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90세를 바라보는 중국 조선어연구 선구자 최윤갑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7월25일 11시55분    조회:367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윤갑

 

       최윤갑(崔允甲),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학창시절 때의 교재들, 책장에 꽂힌 우리말 도서, 신문잡지에서 본 문장, 대학입시때 작성한 답안지...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의 기틀을 마련한 선배가 바로 최윤갑 연변대학 원로교수다. 그만큼 중국 조선족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90세를 바라보는 지금, 최윤갑 원로교수의 학문 연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그의 탐구 정신과 실사구시 정신은 젊은 세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어 연구에 빠진 사나이

  1930년 2월 28일 룡정(현 연변주 룡정시)에서 태여난 최윤갑 원로교수는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1기 졸업생이다. 일본침략자 통치세월을 친히 겪었던 그에게 조선어를 배울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였다. 조선어를 잘 배우는 것으로 민족의 력사를 제대로 지키겠다는 것도 당시 열혈 청년의 다짐이다.

  교수들로부터 학문연구의 옳바른 자세를 배운 그는 재학기간 교수와 부동한 견해를 단호하게 밝힐 수 있으며 견해에 근거해 론문도 발표했다. 론문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는 교수들에게 자신의 학구적인 정신과 용기를 보여주었고 그후 발표한 론문 《의성의태어에서의 밝은 소리와 흐린 소리》는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문연구의 자세와 남다른 열정 때문에 그는 1952년에 졸업하고 바로 교원으로 학부에 남게 되였다.

  두각을 일찍 낸 그는 1956년에 조선의 저명한 언어학자 정렬모 교수로부터 “앞으로 대학자가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날의 성과를 거둘 줄은 당시 누구도 모르는 미래일 뿐이였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그에게 뜻 밖의 시련이 찾아왔다. 1970년경 연변대학에서 ‘문화대혁명’이 고조되면서 그는 학문연구의 권리를 빼앗기고 농촌에 내려가 2년반 동안 로동개조를 당했다.

  그래도 그의 생활 속에서는 우리 말 연구가 떠난 적 없었다. 늘 품사의 성질이나 특정된 쓰임새들을 생각하는 등 농사일을 하면서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것이였다. 새로운 법칙을 깨닫거나 알 수 없는 구조가 확연히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될 때마다 그는 환희를 느꼈다. 뿐만 아니라 휴식의 틈을 빌려 학생들에게 조선어 문법리론을 가르치면서 학문을 담론하였다. 그 시절이 허송세월이 아니고 그에게는 아주 값진 연구의 시간이였다.

  1972년 농촌 로동개조를 마친 그는 대학 강단으로 돌아왔지만 학술자유는 여전히 박탈되던 때였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을 강의하던 중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강의한 죄로 ‘불온학자’로 지목되여 로동자선전대의 감시와 문초를 수없이 당했다. “로동인민이 력사를 창조한 것이지 어찌 왕이 문자를 창조할 수 있느냐”는 식의 협박이 있었지만 그는 학자의 량심을 꺾지 않고 력사문헌에 따른 사실주의 원칙을 견지했다. 후날 이러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그의 실사구시 학문정신은 해내외 학자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회의를 이끌고 있는 최윤갑 원로교수(자료사진)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 기틀 마련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조선족들의 민족언어 사용이 점차 줄어들고 중국 조선어가 한어식으로 동화되가는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중국 조선어를 살리기 위해 조선어학계가 뭉치고 나섰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최윤갑 원로교수, 그는 중국조선어학회 부리사장(1981~1988), 중국조선어학회 리사장(1988~1993),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주임(1986~1999) 등 직을 력임하며 근 20년 동안 조선어 연구와 중국조선어 규범화 사업을 주도했다.

  앞서 최윤갑 원로교수는 1957년 젊은 나이에 벌써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 문제》 문장을 발표하는 것으로 일찍부터 중국 조선어 규범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임직기간 그는 중국조선어 표준문법(규범집)의 전범으로 평가받는 《조선어문법(연변인민출판사, 1983년)》 편찬을 주도했고 《조선어 규범집 해설(수정본, 1987년)》 편찬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실사구시 정신으로 중국의 실정에 맞게 중국조선어 규범화 사업을 지도했다. 중국 조선어의 표준문법과 규범화 작업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 조선어가 자기만의 문법체계를 갖게 되였으며 문화, 교육, 일상생활 등 제반 령역의 조선어 사용 혼란을 바로잡은 동시에 앞으로의 발전방향도 제시했다. 다른 측면에서 중국 조선족이라는 정체성 수립에도 큰 역할을 발휘한 것이다.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에 대한 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규범화사업을 직접 주도하면서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와 조선어 사용 현황(1996년)》, 《중국에서의 조선어 규범화사업에 대한 회고와 현재 부딪친 문제(1997년)》, 《조선어 띄여쓰기의 변화로부터 생각되는 조선어 띄여쓰기 통일안(1997년)》 등 론저를 발표해 중국 조선어 표준문법을 완선화하기 위해 애썼다.

  특히 2012년에 82세의 고령으로 론문 《사잇소리표기에 대하여(2012년)》를 발표하고 사잇소리 표기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학술회 때마다 강조했다.

  독보적인 기능주의 문법사상 등 학술성과 주렁

  최윤갑 원로교수는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어떠한 출국류학, 국내연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형편에서 개인만의 노력으로 조선어 연구의 권위학자로 성장해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중국 조선어를 살리고 지키기 위한 사명감에서 힘을 얻은 것이다.

  그는 1980년에 자신의 학술성과를 집대성한 리론문법서 《조선어문법(료녕인민출판사)》을 출간해 조선과 한국의 문법체계를 그대로 직수입하는 1970년대 이전의 연구풍토를 바꾸고 부동한 시각에서 조선어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단어는 어휘적 의미와 문법적 의미를 동시에 갖춘 언어적 단위’라는 단어의 정립기준을 세웠고 전통문법의 한계를 넘어 유럽의 구조주의 언어학, 미국의 기술언어학 및 현대언어학 리론을 대담히 수용하여 남과 북의 학자들과 다른 독보적인 기능주의 문법사상을 수립하였다.

  특히 80세 고령에 출간한 《한국어문법 신강(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9년)》을 통해 ‘결합가’ 리론을 ‘문법 지배’ 리론으로 한걸음 더 발전시켜 한국어 품사 하위분류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였다. 한국어의 동사, 형용사, 명사에 대한 하위분류법은 특히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음이 중국의 한국어교육 현장에서 증명되고 있다.

  지금까지 최윤갑 원로교수는 《조선어문법(1980)》, 《한국어문법(2000)》, 《한국어문법 신강(2009)》 등 13부의 학술저서를 펴냈고 조선어연구 론문 60여편을 발표했다. 론문들은 고대조선어로부터 현대조선어에 이르기까지, 음운론으로부터 통사론에 이르기까지, 방언학으로부터 수사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본체론 연구로부터 대조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연구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교재편찬, 인재양성 등 후대교육에 ‘한마지로’

  조선어 연구 뿐만 아니라 후대교육에서도 그는 상당한 공을 들였다. 연변대학 어문학부 교수,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 학과장, 연변대학 언어문학대학 학장, 연변대학 초빙교수 등을 력임하면서 조선어(한국어) 전문인재를 양성함과 동시에 여러종의 대학교과서를 편찬하여 연변대학 국가중점학과 건설과 국내 대학 한국어학과 건설에 ‘한마지로’를 다했다.

  대학시절 교재없이 힘들게 공부한 경력이 교재편찬을 시작한 계기였다. 당시 교수가 우에서 강의를 하면 그는 밑에서 철필로 마분지에 죽기내기로 필사를 해야 했다. 불편한 그 시절을 겪은 그는 연변대학 교원으로 남게 되자 교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부터 가졌다.

  1957년에 그는 당시 쏘련이나 조선에서는 어음, 문법, 문장, 어휘를 배운다는 것을 참조해서 자신이 배우던 《조선어문법》에 이러한 내용들을 첨가하여 《현대조선어》로 고치고 교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어음론은 리세룡이, 어휘론은 김학련이, 문장론은 자기가 맡았다. 당시는 인쇄도 안되는 시기라 그들은 손으로 직접 적어서 등사하여 교재를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착수한 과목이 고대조선어였다. 같은 해 연변대학에서 북경대학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북대반’이 생기면서 그는 북경대학 류열 교수와 친분을 맺고 북경대학에 가서 《룡비어천가》, 《금강경언해》 등 자료들을 빌려올 수 있게 되였다. 그는 빌려온 자료들을 카드가 집에 넘치도록 필사를 하여 《고대조선문선집》 등사본 교재를 만들어냈고 중국 경내에서 최초로 《고대조선어강독》이란 과목을 개설하였다. 그후 조선어학강좌는 전 교의 모범강좌로 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편찬한 《조선어어음론》과 《조선어문장론》도 줄곧 대학 교과서로 사용되였다. 1977년에 그는 교연실 동료들을 동원하여 《언어개론참고서》, 《조선어어음론참고서》, 《조선어형태론참고서》, 《조선어문장론참고서》, 《조선어어휘론참고서》, 《고대조선어참고서》 등을 인쇄본으로 출간하였다. 1984년에는 리세룡과 함께 《조선어학사전》을 집필하여 연변인민출판사를 통해 출간하였고 1987년에는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와 도서관에 련계를 취해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언해본), 《룡비어천가》, 《동국정운》, 《석보상설》, 《월인석보》, 《구급방언해》 등 20여권의 고전저서들을 얻어다 비교연구를 깊이 한 기초 우에서 마침내 실용가치가 큰 24만자에 달하는 《중세조선어문법》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교재들은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가 국가중점학과로 자리매김하고 조선언어문학전공과 조선어전공이 국가 특색전공으로 선정되는 데 중요한 포석으로 되였다.

  특히 중한 수교후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중국인 학습자들이 많아지면서 그는 70세에 《한국어문법(2000년)》을, 79세 고령에 《한국어문법 신강(2009년)》을 편찬했다. 이 책들은 중국내 대학교 한국어학과 학생들의 필독교과서로 큰 환영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학교육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반 중국 조선족의 민족언어 교육 발전에 착안점을 두었다. 1987년에 《조선어문을 대학입학시험 과목에 넣지 말아야 하는가》를 시작으로 《중국 조선민족 산재지구에서의 아동들에 대한 조선어 교육(1991년)》, 《중국에서의 조선어 교육과 사용으로부터 본 조선어 통일의 필요성(1995년)》 등 론저를 통해 민족언어 교육 발전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고민을 토로했다.

  최윤갑 원로교수는 대학 재직 48년간 수만은 조선어(한국어) 인재를 양성했는데, 대부분 제자들은 국내 대학들에서 조선어(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부분 제자들은 훌륭한 언어학자로도 성장하였다. 류은종(연변대학), 최희수(연변대학), 전학석(연변대학), 강은국(복단대학), 강보유(복단대학), 렴광호(청도대학), 최순희(북경언어대학) 등은 중국의 대표적인 한국어 연구자로 맹활약하고 있으며 그중 류은종 박사는 2006년 한글날에, 강은국 박사는 2012년 한글날에, 강보유 박사는 2016년 한글날에 각각 한글발전 유공자로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포상’을 받았다.

  최윤갑 원로교수는 일생의 심혈을 중국 조선어 발전과 한글 세계화에 기울였다. 이러한 학문업적을 기리여 김병민 전 연변대학 교장은 그를 우리 조선민족이 낳은 ‘중국의 주시경’이라고 평가했다. '구순 로인' 최윤갑 원로교수의 학문연구에는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다.

 
 
   
     /료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가무단 원 부단장, 국가급지휘가 안국민   2001년 7월, 중국음악가협회에서 주최한 중국공산당 창건 80돐 기념 중국교향악작품음악회에서 한 안국민이 창작한 관현악 〈내가 살던 고향〉이 중국교향악단에 의해 힘차게 연주되였다. 연주는 중국조선족 전통민간악기인 횡적, 단소, 장새납, 장고 등을 포함하였기에...
  • 2021-05-20
  •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 2021-05-10
  • 장춘시전염병병원 부원장이고 주임의사인 조선족 최문옥(59)씨가 2021년 전국 5.1 로동상장을 수상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4월 27일, 중화전국총공회는 대회를 소집하고 '5.1' 국제로동절을 열렬히 경축하는 한편 2891개 단체와 개인을 표창하였다.    최문옥씨가 조선족으로서 유일...
  • 2021-05-07
  • 불우아이들의〈꿈터〉를 지켜가는 원장엄마  ◈ 최미화     나와 그녀의 인연은 ‘애심’이라는 단어가 가교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퇴직후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협회 부회장 겸〈꿈터〉원장인 한수영을 알게 되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현재 아홉 ‘자식...
  • 2021-05-06
  • 박옥란 변호사       장기간 상법, 행정법, 국제법과 국제 비즈니스관례 법률자문에 종사하며 탄탄한 실력을 다져온 할빈시의 박옥란 변호사가 최근 북경DOCVIT(할빈)로펌 파트너로 취임했다.               1996년 흑룡강대학 법률학부를 졸업하고 선후로 동북...
  • 2021-04-23
  • - 시인 최기자선생님을 만나다   허련순   그때는 그랬다. 기회만 있으면 최기자선생님을 졸졸 따라 다녔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작가가 되고 싶었던 철없던 시절이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여 신풍촌에 내려왔던 1972년 그해,  나는 대대 문예선전대에서 문자창작을 전담하시는 최기자선생님을...
  • 2021-04-16
  • 자료사진 4월 13일, 중화전국총공회에서는 2021년 전국5.1로동상과 전국로동자선봉호 표창 예정 인선(집단)을 공시했다. 길림성에서 40개 집단과 28명의 개인이 이름을 올렸는데 그중 장춘시전염병병원 부원장이며 주임의사인 최문옥이 전국5.1로동상 명단에 입선되였다. 장춘시전염병병원 부원장인 최문옥은 전염병예방퇴...
  • 2021-04-15
  • 북의 왕 진경수와의 인터뷰 진경수가 맨 처음 살았던 동네는 사면이 산에 빙 둘려 있었다. 실제로 초기의 이주민들은 꽁꽁 쌓인 보루와 같다는 의미로 동네를 위자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자구는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에서 서쪽으로 꽤나 떨어진 시골이다. 에울 위가 동음의 갈대 위로 바뀌어 쓰인 것은 후날의 이야기이다...
  • 2021-04-14
  •        한동안 우리의 안방을 뜨겁게 달구었던 '트롯 전국체전'이 드디어 끝났다. 다재다능 실력파 엔터테이너 김윤길 가수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감성으로 수많은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이번에는 '불후의 명곡'500회에 출연해 또 한 번 만능 싱어송라이터의 실...
  • 2021-04-13
  • 이송 박사     이송 박사 이력은 누가 봐도 화려하다. 천진외국어대학교 일본어학과 학사, 천진중의약대학교 임상의학 학사 및 석사, 대전대학교 한의학과 대학원 박사, 한국연구재단 박사 후 거기다 얼마 전 상명대학교 사진영상콘텐츠학과 학위까지 수여받았다.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들이 엿보인다. 그런데 사진영...
  • 2021-04-12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