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media
중국조선족 어학계의 별 리득춘교수님을 그리며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월9일 08시45분    조회:219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득춘


연변대학 원로교수이며 조선어학계 저명한 학자인 리득춘교수

5년전인 2013년 1월 16일, 연변대학의 원로교수이시며 우리 조선어학계의 거두이시고 중국민족어 학계의 저명한 학자이신 리득춘교수님이 후학들에 대한 자애로움과 제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남긴 채 74세를 일기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리득춘 교수님께서 쌓으신 학문적 업적은 연변대학에서의 조선어교육과 연구의 기틀을 마련해 놓았고 중국에서의 조선언어학계의 학술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그 연구범위를 넓혀주었다. 교수님은 중국민족어학계에서의 조선민족 언어연구의 학문적 위치를 높였고 중조언어문자비교 연구방면에서 중국의 조선-한국학연구와 발전 및 중국조선족한국학 고등교육사업발전에 일조하였으며 세계적으로도 우리 민족의 언어연구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후대양성에 필생의 정력을

리득춘교수님은 1938년 10월 19일 훈춘현에서 아버지 리종모씨와 어머니 조두일씨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가난에 쪼들렸던 형편에도 밝고 씩씩했던 교수님은 훈춘현 제2소학교 때 벌써 “나무”등 동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과외로 연극을 창작하고 연기에도 열중했던 열혈문학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썩 후에 동요작곡가 김종화선생이 곡을 붙인 동요 “나무”가 전국동요축제에서 2등상을 받았으며 소학교 음악교과서에 오래동안 기재되였다.

훈춘고중을 졸업한 교수님은 1958년 8월 연변대학교 어문학부 조문전업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연변대학통신학부 조선어교연실 조교로 남게 되면서부터 언어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였다.

심한 생활고와 지식인에 대한 각박한 시대를 겪은 리득춘교수님에게 교수사업과 학술연구는 유일한 돌파구였고 삶의 신조이였다.

70년대의 ‘공농병대학(工农兵大学)’시절, 전국 각지에서 뽑혀온 조선어계의 한족학생들을 이끌고 농촌 각지를 다니면서 ‘밖으로 나가 공부하기(开门办学)’의 쓰고 단맛을 보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에게는 가족보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몸이 불편한 안해와 어린 남매를 집에 두고 일년 동안의 절반 이상을 학생들과 함께 산간벽촌에 내려가 생활하였다. 어쩌다 집에 있는 주말이면 늘 객지생활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불러 들이군 했다. 10여명의 학생들이 늘 줄지여 선생님 댁을 찾았고 따뜻한 밥상에 둘러 앉아 학생들과 함께 보내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 교수님과 사모님이셨다. 훗날 국내외 여러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로 추천받은 그때의 학생들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이 주말마다 찾아 갔던 리득춘 교수님댁이였고 환대해 주시던 사모님과 귀여운 코흘리개 어린 두 자녀 경일이와 홍매였다고 추억했다.

중년에 이르러 주로 석사, 박사생 양성에 힘을 기울인 교수님이셨다. 특히 1988년에 박사연구생 지도소조 조장직을 맡고 정판룡교수와 협조하여 중국조선족 제1 기 언어학 박사생 양성에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수천명의 조선어 고급전문인재를 양성해낸 교수님, 현재 중국조선어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강보유, 렴광호, 김기석, 최건, 김영수 등 교수들을 포함한 국내 조선어연구의 중견으로 될수있는 조선어학박사 14명을 친히 양성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학부생, 석사생제자들은 현재 국내 여러 대학 조선어학과의 인솔자로, 더 나아가 관련연구부문의 저명한 학자들로 명망을 떨치고 있다.

석사, 박사생 모집수가 한명, 두명 정도일 때에는 단독 교실도 없이 교수님댁 밥상에서 수업할 때가 많았다. 안도로 가는 기차표값조차 아껴야 했던 석사연구생시절에 교수님은 나에게 부모님과 같은 존재였다. 댁에서의 오전 수업이 끝나면 부근의 두부방에 가서 친히 두부를 사다가 감자를 넣고 끓여 주시군 하였는데 그 된장국과 배추김치맛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기관지천식때문에 환절기 때면 늘 기침을 심하게 하신 교수님, 기침을 심하게 하시고 나서 온 몸에 땀을 흘리시면서도 석, 박사생들의 학위론문에 빨갛게 줄을 그어주시고 한 구절, 한 단락을 바로 잡아 주시군 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교수님의 손에서 커가게 되였다. 제자들에 대한 극진한 책임감과 깊은 사랑으로 지병때문에 고생하면서도 2010년에 마지막 박사생 제자들인 지동은, 김수동, 강미화, 마영미 등을 무사히 졸업시켰다.

교육생애 마지막 박사생제자들인 지동은(왼쪽),강미화와 함께

교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바이”라고 다정하게 부르면 허물없이 응해주시군 하였다. 때론 친구처럼 제자들과 노래방에서 “백명의 위인”을 힘차게 부르시면서 학술연구 방면 뿐만 아니라 생활면의 고민도 무랍없이 들어 주셨다. 한편 학술에 있어서 더 없이 철저했던 교수님은 제자들 칭찬에 린색했다. 석사, 박사 연구생들 중에는 나이가 든 학생들도 많았다. 인생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에는 너무나 친절한 선배님이시다가도 일단 론문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면 더없이 엄격했던 교수님은 “겉보다도 내실을 갖추어야 학술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학술사업을 위해서는 그 어떤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과도 따뜻하게 손을 잡아야 한다.”고 늘 제자들을 타이르셨다. 성과앞에서 겸허했던 그 자세와 학술에 대해 지키신 신조는 우리 제자들의 영원한 본보기이며 목표이다.

교수님이 타계하신 후 령전을 우러르며 제자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석, 박사 공부를 하면서 욕을 안먹어 본 사람이 있었나요? 그렇게 교수님은 우리를 자식처럼 편달해주셨어요. 교수님의 그 욕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없었을 겁니다. 부모님 같았던 교수님의 그 욕이 너무 그립습니다.”

상해외국어대학 김기석교수는 “내가 어려운 중국음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중국어학계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리득춘교수님의 편달과 갈라놓을 수 없다. 또 교수님이 아니셨다면 중-조음운대비 연구분야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 역시 그러하다. 한개 시골 중학교 조선어문교원이였던 내가 리득춘교수님의 사랑과 편달이 아니였더라면 대학교 박사지도교수를 꿈꾸지도 못했을 일이다.

1993년 7월을 계기로 해마다 한국에 다녀오신 교수님께서는 돌아올 때마다 책을 한 트렁크씩 무겁게 지고 와서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군 하셨다. 또 늘 국내외 학술회의에 제자들을 이끌고 가서 여러 유명한 학자들에게 자신있게 소개해주셨다. 하기에 나를 포함한 교수님의 여러 제자들은 지금도 조선의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원언어연구소, 한국의 서울대학, 고려대학, 연세대학, 이화여자대학, 국립국어연구소 등 유명한 국어학 교수들과 스스럼없는 교류를 하고 있다. 2011년 12월에 지나친 병독으로 쓰러지신 교수님, 급환자 응급실에서 10여 일간의 구급치료 끝에 눈을 뜨시고 하신 첫마디 말씀이 “영수선생, 내 가방을 찾아주오…”였다. 강의안이 들어 있는 가방을 찾으셨던 것이다. 사실 정신을 잃으신 동안 교수님은 강의하러 들어간 환각으로 사셨던 것이다. 그때 우리 제자들은 뭉클하는 가슴을 어쩔 수 없었다. 퇴원하신 후, 교수님은 심한 후유증 때문에 몸을 일으킬 수도 없으면서도 박사학위 심사론문을 세심히 보아 주셨고 그 동안 중단한 론문 집필을 빨리 끝마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누워서 열심히 원고를 보시군 했다.

실로 교수님의 일생은 교육자의 일생으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