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회장, 신생활그룹 총경리 리송미 일가견
"명품인생을 디자인하라."
"삶이 익어가니 행복하더라."
"분투하는 인생이 곧 명품인생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인생이 곧 명품인생이다."
"자신을 과장하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다."
...
중국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회장이며 신생활그룹의 리송미 총경리는 녀성들에게 명품인생을 경영하고 명품인생을 디자인하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대변자가 없이 스스로 남의 눈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리송미 회장은 말한다. 역경이 없는 인생은 명품이 될 수 없다고...
리송미 회장은 그동안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전형적인 인물이자 명품인생을 디자인하기 위해 노력해 온 인물이다.
10년동안 5번 수술대에 올라야 했고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철밥통을 버리고 보따리장사를 시작했다. 조금 돈을 벌었다가는 또다시 장사밑천으로 처넣어야 했고 그럴 때마다 주위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어릴 때에는 300원만 벌었으면 좋겠다는 천진한 생각을 가져도 봤고 몇십만원의 돈을 벌어놓고 그 돈을 몽땅 지인들한테 빌려주어 지금까지도 1전한푼 받지 못해 바보소리까지 들은적도 있다. 29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다니며 사업확장으로 길림성, 흑룡강성, 강소성, 절강성, 내몽골, 상해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면서 거리에서 끼니를 에운적도 부지기수이다. 지금은 3000여개의 점포를 둔, 년 매출액 8억을 목표로한 막강한 실력을 자랑하는 총경리로 거듭났으며 길림성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의 회장으로부터 중국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였다.
►가난이 준 선물
리송미는 성격이 쾌활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가난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강한 힘을 실어준 이색선물과도 같았다.
신생활과의 인연은 2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난 리송미의 어릴적 꿈은 철밥통을 얻는 것,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 덕에 연변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사범학교에 붙으면 큰 벼슬을 한 것과 다를바 없다. 철밥통은 이미 얻어놓은 것이니...1992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장춘시관성구조선족소학교서 교편을 잡았다. 끊기 하나로 매진하는 그는 선후로 우수교원, 공청단서기, 보도원으로 승진해 가정과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당시 리송미한테는 영예이상으로 절박한 것이 있었다. 바로 빈곤탈출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 찾아온 화장품장사군 부부, 생활형편이 여의치 않아 남들이 다 사는 화장품 하나 선뜩 살 수 없는 리송미, 자신이 비참해보이기도했다.남들이 없는 틈을 타 화장품을 파는 두 부부에게 화장품 방문판매사원을 모집하지 않는가고 물었다. 이들 부부도 흔쾌히 대답했다. 이렇게 시작한 화장품장사, 낮에는 학교에 출근하고 퇴근후이면 방문판매에 나서군 했다. 방문판매도 쉬운 일만은 아니였다. 문전박대를 당할 때도 있고 며칠씩 헤매고 다녀도 화장품 한개도 팔지 못한적도 있다. 발이 부르트고 입술이 갈라터져 피가 줄줄 흘러도 돈을 벌어보겠다는 굳센 의지를 꺽지 못했다. 그렇게 한두명씩 고객을 늘려갔고 재구매가 이루어지면서 차츰 돈버는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되였다.
1997년, 그는 과감히 철밥통을 버리고 보따리장사의 길을 선택, 신생활그룹의 주임으로 임직했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번져져도 코를 깬다는 말이 있다. 금방 신생활그룹에 몸을 담근 뒤 얼마 안돼 금융위기가 닥쳐왔고 시장에 많은 브랜드화장품이 등장하면서 회사가 크게 휘청거렸다.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해보겠다는 일념뿐인 리송미는 돈을 꿔다가 회사에 투자하고 그 돈을 갚기 위해 또 동북3성을 시작으로 산동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다보니 늘 가족과 떨어져있어야 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들에게 안겨주면 모두들 기뻐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불신은 더욱 커져갔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일에 더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리혼당할번 했구요…지금은 남편을 비롯한 모든 이가 저를 리해해주고 그때 선택이 옳았다고 합니다 .”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낯선 산동 제남의 작은 세집에 가정기물 대신 회사제품이 그득 쌓여있다.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화장품에 대해 설명을 늘여놓았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피부관리도 해주면서 조금씩 조금씩 친분을 쌓아갔다. 사업에 대한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산동에 이어 절강 항주로 진출,이어서 상해,강소성 이렇게 한지역 또 한지역씩 자신의 기반을 넓혀갔다.
신생활그룹(중국)은 1994년에 설립, 22년간 화장품, 건강식품 및 생활용품을 연구개발, 생산, 판매를 일체화한 생활용품그룹이다. 신생활그룹 산하에는 총 5000여개의 점포가 있는데 그중 3000개는 리송미 총경리가 관리하고 있다.
►분투하는 인생이 곧 명품인생이다.
오늘도 리송미 총경리는 동북지역으로 화동지역으로 전전하고 있다.
어찌보면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약 5년간은 리송미한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만약 사업을 포기했더라면 그때 만약 교사직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때 만약 지금의 남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만약 화장품판매하는 부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 회사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나몰라 했더라면, 오늘의 리송미의 삶은 어떠했을가?
리송미 회장은 명품인생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자신을 과시하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다. 명품인생은 자신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때문이라고...명품인생이 되려면 남과 차별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명품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로 오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이 곧 자신을 명품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때문이다.
녀성들이 창업해서 성공에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하다. 우리 조선족녀성들이 성공궤도를 달릴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인내와 강의함이 있기때문이다.
“창업을 하려면 먼저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자신이 정한 목표를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굳센 의지가 필요합니다. 저희 20년 창업과정을 돌이켜보면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에 더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었습니다.”
리송미 총경리는 말한다. 그 어떤 일이든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성공의 희열을 느낄 수 없다고. 이젠 돈을 그만 벌어도 되지 않냐 하는 주위의 물음에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지난 20여년은 지신을 위한 인생이였다면 남은 인생은 남을 위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현재 리송미 총경리의 꿈은 지역의 본부장, 경리, 점장들이 모두 잘 살 수 있도록 그들이 신생활과 함께 성장하고 신생활과 함께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이라고 말한다. 주위의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우선 직원들이 모두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리송미의 꿈이란다. 올해 2월에도 연변에 지사를 설립하고 연변지역의 신생활맴버들과 소비자들이 아늑한 환경에서 아름다움을 향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중국조선족녀성기업가 협회의 일원으로 지역 녀성기업인들간의 활성을 위해 기업탐방, 경영노하우 전수, 마케팅전략, 녀성들의 이미지관리,차세대녀성리더양성 등 다양한 행사를 조직했으며 연변의 민족음식이 전국각지로 나갈 수 있도록 플랫폼을 제공해주고 있다.
“나눔의 의미, 공유의 의미를 협회를 설립하면서 더 절실히 느꼈습니다.뭉쳐야만 힘이 커지고 뭉쳐야만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감싸주고 다른 사람을 명품이 되게 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명품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조글로미디어 문야
<리송미 프로필>
1973년생.
신생활그룹(중국)유한회사 화동지역 총경리
중국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회장
1992년 연변사범학교 졸업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장춘시관성구조선족소학교 교원
1994년부터~현재 신생활그룹 총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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