 싶다 한다.
전태호 사장은 “앞으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하면서 이 땅에서 우리 이민자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잘살아가는 것이 삶의 취지이다.”고 말한다.
/리화옥 미국특파원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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