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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란강에 비낀 석양으로 남으리라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6월7일 14시20분    조회: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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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태수

향토작가 리태수선생의 문학생애를 돌이키다

서재에서 원고를 심열하시는 리태수선생님(2017년 4월8일)

[지난 5월9일 저녁, 습관적으로 위챗모멘트를 뒤지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뜻밖에 연변작가협회가 위챗계정을 통해 발표한 부고를 그것도 한달전에 취재했던 조선족문단의 향토작가 리태수선생님께서 타계하셨다는 소식이였다. ‘아니, 이럴 수가?’ 한달전에 우리가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소탈하게 웃으시며 무람없이 이야기주머니를 푸시던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불편한 몸으로 문앞까지 바래다주시던 자애로운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데 말이다…. 그날 선생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선생님의 생평과 문학에 대하여

룡정시작가협회 리승국 주석으로부터 《문화시대》잡지에서 <오늘의 문인란>에 룡정의 리태수원로작가의 문학생애를 기재할려고 하는데 이 글을 완성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순 당혹감에 할 말을 잃었다. 문학원로인 향토작가 리태수선생님이라면 국가1급작가라는 것과 룡정‘3.13’기념사업회, 룡정시통신협회, 룡정시아동학회 등 활동에서 몇번 만난 것이 고작이고 더구나 문학에 대해 이제 금방 어섯눈을 뜨기 시작한 나로서는 너무나 힘에 벅찬 부탁이였기 때문이다. 허나 옆에서 많이 협조할 것이라는 말에 일단 부딪쳐보자는 욕심이 불쑥 솟구쳤다.

마침 한 단위에 있는 김정섭 선배의 건의와 방조로 먼저 원로작가 리태수선생님의 자료를 수집하고 료해한후 그에 근거하여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리태수선생의 집을 방문하는 날에는 김정섭 선배와 룡정5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제자 김향옥이 동행하여 큰 힘이 되였다.

백여년력사의 풍운속에서 민족의 혼을 불러 세기를 넘어 온 룡정은 수많은 투사, 문인들을 배출하였는데 그것은 찬란한 민족문화가 바탕이 되였던 것이다. 룡정이 낳았거나 룡정을 거쳐간 대표적인 문인들을 꼽으라면 광복전에는 윤동주, 최서해, 김창걸, 강경애 등을, 광복후 특히는 새 중국이 창건된 후에는 리태수, 전광하, 김재권, 황상박 등을 꼽을수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순문학에 정진해온 분은 아마도 리태수선생님일 것이다.

2015년 7월 24일, 리태수문학생애 55주년 및 작품연구세미나가 룡정에서 개최되였다.

리태수(李泰洙)선생은 1936년 10월 연길현(현 룡정시) 평안구 유신촌에서 부친 리종식, 모친 김숙자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다. 그리하여 이후의 문학활동에서 리태수선생은 때로는 리삼(李三)이라는 필명을 쓰기도 하였었다.

리태수선생은 소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줄곧 룡정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룡정고중을 졸업한 이듬해인 1956년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하였다.

선생의 꿈은 원래 흰 가운의 의사였다. 소년시절 동생이 장질부사라는 괴질로 비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앓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될 것을 다짐하였지만 그후 탐탁치 않은 가정여건으로 그 꿈을 포기하는수 밖에 없었다.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하여서부터 리태수선생의 평탄치 않는 인생행보는 이후 선생이 여러가지 문학쟝르로 많은 문예작품을 창작할수 있는 밑거름과 에네지의 원천으로 되였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 ‘3.8’선부근의 강원도 이천까지 내려가서 복역하다가 1959년에 제대하여 선후로 룡정2중의 교원, 화학공장의 로동자로 일하다가 1971년에 연길현문화관에 전근되여 문화사업일군으로 사업하면서 당시의 규정대로 해마다 200여일씩 하향하여 기층에서 순박한 농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더 많은 생활경험을 하게 되였다.

리태수선생은 이렇게 군인으로부터 교원으로, 다시 로동자로부터 문화사업일군으로 그리고 10년동란의 년대에는 맨발의사로도 활약하는 등 여러가지 직종과 생활체험 속에서 문학에 대한 들끓는 창작열정으로 다양한 문학쟝르에서 장끼를 선보였다.

1959년 제대한후 발표한 처녀작은 시 “제대군인의 노래”였는데 ≪연변문학≫ 제3기에 발표하였다. 그후 다양한 문학쟝르로 창작하였는데 1974년 발표한 단편소설 “우두봉의 매”, 1986년에 발표한 대형가극 “기생 봉선아씨”, 1988년에 발표한 텔레비죤소품 “홈”, 텔레비죤극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등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그가운데서 “사회주의 조국을 노래부르자”, “어머니 당이여 고맙습니다.”, “고향산”, “따사로운 품”, “고임돌” 등 작품들은 중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여 많은 조선족청소년학생들에게 익숙히 알려졌고 선생이 작사한 “들놀이 가자 꽃놀이 가자”는 대중들의 애창가요로 널리 불려지고 있다.

“문학은 한 민족의 얼굴이다” 고 말하는 리태수선생은 여러 문학쟝르에 민족적 소재만을 고집하면서 창작에 심혈을 기울여왔을 뿐만아니라 우리 민족문화 전파에도 힘써 왔다. 그리하여 1993년 우리 민족 통속문학지 ≪이야기천지≫를 창간하여 제1임 주필을 담당하면서 발행부수 1만5천부라는 놀라운 업적을 쌓기도 하였다.

1996년에 정년퇴직한 리태수선생은 만년에도 여전히 필경에 주력하면서 문학창작을 이어왔다. 올해는 리태수선생의 문학생애 57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고 이미 팔순의 고령이지만 다산작가로서의 정열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었다.

최근 10여년간 리태수선생은 자신의 창작리념과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대하소설 “해란강”을 집필하였다. 선생은 20여번이나 모주석의 접견을 받은 해란벌의 “농민영웅” 김시룡을 원형으로 반세기의 조선족농민들의 력사와 운명, 그리고 해란강지역의 독특한 풍속과 인정세태를 380여만자의 편폭으로 다루었는데 컴퓨터가 아닌 육필로 완성하였다고 한다. 손끝에 침을 묻혀가며 원주필로 집필한 원고지 묶음만도 저그만치 15개, 그 원고뭉치를 올리 쌓아놓으니 1메터반이 된다. 이런 집필작업을 리태수선생은 습관적으로 구들에 엎디여 썼는데 나중에는 가슴에 통증이 와서 할수 없이 책상에 마주 앉아 썼다고 한다. 집필과정에 손목에 무리가 와서 근 한달간이나 치료를 받으면서 집필을 중단한 적도 있단다. 참으로 온몸으로 글을 쓰는 선생님의 창작열정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수 없다.

사전에 리태수선생과 전화로 약속한터라 선생은 서재에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리태수선생님은 심장질환으로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금방 출원한 몸이여서인지 이전보다 좀 수척해보였다. 선생의 서재 책장에는 여러가지 도서들로 꽉 채워졌는데 자리가 없어 창턱아래와 바닥에도 도서와 책가위를 씌운 원고뭉치들이 쌓여 있어 우리 일행 셋이 들어서니 자리가 비좁아 보였다.

자리에 앉기 바쁘게방문하게 된 리유를 밝히고 선생의 건강상황 때문에 송구스러운 마음을 내비쳤더니 선생은 자신의 건강은 괞찬다면서 인터뷰에 선선히 응해나서는 것이였다.

2015년 7월 24일 부인과 함께.

나는 농민의 아들이다.

리태수선생이 1959년 제대하여 제지공장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어느날 한 동료가 리선생님을 보고 “리동무, 당신은 왜서 군복무하고도 여전히 농촌호구(호적)요?” 하고 물었다. 이에 선생이 “내사 농민의 아들로 태여났으니 농촌호구지.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생기오?” 하고 반문하자 그 동료가 새로운 정책에 농촌호구면 무조건 농촌에서 근무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며칠후 직장책임자가 현로동국에서 그를 찾으니까 어서 빨리 가보라고 하는 것이였다. 룡정고중을 3년간 다니면서 현정부 대문을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현정부울안에는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선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겨우 현정부울안에 들어가 현로동국의 해당 책임자를 찾았다. 로동국의 김씨 책임자는 현민정국에서 고소가 들어왔는데 당시의 정책에 따라 리태수선생은 농촌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이에 리태수선생님은 당시 영화관에서 방영되던 인도영화 《류랑자》의 줄거리를 곁들어 법관의 아들은 법관이 되고 농민의 아들도 반드시 농민이 되여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냐며 도리를 따졌다.

그러자 책임자는 선생을 달래면서 “그럼 이렇게 하는게 어떻소? 당신이 농촌으로 가지 않으면 계속 고소가 들어올 것이니 그럼 나도 난처하게 되오. 그러니 일단 과수농장에 가 있소. 과수농장은 반농반공(半农半工)성질을 띠기에 후에 내가 기회를 봐서 당신을 다시 전근시키겠소.”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농촌호구 때문에 과수농장에서 농민이 아닌 ‘농민’으로 2년이나 근무하게 되였다. 후날 선생이 <만무과원>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또 배꽃과 과수원과 관련된 작품을 창작한 데는 모두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이 되다

과수농장일은 겨울에는 한가하여 농장지도부에서는 끌끌한 일군들로 로투구에 가서 울로초뿌리 캐기 부업을 조직하였는데 울로초뿌리를 캐서 제지공장에 팔았다. 일군들은 목재판에서처럼 집체 숙식을 하면서 부업을 하였는데 저녁식사후 전기도 없는 숙소는 몹시 적적하였다. 당시 현 기술학교를 졸업한 30여명 학생들이 과수농장에 분배받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리태수선생이 룡정2중에서 교원사업을 할 때 가르치던 학생인지라 저녁만 되면 선생을 졸라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에 상영되던 쏘련영화 줄거리와 자신이 읽은 조선의 소설 줄거리들을 곁들여가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것이 저녁식사후 날마다 이어지는 일과로 되였다. 이렇게 선생은 울로초캐기부업에서 저도 모르게 이야기꾼이 되여버렸는데 이야기는 일이 끝날 때까지 근 한달간이나 계속되였다.

억지에 몰려 과수농장으로 내려갔지만 어찌보면 그때 하향이 선생한테는 문학의 밑바탕으로 되는 생활소재를 얻을수 있는 아주 훌륭한 기회였다고 선생은 허허 하고 소탈하게 웃었다.

리태수선생님과 함께(뒤줄 김향옥, 김군욱).

환자라도 문학환자는 아니다

컴퓨터탁자에 올려놓은 사모님이 타준 커피는 언녕 식어버렸지만 금방 퇴원한 팔순의 환자답지 않게 선생의 이야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랜 지병인 요추간판탈줄로 병원에서는 선생에게 수술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선생은 장기간 연길을 오가면서 연길북대에 있는 개인골과진료소에서 침구치료를 받았다. 한번에 치료를 받으면 잔등에 89개나 되는 침을 꽂아야 했는데 선생을 따라간 손자가 보고 놀라서 “할아버지 잔등에 고슴도치가 앉아있는 것 같습니다.”고 롱아닌 롱을 하였단다. 한번에 이렇게 많은 침을 맞아야 했으니 그 고통은 얼마나 컸을가. 선생은 이렇게 두달간 견지하면서 침을 맞았기에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어려웠던데로부터 바깥출입까지 할수있게 되였단다.

지금은 잠시 창작에서 손은 놓고 있으나 매일 열독을 견지하고 있다는 선생은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현재 조선족의 가사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선생은 “현재 많은 문인들이 가사는 시라고 말하고 있는데 가사는 언제까지나 가사여야지 시처럼 써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가사는 자연에서 자연을 느끼고 그 느낌을 가사로 반영하고 음률로 반영하여야 하는데 너무나 자연의 음악을 홀시하는 현실도 지적하면서 현재 가사 쓰는 문인들이 많이 줄어든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거기에 가사가 매주일가로 작곡되여 방송되자면 기고자가 원고료를 받을 대신 도리여 출판비를 내야 한다는 안쓰러운 현실도 서슴지 않고 지적하였다.

두서가 없는 인터뷰가 두시간이나 이어졌지만 선생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문학과 생활앞에 서면 항상 당당해지고 할 이야기가 많은 선생이기 때문이리라.

선생의 휴식을 고려하여 우리 일행은 적당한 리유를 대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우리가 그렇게 말렸지만 선생은 지팽이를 짚고 불편한 몸으로 우리를 문앞까지 바래주었다. 문학후배들을 각별히 사랑하는 선생님의 자애로운 모습은 거룩한 형상으로 나의 머리속에 오래 오래 남아 있었다.

(글/사진 룡정중학 김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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