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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영웅, 후회없는 충성—64년간 형사사건 흔적검증 전문가 최도식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6월19일 09시24분    조회: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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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최도식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하나의 탄피로 겹겹의 베일을 벗겼고 절반짜리 지문으로 진범을 확정했다. 풍부한 경험으로 여러차례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중국 경찰계에서 중대하고 해결이 어려운 형사사건의 흔적을 검증하는 ‘대들보’로 불리우고 있다.

그는 모범적인 인물이다. 지원군 전사로부터 형사기술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두 싸움터’에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였으며 85세가 된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한평생 경찰로 살아왔지만 이는 후회없는 선택이였다고 감개무량해했다. 

전설적 영웅, 후회없는 충성, 그가 바로 오늘날까지 공화국의 형사사건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고 있는 형사사건 흔적검증 전문가 최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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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중공중앙 정치국위원, 서기처 서기, 국무위원, 공안부 부장인 주영강은 명령을 발부하여 흑룡강성공안청 형사기술처 원 처장이며 고급공정사이며 전국 유명한 흔적검사전문가인 최도식(崔道植)에게 공안과학기술돌출기여상을 수여하고 상금 10만원을 발급하였으며 동시에 그가 사업하는 단위에 40만원을 장려하여 과학연구사업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항미원조의 전쟁세례를 받았고 19세에 당조직에 가입한 우수공산당원으로서 최도식은 필생의 정력을 공안과학기술사업에 바쳤다. 사업에 참가한 50년래 그는 선후로 2등공을 1차, 3등공을 6차 세웠으며 2차 흑룡강성정법전선의 선진사업자로 평의되였다. 1992년에는 국무원에서 발급하는 국가돌출기여과학기술전문가증서를 받았고 정부특수수당을 받는 전문가로 되였다. 1999년, 그는 공안부에서 첫패로 특별초빙한 형사정찰전문가로 되였다.
 
혜안으로 실마리를 잡아내다
 
20세기 50년대는 모든것을 새로 건설해야 하는 년대로서 당시 공안과학기술분야는 거의 공백에 불과하였다. 최도식은 공안대오에 들어선이래 선후로 중앙민경간부학교(지금의 중국형사경찰학원), 할빈업여직공대학, 할빈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형사과학기술 및 관련지식을 학습하였다.
 
1975년, 그는 다른 4개 성의 동사자들과 함께 《사람 손 각 부위 길이, 너비와 신장, 년령, 체형의 관계》라는 과학연구과제를 맡았다. 그들은 처음으로 우리 나라 사람의 손바닥 각 부위의 정상치와 인체 신장, 년령, 체형의 관계를 측정함으로써 현장의 손자국을 리용하여 범죄분자의 일부 생리특점을 분석하는데 새로운 근거를 제공하였다.
 
1981년, 그는 《손톱동일인정》리론을 제출하고 흔적검사대상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이 성과는 공안부 과학기술진보 3등상을 받았으며 이 성과를 리용하여 목단강시 주민 류홍진피살 등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명하였다.
 
1994년, 최도식은 현장검사와 흔적검사 사업의 수요에 근거하여 《흔적도상(圖像)처리시스템》과제를 내오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1996년에 이 과제연구임무를 완성하였으며 부급감정에 통과되였다. 이 시스템은 흔적의 리용률과 사업효률을 크게 제고시켰는바 국내에서 앞선 수준에 도달하였다.
 


1
997년 3월, 흑룡강성 부유현에서 한 가정의 네 식솔이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범죄분자는 현금 500여원을 털어갔다. 사건현장의 인조대리석지면에는 희미한 발자국이 하나 남아있었는데 수직으로 봐서는 보아내기 어려웠고 역광상태에서 비스듬히 봐야 똑똑히 볼수 있었다. 현공안국령도는 발자국이 남아있는 인조대리석지면실물과 범죄혐의자 왕항문의 고무바닥헝겊신을 성공안청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성공안청은 최도식에게 이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였다. 최도식은 현장발자국과 혐의범 왕항문의 고무바닥헝겊신과 비교해본후 인차 살인현장의 발자국이 바로 왕항문의 헝겊신에 의해 남겨진것이라고 판단함으로써 이 중대살인사건의 해명을 위하여 유일한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후 최도식은 《흔적도상처리시스템》을 리용하여 서장, 중경, 복건, 절강 등 10개 성시에서 보내온 현장의 어렴풋한 지문, 변형발자국흔적 등 21건 사건의 흔적에 대하여 기술처리를 하여 동업자들의 찬양을 받았다.
 
3가지 의견을 제출, 살인마왕 백보산을 나포
 
형사기술사업에 종사한 50년래 최도식이 친히 취급한 중대, 특대 사건중의 흔적 혹은 의난흔적검사감정은 1200여건에 달했지만 한번도 착오가 생긴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사건해명에서 관건적인 작용을 하였다.
 
72살 고령에 이른 그는 공안부의 위탁을 받고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당지 기술부문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기술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며 일부 권위부문의 착오적결론을 시정해주었다.
 


1996
년 3월부터 7월까지 사이에 북경시 석경산구, 풍대구와 하북 서수현에서 무기탄약을 강탈한 사건이 련이어 발생하였다. 같은 해 12월 16일, 북경시 서성구 덕승문외에서 또 총기를 들고 강탈, 살인한 사건이 발생하여 북경의 사회치안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게 하였다. 중앙령도와 군위령도는 중요지시를 내렸고 공안부에서도 매우 중시를 돌렸다. 하여 북경시공안국은 거대한 압력에 직면하게 되였다. 그러나 현장에 목격자가 없고 마지막 사건에서 남겨진 3개의 56식보총의 탄피와 탄두피갑(皮甲)밖에 없었기때문에 수사는 정체상태에 빠져버렸다.      
 
1997년 7, 8월, 수천리밖의 신강에서 또 련이어 3차례 총기를 들고 강탈, 살인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지 공안기관은 현장에 남겨진 탄피에 근거하여 범죄자가 56식 자동보총으로 사건을 저질렀다고 판정하였다. 공안부 형사정찰국은 두곳의 사건이 범죄수단과 침해대상이 비슷하다는데 근거하여 같은 범죄집단의 소행이라고 인정했으나 유력한 증거가 없었다. 그리하여 급히 최도식을 초청하여 신강에 가서 두 사건의 탄피에 대하여 비교검사를 진행하게 하였다.
 
최도식은 검사를 거쳐 3가지 의견을 제출하였다. 첫째, 신강에서 발생한 3차례 사건의 탄알은 모두 81식저격보총으로 발사한것이다. 둘째, 신강 현장의 탄피와 북경 현장의 탄피는 동일한 81식저격보총으로 발사한것이라고 인정할수 있다. 셋째, 북경과 신강에서 사건을 저지른 범죄자가 두 곳의 정황에 익숙한것으로 보아 범죄자는 북경에서 판결받은후 신강에 압송되여 복형하다가 만기석방된 인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 3가지 의견은 지휘부에서 종합정찰의 중대결책을 내리는데 과학적근거를 제공하였으며 수사방향을 제시해주고 수사범위를 줄여주었다. 1주일후 사건이 해명되였는데 아니나다를가 범죄분자 백보산은 북경에서 범죄한후 판결을 받아 신강에 압송되여 복역하다가 만기석방된 자였다.
 
2003년 2월초, 최도식은 그를 찾아온 한 농민을 접대하였다. 그 농민은 의란현 퇀산자향 촌민 주평복이였는데 그는 1998년후 같은 촌의 촌민 양성복이네 200무 토지를 도급맡았다.  1999년부터 시작하여 그는 200여무 토지를 더 도급맡으려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려면 양성복에게 1만원을 줘야 했다. 양성복은 《먼저 차용증을 써줘도 되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양성복에게 1만원짜리 차용증을 써주었다. 그날 오후, 그는 돈을 모아 양성복에게 갖다주었으며 양성복도 그에게 1만원짜리 령수증을 써주었다. 생각지 못한것은 몇달후 양성복이가 주평복이 그에게 써준 1만원짜리 차용증을 갖고 법원에 가서 주씨가 돈을 꾸고도 돌려주지 않는다고 신고한것이였다.
 
주평복은 말했다. 《이 일때문에 저는 3년간 소송을 하다보니 재산을 다 날리고 빚까지 가득 안았습니다. 이젠 정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습니다.》 양성복이 그에게 써준 령수증우의 지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는 선후로 성법원 사법감정중심, 성공안청 물증감정중심, 최고인민법원 물증감정중심에 찾아갔는데 결론은 감정조건이 없다는것이였다. 그후 주평복은 또 공안부 물증감정중심에 찾아갔다. 해당인원은 초보적으로 검사해본후 역시 감정조건이 없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최도식에게 기탁하고있었다.
 
최도식은 검사자료를 받아가지고 현미경아래에서 하루종일 관찰하였다. 그 령수증우의 지문은 적색인주로 눌러찍은것이였는데 인주가 너무 많고 힘을 너무 주어 찍은것이여서 많은 지문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문이 완전하지 못해 지문의 어느 부위인지 확정하기 어려웠다. 이틑날 아침 날이 희붐히 밝자 그는 다시 현미경앞에 마주앉았다. 그는 령수증우의 지문과 양성복의 견본지문을 일일이 사진찍은후 컴퓨터에 입력하고 도상처리프로그람으로 색채조절, 밝음도, 대비도 처리를 하였다. 그러자 원래 보이지 않던 특징들이 나타났으며 원래 희미하던 특징들이 더욱 똑똑해졌다. 다시 특징점측량, 특징점중첩 등 정량화, 비교기술 분석을 거쳐 끝내 령수증우의 지문이 토지를 임대한 양성복의 오른손 식지 지문과 완전히 일치하다는것을 발견하였다. 이 결론을 법원에 통지한후 양성복은 자기가 한 모함을 승인하였으며 고소를 주동적으로 철회하였다. 그후 주평복은 사람들을 만나면 《최전문가는 정말 정직하고 기술높은 분입니다! 》라고 칭찬하군 하였다.
 
큰 사건 현장마다 나타나는 최도식
 
1999년,65세의 최도식은 일터에서 물러났다. 그해 9월, 그는 공안부의 형사정찰전문가로 특별초빙되였다. 7년래 그는 전국 각지를 편력하면서 형사과학기술 및 응용분야의 더욱 높은 경지를 향하여 매진하여왔다.
 
2000년이래, 그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부분적 사냥총과 소구경총 사격탄흔의 형성기제와 해당 흔적이 나타나는 법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할빈시공안국과 성공안청 기술처를 지도하여 《사냥총사격탄피흔적에 근거하여 총종류를 판정하기》와 《소구경총사격탄피흔적에 근거하여 총종류를 판별하기》라는 과학연구과제를 지도하였다.
 


최도식은 2003년 《총탄흔적검사》(내부교재)를 저술하였다. 이 교재를 사용하여 공안부 5국은 이미 전국 5기 총탄흔적검사골간양성반을 꾸렸는데 양성자수가 250여명에 달하며 매기마다 최도식이 직접 강의하고 실습제목을 포치하였다. 최근 3년래 최도식은 전국형사기술인재고의 700여명에게 강의하였다.   
 
특별초빙된 전국형사정찰전문가로서 국내에 큰 사건이나 어려운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해당 령도는 언제나 제일 먼저 최도식을 청해다 사건의 수사에 참여케 하였다. 그의 사업일기를 보면 매번 사건수사사업에 참가한 구체적정황을 기술하고있다. 2000년 12월 9일, 총기를 들고 하남성 정주시은행에 들어가 거금을 강탈하고 살인한 사건에서 그는 현장분석을 통해 범죄자가 사용한 총종류를 판단하여 수사방향을 제시하였다. 2001년 1월 10월, 료녕성 심양시 동릉구 천원우정국저축소에서 발생한 무장강탈, 살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인민페 70만원을 강탈당하였다. 그는 사건정황과 범죄용 총기종류를 분석하였으며 수사범위를 확정해주고 선색을 제공하였다. 2001년 3월 16일, 하북성 석가장시 국면(國棉)3공장 4동에서 발생한 근여초폭발사건에서 그는 현장검사에 참가하여 사건을 분석하였다. 이 하나하나의 기록은 우수한 과학기술자의 사심없는 봉사정신을 여실히 반영해주고있다.
인민넷 2006년
 

조선족 “명탐정” 최도식의 아들: 아버지에 대한 리해는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다
 
최도식은 1997 중국수사 1호사건인 백보산사건수사협조에 가담했다. 그의 아들 최영빈도 직업생애에 한번도 사건처리에서 실수한 적이 없다. 
 
중국인의 경우 부자관계는 흔히 그 어떤 강압적인 뜻이 담겨 있다. 두터운 정분과 침묵이 어우르고 지어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풀기 어려운 매듭이 얼기설기 엉켜져 있다. 헤겔은 부자의 공동생활은 정신적인 성장의 로정이고 인지가 부단히 교체하고 승격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최도식의 막내아들인 최영빈의 성장과정은 곤혹과 의문, 충돌 나중에는 순종으로 이어졌다. 
 
최영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훙쏘러우와 가지볶음료리의 향기로운 냄새외에 기타 모든 것은 희미한 존재로 남아있다. 
 
“나중에 내가 계산해보니 아버지는 일년 36일치고 거의 200여일은 밖에 나가 있었다.”여러 차례 특이한 공적을 세운 국보급 탄두흔적전문가, 중국수사기술전문가, 공안부특별초청 전문가인 아버지가 최영빈의 눈에는 아버지로서의 배려를 할줄 모르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1981년 흑룡강성목단강시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당시DNA기술이 나오지 않고 손톱감정이 우리 나라 형사기술령역에서 거의 공백점이나 다름없었다. 법의가 사망자의 복부에서 손톱부스러기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사건수사에 거의 도움을 주지못 못했다. 
 
“손톱이 증거물로 되지 않을가?” 최도식은 이를 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흑룡강성 경찰학교 4개반급 200명 학생더러 20일에 한번씩 손톱을 깍게 하고 채취하기 시작해서부터 일년반동안 모은 소톱을 고저선배렬을 하면서 관찰했다. 최도식은 년령대에 따라 손톱의 특징과 온정성이 상이하기 때문에 사건발생후 손톱채취가 신속할수록 범죄자를 찾는데 유조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년도 안되는 사이에 “손톱의 동일성인증”성과를 발표해 우리 나라 수사기술령역의 공백점을 메웠다. 
 


중대한 연구과제로 놓고 보면 이년이란 시간은 길지 않다. 최도식은 64년동안의 직업생애를 통해 알루미늄박필름 흔적검출, 흔적사진처리시스템, 탄두흔적자동식별시스템, 손톱동일인증, 이빨흔적동일인증과 같은 과제를 연구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실험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연구를 했다”. 최영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거의 만날수 없는 존재였다. 
 
한번은 사무실에 가 아버지를 찾았는데 사무실에는 누구도 없어 불빛을 따라 지하실에 내려 갔다. 때마침 아버지가 시험실에서 법의와 함께 시체를 놓고 연구를 하고 있었다. 당시 7살밖에 안되던 최영빈은 그 정경을 보고 겁이 더럭 나서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는 실인자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는 아버지의 직업생애가 최영빈에게 남긴 생생한 기억으로 된다. “나는 며칠이고 아버지를 볼수 없었고 항상 어머니곁에 있었다. 그땐 아버지를 리해할수 없었다.”
 
‘형사사건은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최도식은 수시로 현장에 나타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22살 나던 해에 부대에서 흑룡강성공안청으로 전업한 최도식은 제1인민경찰간부학교에 가 흔적검출지식을 배우고 우리 나라 제1대 수사기술경찰로 되였다. 당시 그는 흑룡강성공안청의 유일한 수사기술인원이였다. 
 
분량이 많고 책임감과 시간이 무척 수요되는 사업이엿다. 흔적검출에는 손자국, 발자국, 파괴도구흔적, 탄두흔적과 특수흔적을 망라한 5가지가 들어 있다. 일반적인 흔적은 2미리메터내외이고 탄두를 검사하려면 현미경으로 4-6시간 관찰해야 한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DNA검출등 기술수단이 형사정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선진기술보급자인 최도식은 “언제나 신기술의 발전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선진적인 기술은 흔적검출에 유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술수단은 보조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흔적검사는 경험과 반복적인 검사, 연구가 수요된다. “항상 현장에 가 참답고 세심하게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샅샅히 검사를 해야 한다”.
 
1992년 흑룡강성공안청 형사기술처 처장으로 부임한후 행정사무도 처리해야 하였다. 흔적연구사업에 영향주지 않기 위해 그는 사무실문에 “내가 지금 어느 사무실에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사무실이 바로 흔적실험실이다. “발견과 연구는 많은 시간이 수요된다. 명절과 휴식일에도 집식구들과 한자리에 모일 시간이 없었다”.
 
최영빈은 아버지를 리해할수 없었다. “왜 낮과 밤이 없이 그처럼 고달프게 일하는가요?”
 
최영빈의 물음에 최도식은 어린 시절 지주의 칼에 맞은 상터를 내보였다. 
 


조선족인 최도식은 1934년 길림성매하구에서 출생했다. 당시 일제의 철제밑에서 허덕이던 그는6살때 고아로 되였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소학교와 초중을 마친 그는 조국을 보위할 일념으로 참군했다. 부대에서 전업한후 단위의 지지하에 흔적기술을 배우게 되였다. 
 
최도식: “사업에 참가한후 보답하려는 일념으로 시간과 정력을 전부 열애하는 사업과 나라에 바쳤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 직업을 선택했다”
 
1997년 중국수사1호사건으로 불리우던 백보산사건이 발생할때 최도식의 년령은 63세였다. 당시 북경과 신강에 남긴 탄피가 유일하게 가치있는 단서였다. 당시 감정결과에 따르면 북경에 남긴 것은 “81식 자동보총”탄피로 신강에 남긴 것은 56식반자동보총”탄피로 두곳의 총격사건을 련쇄사건으로 판정할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결과에 가슴을 치며 장담하지 못했다. 
 
최도빈은 신강에 초청되였다. 16매의 탄두를 가지고 64번 대조를 했으며 40여매의 탄피를 가지고 사흘낮 이틀밤 현미경으로 2밀리메터도 안되는 탄두흔적을 관찰했다. 마침내 그는 모두 81식자동보총탄두로 인정하고 신강와 북경의 사건을 련쇄사건으로 처리할 것을 건의했다. 
 
그 결과에 따라 수사일군들은 1997중국수사제1호사건으로 불리운 백보산사건을 사출했다. 최도식이 채용한 감별수법은 탄두흔적감정의 교과서식 사례로 되였다.
 
그의 학생들은 그를 흔적검출대사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왈가불가할때 그는 서슴없이 파단을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판정이 지어 한 사람의 생명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백보산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에 초영빈은 부대에서 전업하여 수사기술경찰로 되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아주 잘된 일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었지만 최영빈에게 있어서 이는 피동적 결정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니면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0년에 모지방에서 두차례 렵총강탈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렵총에 대한 연구는 지역화되여 탄두와 탄피대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이는 최영빈이 그의 직업생애에서 처음으로 봉착한 풀어나가기 무척 어려운 난제였다.
 
그는 아버지를 찾았다. “나와 아버지는 거의 반년을 들여 머리를 맞대고 이 사건을 연구했다. 나는 사건의 진척상황을 아버지께 회보하고 아버지의 조언을 들었다.” 최도식의 지도하에 최영빈과 동료들은 당시 국내 렵총생산공장을 모두 찾아보고 모든 종류의 총을 일일이 검사분류하고 전국을 상대로 종합적인 수치연구보고를 제출해 공안부에서 항목립안하도록 했다.
 
부자간의 정분이 점차 돈독해 지고 있는 과정에 아버지가 “인정사정”보지 않는 통에 최영빈은 한때 불만이 생겼다. 2002년 최영빈은 공개초빙을 거쳐 할빈시공안국 수사기술지대 부중대장으로 부임되였다. 
 
그런데 최도식은 최영빈의 령도를 찾아가 “우리에게는 지도자가 적임이 아니니 흔적검출에 주요한 정력을 붓도록 배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최영빈은 아버지의 행위에 전혀 리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화가 상투밑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이 본직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는 합리하건 말건 모든 요구는 제출하는 법이 없다. 사업전근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몇차례 제출했다가 퇴박맞은 후 아예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중에 우리 형제들은 습관이 되여 이런 일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리해는 한순간에 온것이 아니다. 
 
전국우수인민경찰이며 할빈시로력모업이며 할빈시10대 장인인 최영빈은 선후로 개인 3등공 2차, 2등공 1차를 받았다. 수사기술사업에 몸을 담근후 20년래 그는 여러 차례 영예를 지녔다. 그는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은 재간을 배웠다. 그래서 “특별한 의난문제를 제한외에 대다수 흔적검출은 스스로 하고 있다”
 
최영빈은 지금까지 7000여건의 흔적물증을 검사했는데 한번도 차질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거의 완전무결하다고 할수 있는 아버지의 경력으로 자기를 대조하면서 아버지가 여러 해동안 축적해온 영예에 얼룩이 갈가 항상 주의를 돌리고 있다. 
 
할빈시공안국수사기술지대 정위 묘건절은 여러 해동안 최도식과 같이 일해왔다. “최도식은 고집에 세고 보는 대로 말하는 사람으로서 절때 군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최영빈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군인의 기질을 가진 영식이는 무슨 일도 박력있게 밀고 나가고 있다.”
 
흔적검사는 쪼크리고 앉아서 하는 일이다. 현장에 남은 흔적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검사일군들은 쪼크리고 앉거나 엎드리고 눕고 웅크리는 자세로 검사를 하게 된다. 올해 85세인 최도식은 지금도 수사과정에 뒤로 물러선적이 없고 최영빈도 이를 게을리 한적이 없다. 
 
그러나 연구와 관찰면에서 아버지와 차이점이 적지않다. 사업과정에 격차가 크지 않고 내려다 보면 똑똑치 않아 포기한 흔적은 줄곧 최도식의 마음에 걸려 있다. 격차를 확대하고 포기하는 흔적에서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 1994년에 60세의 최도식은 자학을 통해 컴퓨터와 PC기술을 장악하고 또 이 기술을 흔적사진처리에 도입했다. 이 기술은 1996년에 공안부에서 립안한 흔적사진처리시스템에 들어갔다.
 
최도식은 또 알루미늄박필름으로 탄두라선흔적을 찾아내는 기술을 발명했다. 최영빈과 큰아들 최성빈이 제도와 설계를 하고 부자 3인이 탄도흔적평면장치를 고안해냈다. 동일한 직업에서 최씨부자는 공동의 화제를 찾게 되였다.
 
현장에 가 반복적으로 검사를 하고 실험실에 10여일동안 불면불휴의 날을 보내며 깊은 밤중이라도 전화가 걸려오면 자리를 차고 일어나야 한다. 아버지의 사업을 리해하지 못하던 최영빈의 몸에서 아버지의 일과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충돌과 순종으로 인생을 지나오면서 이들 부자는 점차 하나로 변하고 있다. 
 
명탐정의 배후에는 온가정의 심혈이 들어있다.
 
2016년에 최도식의 안해 심옥이는 알츠하이머증으로 진단이 났다. 안해에 대한 말이 나오자 최도식은 종이수건을 입에 물고 흐느꼈다. 
 
1999년 최도식은 정년퇴직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제시간에 사무실에 출근하였다. 그 기간 흑룡성내에서 발생한 형사사건외에 정주특대총격살인사건, 백은사건을 비롯한 전국중대사건의 배후에는 모두 최도식의 중요한 기여가 들어 있다. 
 
최영빈: “정년퇴직전에 아버지는 실험실과 현장에 거의 붙어있다 싶히 했다. 그러다 보니 가정 특히 어머니를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아버지가 가정도 돌보지 않는다고 나무람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거의 어머니의 신변을 지키지 못했다. 로년에 이런 몹쓸 병에 걸렸는데 아버지도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한생을 두고 당과 국가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모든 것을 이바지해 온 최도식은 전혀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성과에는 온가정의 묵묵한 희생이 한몫하고 있다. 
 
최도식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컵을 들고 물을 마시며 솟구치는 정서를 간신히 갈앉혔다. 방안은 몇십초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로친에게 너무 등한했어”. 
 
이는 지난 수십년동안 가사를 외면한 가책에서 우러러 나오는 말이리라, 지난해부터 최도식은 안해와 같이 양로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는 입주시 현미경, 알루미눔박필름 등을 함께 들고 갔다. “ 출근하지 않지만 경상적으로 출장하고 있다.”
 
지금 그는 주로 사건현장에서 보낸 견본을 통해 흔적검사를 하고 있다. 한편 직접 참가한 사건현장자료를 정리해 무상으로 국가에 바칠 생각을 하고 있다. “생로병사는 자연법칙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참고될 자료들을 남기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김옥이는 점차 망각속으로 추락되고 있다. 그러나 가끔 젊은 시절의 일을 떠올리고 있다. 어느날 김옥이는 갑자기 전에 즐겨 부르던 “번지없는 주막”을 조선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자금 그는 자기의 세아들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어 자기 이름도 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성공안청에 가 최도식을 찾아 탄두검출을 한다”는 말만은 기억하고 있다. 
 
최영빈은 “어머니는 자기의 생명을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과 하나로 이어놓았다.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리해하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최영빈에게 있어서 최도식은 기둥같은 존재이다. 이들 부자는 “정신성장이 로정”과 “인지의 부단한 교체와 격상과정”을 완수하고 점차 동심일체로 성장하고 있다.

중앙인민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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