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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마라' 그는 다정한 혁명가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6월23일 12시18분    조회: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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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종필
 
김종필 전 총리가 자신이 겪은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매주 토요일 이어진 그의 구술이 14개월 만에 마감했다. JP의 현대사 회고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였다. 권혁재 사진기자
  
전영기 기자, 최후의 JP 목격기<1>
"혁명은 숫자가 아니라 의지"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빵을 먹고 자란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일본 외화 보유고 14억 달러일 때 식민지 청구권 자금 8억 달러 따내
"권력은 더러운 것.환멸을 느꼈어"
"박정희 대통령, 내가 가까이 있으면 거북하고 없으면 아쉬워 했어"
"호남의 한을 풀어 줘야 해. 박 대통령이 김대중에게 진 빚 내가 갚아 드려야지"
 
 
조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빵을 만들고 사라진 노병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풍운아다. 질풍노도,혁명의 바람을 타고 일어나 서산(西山)을 벌겋게 물들이더니 구름처럼 하얗게 흩어졌다. 영면하기 한달 전 서울 신당동 자택을 찾아간 필자한테 JP는 대뜸 나폴레옹 최후의 발언을 소개했다. "밤하늘의 유성…조세핀…불란서의 영광스런 군대…." 청소년 시절 품었던 나폴레옹의 불같은 열정과 낭만,결의가 살아 있었다. 몸은 쇠해 2층 침실에 누웠지만 JP의 정신은 청아하다고 해도 좋을만큼 맑았다. "벌써 한 달 째 내 입이 밥을 초청하질 않아"라는 유머도 여전했다.
 
  
JP는 전쟁과 혁명과 정치의 인간이다.1961년 서른다섯 나이에 5·16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해 2004년 일흔여덟으로 정계를 은퇴하기까지 공적 생활에 투신한 햇수가 43년. 그 뒤 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 시절에도 나라의 원로로서 그의 경륜과 지혜는 고비 때마다 보석처럼 빛이 났다. 2015~16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은 70년 한국 현대사의 장엄한 서사였다. 한 장면 한 장면 JP의 증언은 거대한 신드롬을 일으켰다. JP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과거의 존재였던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현재의 인물이었다. 
  
김종필 인생의 가장 드라마틱한 무대는 5·16이다. 그는 육사 8기(1949년 입학)생으로 군부(軍部)의 혁신을 외쳐 온 소장 장교 그룹의 리더였다. 6개항의 5·16 혁명공약을 혼자서 작성한 혁명의 설계사였다. 박정희 장군을 지도자로 옹립해 3600명의 군인으로 정변을 성공시켰다. "혁명은 숫자가 아니라 의지"라고 했다. 
  
제2공화국 정권의 무능과 무질서, 무분별한 통일론,이승만 시대부터 쌓인 부정부패에 대한 울분이 쿠데타로 표출됐다. 총격전은 있었으나 사망자를 한 명도 안 낸 세계사의 드문 무혈혁명이었다. 5·16 초기 박정희가 혁명 세력의 내분으로 민정 참여와 군정 복귀를 오락가락할 때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민주공화당 등을 잇따라 창설해 반혁명 기운을 제압했다. 견제 세력의 공격을 받아 JP의 부침이 반복됐다. 두 번에 걸친 “자의반 타의반”외유는 한국 정치에서 2인자 처세론의 상징 언어로 회자되었다.
 
  
김종필은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 근대화를 성공시켰다.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70년 254달러→80년 1645달러→90년 6147달러→2000년 1만841달러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2017년 북한의 1인당 소득은 한국의 70년대 중반 수준인 1300달러, 통계청). 2차대전 뒤 세계의 신생국 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경제 성장이다. 1960~80년대 산업화의 성공은 도시에 탄탄한 중산층 세력을 성립시켰다. 도시의 중산계층은 한국의 또 다른 기적인 정치 민주화의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이끈 ‘조국 근대화’‘민족 중흥’의 성공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판을 완전히 뒤집었다. 김종필은 자신이 주도한 한국 산업화의 역사를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빵을 먹고 자란다”는 말로 요약했다. 
  
근사한 명분에 휩싸이기 보다 힘과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개혁 노선은 JP 국정 철학의 핵심이었다. JP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게 맹자(孟子)의 항산(恒産) 항심(恒心)"이라고 피력했다. “먹고 사는 게 편해야 인정과 예의를 안다”는 것이다. 식민지 해방 20년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타결짓는 과정에서 JP는 가장 어려운 배상금 문제를 맡았다. 담판 상대는 오히라 외상.  
1962년 가을이었다. 배상금 혹은 대일 식민지 청구권 규모는 처음 5000만 달러를 제시한 오히라와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6억달러로 낙착됐다(65년 협정서명 때 8억달러로 상향 조정).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14억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성공한 협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분출하는 민족 감정에 올라타 야당과 학생운동 세력들은 그를 "제2의 이완용"이라고 규탄했다. 한국인 개개인이 입은 식민지 피해를 정부가 국가간 협상으로 말소할 수 있느냐는 비판은 지금도 쟁점으로 남아 있다. 김종필은 "조국 근대화의 밑천을 장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매국노 소리를 들어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술회했다. 
  
식민지 배상금은 박태준의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 정주영의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 등 한국 산업화의 피와 뼈와 근육을 만드는 데 알뜰하게 사용됐다. 식민지 배상금을 소비재가 아닌 국가 인프라 건설에 집중 투입한 전략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규모의 배상금을 국민 개개인에게 나눠 주거나 권력자끼리 나눠 먹은 동남아시아 다른 신생국들과 비교됐다. 
  
박정희는 이를 기반으로 북한 김일성의 수입 대체, 폐쇄 산업 노선과 완전히 다른 대외 개방,수출 주도 전략을 펼 수 있었다. 세계은행은 국가 자본을 집중해 해외로 눈을 돌린 박정희의 근대화 노선을 오늘날 한국을 글로벌 선진 통상국가로 변모시킨 신의 한 수로 평가했다. 김종필은 60년대말 집권당인 공화당 의장, 1971~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박정희의 근대화,자주국방,중화학공업 정책의 충실한 서포터였다. 
  
JP의 2인자 정치는 파란과 견제,고뇌와 보람으로 굴곡졌다. 처삼촌인 박정희 대통령은 국정의 대소사를 그에게 의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세력을 형성해 자기에게 도전할세라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김형욱·이후락 같은 중앙정보부장이나 박정희의 고향인 TK(대구경북)정치세력이 충남 출신(부여)인 그를 이중삼중으로 에워쌌다. JP는 1968년 박정희의 3선연임 개헌에 반대했으며 72년 유신개헌 때는 권력의 이너서클에서 소외됐다.
"박 대통령은 내가 가까이 있으면 거북해 하고 없으면 아쉬워 했어." 김종필은 말년에 들어서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뒀던 처삼촌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다. "권력은 더러운 것. 환멸을 느꼈지.그런데 권력은 그런 것이기도 해." 
  
JP의 홀로서기 정치는 박정희 사후 6개월 '서울의 봄' 때 김영삼(YS)·김대중(DJ)과 경쟁하며 잠시 꿈틀거리다 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의 돌연한 등장으로 7년간 동면(冬眠)에 들어갔다. 서울의 봄 때 JP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으나 봄같지 않다)'이라는 고사로 갑작스런 권력공백의 불길함을 표출했다. 춘래불사춘은 김종필 정치의 은유와 격조를 상징했다.
1987년 YS·DJ와 함께 연 이른바 3김정치는 노무현 대통령 시대까지 15년 가량 지속된다. 이 시기에 JP 정치의 꽃이 피었다. 그렇지만 YS·DJ와 달리 그는 권력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캐스팅보트 정당(신민주공화당,자유민주연합)의 오너이거나 실세 2인자(김영삼 대통령의 집권당 대표, 김대중 대통령과 공동정부의 총리)에 만족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2인자의 비련이나 노회함, 기회주의,대세 추종론으로 그를 비판한다. 정작 본인은 "터무니 없이 집권욕에 사로잡힌 적이 없다. 당이나 정파적 이익 보다 국익을 따랐다"고 답했다. 
  
현대 정치사에서 1990년 3당합당(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YS의 통일민주당, JP의 신민주공화당)은 기득권 정치연합이 호남 정치(DJ의 평화민주당)를 포위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평가가 많다.
 JP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는 급격한 냉전 해체의 시기였다. 세계사의 미아가 되지 않으려면 국민의 대동단결, 정치권의 통합이 필요했다"고 3당합당의 이유를 댔다. 3당합당의 압도적인 뒷받침으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뤄진 한소(1990년)·한중(92년)수교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91년)은 동아시아 지정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꿨다. 한국의 몸값은 국제정치 시장에서 상종가를 쳤다. 
  
김종필 현역 시절의 마지막 드라마는 DJP 공동정권이다. 호남과 충청이 지역연합을 했다. 1997년 대선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JP는 이회창 대신 김대중의 손을 잡았다.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기록이다.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정책협약문을 작성했고, 내각의 비율을 6대4로 나눴으며 김대중 대통령,김종필 총리의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보수세력에서 JP 변절자론이 쏟아졌다. 다수의 정치학자들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을 탄생시킨 전략적 선택이요,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놀라운 통합으로 평가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의 격차는 39만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충청권에서 두 사람의 표차도 딱 39만표. 이 때 처음 성립한 '호남·진보 정권'이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다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호남·진보 세력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주류로 올랐다. 30대에 5·16혁명으로 산업화의 나라를 만든 JP가 70대엔 연합정치로 진보·민주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 JP의 많은 측근과 영향력있는 보수 인사들이 '믿을 수 없고 색깔이 다른 DJ를 왜 밀어 주느냐'고 따졌다. 김종필은 "우리가 언젠가 남북통일을 해야 하는데 동서가 갈라져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호남이 정권을 잡게 해 수십년 묵은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설득했다. 신당동 자택을 심야에 찾아와 도움을 호소한 DJ에겐 "박정희 대통령이 진 빚을 갚아 드리겠다. 대통령이 되시면 박정희 기념관을 지어 달라"고 했다. 김종필은 이를 '해원(解寃)'이라고 표현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출처: 중앙일보]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마라" 그는 다정한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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