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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악 살리기 위해 꿈나무 육성에 초점을 맞춰야…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4월12일 10시53분    조회: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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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박서성
 
 
퇴직후에도 전통음악 보급에 전념하고 있는 박서성 주문련 전임 주석
 
지난 세기 80년대 국가 문화부 주위치 부장은“연변은 가무의 고향, 연변가무단은 그 구심점”이라고 경전적 평가를 했던 적이 있다.
 ‘가무의 고향’이라는 미칭이 우리 연변의 인지도 향상에 막강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는 점에는 의이가 없다. 이를 위한 우리 민족 예술인들의 세기적인 기여의 중심에는 기라성 같은 선각 자, 개척자, 전승자들의 각고의 노력이 빛났다. 오늘날‘가무의 고향’의 인지 도는 새로운 시대적 높이에서 더 진화하고 격상돼야 하는 시점에 놓여있다. 이런 견지에서 민족예 술분야의 선두주자들의 창의적인 혁신 그리고 전승 등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있다. 
본지는 조선족음악예술계 대표주자의 한 사람이며 저명한 작곡가이고 문예분야 전문가인 박서성 전임 연변가무단 단장, 전임주문련 주석을 직격 인터뷰해 우리 민족예술의 발전과 진화, 그리 고 민족예술인이 갖춰야 할 자세 등에 대한 그의 소견을 들어 보고자 한다. -편집자
 
 
문: 문예계의 석학으로 음악인의 삶을 살아왔지만 음악예술계를 제외하고 가무단 단장, 문련주석과 같은 예술행정 지도자로 많이들 알고 있다. 예술의 길을 걷게 된 그 시작은 어땠는지, 고향 교하에의 어린 시절 어떤 것들이 예술인생에 원초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지?
 
답: 예술의 길을 걸을 운명이였나보다. 어려서부터 악기에 흥취를 갖고 있었다. 아버지한테 하모니카를 사달라고 졸라서는 영화 《갱도전》의 주제가를 절로 터득해서 부르기도 했다. 소학교 1학년 때는 학급에 놓여진 풍금을 만지고 싶어서 매일이다싶이 끝까지 남아서 청소를 했고 모두가 다 간 뒤면 풍금을 치군 했다.
10여세에 교하 시내로 이사를 하자 조건이 좋아져서 여러가지 공연을 보러 많이 다니면서 음악에 대한 흥취를 키워나갔다.
중학교 시절엔 관악대에 뽑혀서 튜바, 바리톤, 트럼펫 등을 차례로 마스터했고 공연을 다니면서 관악기를 제법 능숙하게 다루었다. 그러다가 선전대의 바이올린을 보고 대번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교하시 수리국 국장을 지냈던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켜는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노을이 지는 강가에서 <백모녀>의 삽곡을 그럴듯하게 켜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였다는 것을 알고서는 두말없이 음악의 길을 걷는 것을 지지해줬다.
 
문: 정규적 예술교육의 출발점은 연변예술학교로 알고있다. 연변예술학교에서의 바이올린 연주경력이 작곡가의 립지를 구축하는데서 어떤 밑거름이 되였는지?
답: 바이올린을 제법 능숙하게 다룬 덕분에 초중생이였지만 교하현문공단 단원들과 함께 공연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연변예술학교에서 학생모집을 왔고 30여명을 제치고 내가 행운의 1인이 되면서 1972년부터 바이올린 전업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학교에서는 창작조를 묶어 기층에 내려보냈는데 우리는 농가에 묵으면서 공연을 조직했다. 당시 체계적인 리론교육도 받지 못한 햇내기였지만 언감생심 20분 분량의 소무극의 작곡을 맡아 1주만에 완성했다.
창작조의 활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와서 회보공연이 있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고 안국민 선생이 무대뒤로 찾아왔다. 작곡가가 누군가 물었고 그렇게 내 이름이 학교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작곡에 농후한 흥취를 갖고 있는 나였지만 당시 연변예술학교에 작곡반이 없었다. 안국민 선생에게 가르침을 요구하자 “나보다는 허원식 선생한테 배우라”고 했다. 허원식 선생은 바이올린협주곡을 가져왔고 그 곡을 통해 많이 배웠다.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연변가무단에 배치받았는데 당시 리창운 선생이 고든 야곱의 《관현악법》이란 책을 줬다. 그 책이 너덜너덜해질때까지 베끼고 소화하기를 반복했다. 나중에 심양음악학원에서 학습할 때 보니까 이 책은 전세계적으로 광범하게 쓰이는 편곡법 분야 최고의 교과서였다.
 
문: 심양음악학원 졸업 후 월등한 대우가 보장됐고 음악연구와 창작조건이 훌륭히 마련됐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연변에 오게 되였는지? 후회는 없는지?
답: 연변가무단에 근무하던 당시 심양음악학원 연수기회가 생겼다. 2년간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이 배워야 할게 아직도 많다는 것을 느끼고 어렵게 본과 학습의 기회를 따냈다. 5년제 본과 과정을 마치고 1987년 졸업 후 학교에 남아 작곡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연변가무단에서 돌아와서 중임을 떠메라는 메시지가 왔다. 심양음악학원의 음악연구와 창작조건이 훌륭해서 크게 갈등했으나 ‘조선족으로서 민족음악을 하려면 그래도 연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오기로 결정을 내렸다.
심양음악학원에서 놓아주지 않아서 당안과 호구를 옮기는데 퍼그나 애를 먹었다. 량표도 없어서 생활 상 곤란이 많았지만 조직의 배려로 이겨낼수 있었다. 돌아온데 대해 후회는 없다. 지금껏 음악창작면의 성과는 내가 연변에 뿌리내렸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 명곡을 창작하기까지 창의적이고 천부적인 발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악기를 배웠고 작곡도 서양음악이였다. 하지만 창작해낸 음악작품가운데는 우리 민족의 선률이 생동하게 살아숨쉬고 있다. 작곡에 있어서 어떻게 조선족예술의 특징과 매력을 살렸는지?
답: 민족의 것일수록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족문화예술을 널리 알리는 것은 수많은 문화인이 그렇듯이 내가 지향하던 바이다.
전공은 서양악기와 서양음악이였지만 배움에 있어서 한우물만 파지 않았다. 사실 작곡이란 문, 리과가 결부된 학과이고 하나의 종합적인 예술분야이다. 때문에 다양한 분야를 모두 배우려고 노력했다. 창고에 저장해둔 물건이 많아야 어떤 수요든 만족시키듯이 머리속에 많은 것을 저장하려 노력했다.
조선족 전통예술의 특수한 매력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연변은 일찍부터 ‘가무의 고향’이라는 미칭을 가진 아름다운 고장이다. 공화국 창건 초기부터 대형 활동이 있을 때마다 조선족특색이 다분한 전통가무표현은 빠지지 않는 종목이였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선률이 섬세하고 부드러운가 하면 그 속에 장단이 있어 강약이 선명하다. 우리의 예술은 또 보편성을 띠기 때문에 량호한 군중기초가 있다. 이는 민족의 정서와 깊은 련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족이기때문에, 또 연변에 뿌리내렸기때문에 창작에 있어서 조선족전통예술의 특징과 매력을 살리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 또 그렇게밖에 될수 없는 일이였다.
 
문: 작곡가로부터 행정지도자로의 전환에서 각자의 배역을 멋지게 소화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영향력 있는 음악작품들이 많이는 예술행정지도자로 있던 이 시기에 창작 된 걸로 알고있는데 행정지도자와 예술인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답: 행정사업과 예술사업은 충돌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행정직에 몸담그는 것이 시야를 넓히고 창작수준을 끌어올리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1990년에 써낸 대형무극 <춘향전>은 연변가무단 부단장직을 맡은 직후 써낸 것이고 1992년의 교향광상곡 <신비의 장백산>, 1994년의 바이올린협주곡 <장백혼>, 1997년의 대형무용시극 <장백정>, 2006년의 대형음악무용시 <천년아리랑> 등이 모두 행정직에 있을 때 창작해낸 것이다. 행정사업을 해도 업무에 대해 잘 알아야 하거니와 업무를 잘 하면 지도자로서의 립지를 더욱 굳힐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 우리 민족 음악의 향후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에서, 어떤 시각에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답: 우리 민족의 전통음악을 살리기 위한 운동이 시급하다. 음악인으로서 체감하고 있다. 구급성 살리기가 절박한 시점이다.
현재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인구류동과 류실이 심각한 상황에서 민족의 어떤 분야든 후대양성이 어려운 현황이다. 또 민족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 지난 한시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인구는 줄어도 민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지속돼야 한다.
민족음악 관련 혜민공연을 주기적으로 조직해 관중들에게 수준급 예술감상의 기회를 많이 마련함으로써 관중과 매니아층을 형성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문: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정년퇴직은 했지만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고 들었다.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답: 2014년부터 지금까지 성문련 부주석직을 맡고 있는 외에 현재 연변조선족전통음악연구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연변조선족전통음악연구회는 내가 퇴직한 후인 2016년 11월에 설립됐다. 취지는 우리 전통음악을 사회 전반에 널리 알리고 이를 통해서 연변전통음악을 전파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2017년 1년동안 연구회 산하의 메아리 악단은 8차의 공연을 조직했다. 특히 전 주 음악교원을 상대로 펼친 ‘우리 음악 콘서트’공연은 우리 전통음악을 제1선 음악교육자들에게 보급하는 중요한 시도였고 그 효과도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 뒤를 이어 우리 꿈나무들과 함께 한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다’공연, 라이브바에서 진행된 ‘우리 소리를 만나다’공연, 전통악기로 우리 연변가곡을 편곡해 전통의 음률을 거리감 없이 들려준 공연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연구회는 무엇보다도 자라나고 있는 음악계 꿈나무들의 육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악기에 따라 각 학교 특점에 맞춰 연주자들이 학교에서 재능기부의 형식으로 전통음악을 보급, 이젠 우리 학교마다 전통음악써클이 운영되고 있으며 꿈나무들이 재능을 펼칠수 있는 기회가 마련돼서 그나마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향후 연구회에서는 우리 전통음악 작곡가 양성과 우리 민족악기의 과학적인 개량, 민족악기의 소학교 교육단계에서의 채택 등의 실현을 위해 꾸준히 일해나갈 것이다.
 
 
[박서성 략력]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연변가무단 단장을 지냈고 2010년부터 2015년까 지 연변문련 당조서기, 주석을 지냈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성문련 부주석을 맡고 있으며 현재 연변조선족전통음악 연구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행정직에 몸담그면서 한편으로 교 향악, 음악극, 관현악, 무극음악, 성 악 등 다양한 쟝르의 작품을 꾸준히 써냈다.
수상작품을 살펴보면 대형무극 < 춘향전>(1991년)의 음악이 전국최고 상인‘문화음악상’을 수상했고 1997 년의 대형민족무용시 <장백정>의 음 악은 전국무극시합에서 우수작곡상 을 수상했다.
1992년 창작한 교향광상곡 <신비 한 장백산>은 성장백산문예창작상 을 수상했다.
2004년 전국신인신작성악경연에 서 성악작품 <아버지 산, 어머니 강> 이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2006년 창작한 대형음악무용시 < 천년아리랑> 의 음악은 전국소수민 족문예회보공연에서‘작품대상’을 수상했다.
2016년 작곡을 맡은 대형무극 <아 리랑꽃>이 전국소수민족문예회보공 연에서‘극종목 금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2년 성정부로 부터 대공 1차 기입했고 1998년 문화부로부터 ‘우수전문가’칭호를 수여받았다.
 
연변일보 리련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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