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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찍는 게 영화' 큰소리치다 입문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6월2일 16시30분    조회: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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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장률
[문화] 명작의 공간
장률 감독은… “아무나 찍는 게 영화” 큰소리치다 입문

단편 ‘11세’로 베니스 초청받아


장률(사진) 감독은 재중동포 3세로서 영화감독이 되기 전까지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대에서 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던 중 어떤 사태에 연루되어 해직당한 후 10년간 아내가 버는 돈으로 살며 1986년에는 소설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은 뒤로 소설을 그만뒀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다 썼는데 더 이상 뭘 쓰겠느냐는 것이 이유다. 

그 무렵 그는 영화감독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아무나 찍을 수 있는 게 영화”라고 큰소리를 친 것이 계기가 돼 영화감독으로 입문하게 됐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렇게 만든 영화가 단편 ‘11세’다. 서른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만든 이 영화로 그는 베니스국제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돼 호평을 얻었다. 이후 장편 데뷔작 ‘당시’가 로카르노, 밴쿠버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상영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장 감독은 ‘당시’에서 ‘두만강’까지 시종 차분한 시선으로 이방인, 소수자 등 경계인의 삶을 그려냈다. 감독 자신이 재중동포 출신인 까닭인지 중국의 소수민족이자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재외한국인이라는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경주’ 역시 이방인의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다. 익숙한 공간이기에 무심히 지나쳤던 경주는 장률이라는 이방인의 감각을 통해 되살아난다. ‘경주’는 1995년 한국 방문 당시 경주에 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인데 시나리오는 보름 만에 썼다고 한다.  

두만강 접경지대에 사는 조선족의 삶을 비극적으로 그린 ‘두만강’을 완성한 뒤 영화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영화세계에 하나의 매듭이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그의 영화는 좀 더 넉넉하고 여유로워졌다. ‘경주’나 ‘춘몽’ 같은 작품은 경계에 대한 천착과 이방인적 감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재기 넘치는 유머와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장률만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문화일보

무덤 사이에서 숨쉬는 生… 삶 속에서 사유하는 死
영화 ‘경주’의 배경 경주 

▲  영화 ‘경주’ 촬영지인 경북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은 완만한 굴곡과 경사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영화에서 이 공간은 삶의 고단함을 토로하고, 죽음을 향해 이중적으로 침투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자료사진
 
 

무덤 사이에서 숨쉬는 生… 삶 속에서 사유하는 死
영화 ‘경주’의 배경 경주 

두 개의 거대한 봉분이 잇닿은 자리가 아늑하다. 평지와 봉분을 덮은 연둣빛 잔디는 햇살을 받아 묘한 생기를 발산한다. 그 아래에서 젊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인다. 연인의 달콤한 입맞춤을 방해하는 것은 아이들의 고함이다. 곧 나들이 나온 유치원생들이 웃고 떠들며 줄지어 지나간다. 소음은 싱그럽고 움직임은 활달하다. 잠시 난처해하던 연인이 이내 손을 잡고 걸어간다. 다정한 소요다. 죽음을 배경으로 나누는 사랑의 열정과 그 곁을 스치는 활기로운 생명력.  

장률 감독의 2013년 작 ‘경주’는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해 경북 경주시에서의 설레는 만남과 기이한 환상을 경유해서 춘화로 끝을 맺는다. 전작의 제목들이 ‘경계’ ‘이리’ ‘중경’ ‘두만강’인 것을 생각하면, 그의 영화에서 공간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 대도시의 변두리와 사막화가 진행되는 몽골의 초원, 기차역 폭발사고로 엄청난 참사가 빚어졌던 이리,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을 마주 보는 중국 조선족 자치 마을 등의 공간이 영화의 배경이자 주인공이었다. 어떤 장소에 담긴 독특한 개성과 분위기가 카메라에 흘러들어 인물을 움직이게 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다. 

‘경주’도 마찬가지다. 장 감독이 경주에서 주목한 것은 불국사나 석굴암, 첨성대 같은 건축물도 아니고 안압지나 포석정 같은 명소도 아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발견한 것은 ‘무덤’이다. 영화 후반 공윤희(신민아)의 입을 빌려 말하듯이 경주는 능을 보지 않고 살아가기 힘든 도시다. 적게는 수 기에서 많게는 수백 기까지 무리를 지어 형성된 옛 무덤들을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경주에는 황오동,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등 곳곳에 크고 작은 고분군이 있으니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다. 무덤들 사이에서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기묘한 동거인 셈인데,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어디서든 사람은 태어나고, 살고, 죽었으니까. 고분의 거대한 규모가 죽음을 환기하지만 그곳은 영화의 초반 경주를 스케치하는 영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젊은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무대이자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이기도 하다. 

◇대릉원 = 이 영화에서 최현(박해일)이 친한 형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망자와 함께했던 여행길에서 본 춘화의 행방을 찾아온 곳이 경주라는 것은 삶과 죽음의 공생, 혹은 연속성을 말해준다. 남녀의 성애를 그린 춘화는 은밀하고 엉큼하기는 하지만 생명의 역동성과 긍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기 위해 간 곳이 하필 무덤을 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곳, 경주다. 장례식에서 망자의 삶을 기억하며 춘화를 떠올리고, 춘화를 보러 무덤 가득한 도시로 들어가는 역설적인 경로는 경주라는 도시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고분들은 경주 남산 북쪽에서부터 경주국립박물관 자리와 반월성을 거쳐 황오동,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평지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 황남동 대릉원이다. 대릉원이라는 이름은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유래했는데, 약 3만8000평의 평지에 미추왕릉과 황남대총, 천마총을 비롯해 왕과 왕비, 귀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남쪽과 북쪽 두 개의 봉분으로 이루어진 황남대총의 경우 길이가 120m에 이르고 높이가 아파트 7층에 해당하는 23m에 달해 그 거대한 규모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1970년대부터 발굴과 정비 작업을 시작해 오늘에 이른 대릉원은 저녁 8시 무렵이면 야간 조명이 밝혀져 낮과 다른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영화 속에서 술자리가 파한 후 밤늦게 귀가하던 최현과 공윤희, 그리고 영민(김태훈)이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고분 위로 올라가는 곳(사진)이 대릉원 일원이다. 조명을 받아 완만한 굴곡과 경사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그곳에 엎드려 윤희가 무덤 내부를 향해 소리친다. 들어가도 되냐고. 들리냐고. 그 안으로 들어가도 좋겠냐고. 생명을 벗어나 흙과 같은 무기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타나토스의 발로일까. 아니면 단지 삶의 고단함에 대한 토로일까. 경주라는 거대한 무덤 안으로 들어온 최현에게 그녀의 행동은 이상하게 보였을지 모를 일이다. 무덤 안에서 또다시 무덤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죽음을 향한 이중의 침투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천마총 = 무덤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가 최현과 윤희만은 아니다. 대릉원을 찾은 인파의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황남대총과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고분이 하나 나온다. 미추왕릉처럼 피장자가 밝혀진 것도 아니고 황남대총처럼 규모를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155호분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봉토도 허물어지고 크기도 작아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시험 삼아 발굴한 곳. 말안장 발굴 도중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그림이 출토돼 이름이 붙여진 곳. 하늘을 가르며 구름처럼 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말이 금방이라도 뛰쳐 오를 것만 같은 곳. 고분들 중 유일하게 내부가 공개된 천마총이다. 무덤은 크게 능이나 총, 묘로 구분되는데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발굴이 진행되어 가치 있는 부장품이 출토된 무덤을 총, 그리고 일반 무덤을 묘라고 한다.  

천마총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낮은 조명 아래 황금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금관과 금제 관모를 비롯해 유리 구슬과 유리 그릇도 있다. 피장자 생존에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화려하고 찬란한 생이 떠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들. 금관에 새긴 나뭇가지에 달린 비취옥과 금장식은 나무 열매와 나뭇잎처럼 보인다. 신라인들의 신성한 숲 계림을 떠올리게도 하고, 삶과 죽음이란 한 가지에서 열린 열매와 나뭇잎 같은 것이라고 웅변하는 듯도 하다. 무덤 속에서 사람들을 기다린 것은 죽음이 아니라 오래된 삶의 기억들이다.  

그러니 술에 취해 무덤에 올라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소리치는 윤희의 외침은 단지 타나토스의 충동으로 죽음을 향해 던진 것이 아닐 것이다. 최현이 경주라는 무덤 안으로 들어와 또 다른 삶을 만났듯 죽음 너머에 삶이 있고, 다시 삶의 너머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외침은 오래된 죽음을 건너, 그 화려했던 삶의 기억을 지나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나뭇가지, 혹은 뿌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천마총에는 하나의 일화가 전해진다. 1973년 발굴 당시 경주는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었는데, 성난 시민들이 발굴단에 몰려와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가뭄이 들었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고분은 열려서는 안 되는 오래된 시간의 저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굴 도중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수습하려 하자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이내 무섭게 빗줄기가 쏟아졌다. 가뭄 끝의 단비였다. 그것은 어쩌면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래된 과거의 삶이 현재의 삶에 청하는 화해의 메시지였는지 모른다. 

◇아리솔 = 윤희의 집에서 밤을 새운 최현도 동이 틀 무렵 아내가 음성 녹음한 화해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내다보는 창밖에는 도심의 풍경 위로 전선들이 어지럽게 허공을 가로지른다. 마치 인간사의 어지러움과 관계의 복잡성을 은유적으로 내비치는 듯하다. 전신주와 전신주를 연결하는 전선 중 하나를 쫓아가다 보면 또다시 무덤이다. 마치 삶과 죽음을 잇는 띠 같다. 그 한쪽 끝에 무덤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춘화가 있다.  

최현이 춘화를 보기 위해 찾아간 곳이 전통다원 ‘아리솔’이다. 키 작은 잡목들이 아담한 뒤뜰을 채우고 수반처럼 돌절구에 물을 담아 지나가는 바람의 자취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최현은 공윤희를 만나고 죽은 형의 아내와 대면하는 백일몽을 꿈꾸고 일본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춘화는 새 벽지에 가려져 볼 수가 없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 있지만 벽지는 춘화를 덮어 보이지 않게 만든다. 마치 시간의 더께처럼, 혹은 봉분처럼. 그것을 보려면 155호분의 봉분을 열던 1973년 여름처럼, 두껍게 쌓인 시간의 더께를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봉황로 문화의 거리에 위치한 아리솔은 좌식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향이 정갈한 차와 다과를 맛보며 망중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폐업한 상태다. 낡은 문 너머로 보이는 뒤뜰은 웃자란 풀과 관리되지 않은 소품들로 어지럽다. 아리솔 역시 시간의 뒤편으로 사라지려는 것일까.

최현은 비록 춘화를 보지는 못하지만 윤희의 집에서 문인화를 발견한다. 그녀의 남편이 죽기 얼마 전 갖다 놓은 그림이다. 흰 바탕을 배경으로 탁자에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다. 그 위로 초승달이 떠 있다. 그리고 시 한 구절. 최현이 소리 내어 읽는다.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이 물처럼 맑다.’ 삶의 유한성과 더불어 시간의 순환과 영속성을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면 초승달은 차서 보름달이 되고 하늘은 여전히 물처럼 맑겠지만, 차를 마시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질문의 끝이 다시 대릉원으로 향한다. 그림 속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와 찻잔이 천마총에서 보았던 유물들과 겹친다. 비단 주전자와 찻잔 같은 유물뿐만이 아닐 것이다. 고분들이 마치 경주라는 탁자 위에 오래도록 남겨진 주전자와 찻잔 같다. 술 취한 최현이 바라보던 대릉원의 야경처럼 경주는 이렇게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 경주에서의 하룻밤은 이처럼 오래된 죽음의 자취인 고분 속으로 기어들어가 삶의 역동성과 만나고, 삶의 희열 속에서 죽음을 사유한다. 거대한 고분군 대릉원과 폐업한 전통다원 아리솔에서, 경주의 골목골목에서 삶과 죽음이 스쳐지나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다. 그리고 말하는 듯하다. 경주란 경상도에 위치한 어느 한 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단층이라고. 우리의 삶이 바로 경주라고. 

이대연 영화평론가/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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