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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 오른 물고기였죠… 금배지 던져 행복합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1월16일 14시03분    조회: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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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조훈현

불출마 선언한 국회의원 조훈현 9단



총선을 5개월 앞둔 국회에서 가장 속 편한 의원은 조훈현일지도 모른다. “정치는 내 길이 아니다”라며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사진은 그가 돌 두 개를 바둑판 1선에 올려 ‘내가 졌다’는 표시를 하는 모습. 조훈현은 “한국당이나 민주당이나 잘해서 표 얻는 건 없다”며 “누가 누가 더 못하나 경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조훈현(66) 9단이 돌을 거뒀다. '내가 졌다'는 뜻이다. 2016년 비례대표(자유한국당)로 정치판에 들어간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의도에서는 불출마 종용과 불출마 철회가 난무하고 있다. 총선이 다가오면 눈치 10단이 된다는데, 정치적 노림수 없는 불출마는 매우 드문 일이다. 조 의원은 말한다. "금배지를 던지게 돼 행복하다"고.

2019년은 바둑계에 특별한 해다. 조훈현이 1989년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聶衛平·중국)을 꺾고 제1회 잉씨배(應昌期杯) 트로피를 들어 올린 지 30주년. 한국 바둑이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사건이었고 한·중 바둑 전쟁의 서막과 같았다. 한국기원 소속 기사로 '휴직' 중인 조 9단은 지난 2일 녜웨이핑 9단과 오랜만에 바둑을 두었다. 이 특별 대국 소식을 접하고 국회 의원회관 1009호 문을 두드렸다.

'조 국수(國手)'라 부를지 '조 의원'이라 부를지 망설였다. 그는 1982년 국내 최초로 9단, 즉 입신(入神)에 이른 고수다. 금배지를 달았지만 정치판에서는 하수였다. 조훈현은 "뭍에 오른 물고기 신세였어요. 정치는 나하고는 영…" 하며 말끝을 흐렸다. 한 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정치판에서 자신을 더 잘 파악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지든 이기든 기사들은 복기를 한다

대만 거부 잉창치가 창설한 잉씨배는 당시 세계 바둑 고수 16명을 초대했는데 한국기원 소속은 한 명뿐이었다. 사실상 중국과 일본이 벌이는 결투였고 조훈현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조 9단의 우승에 돈을 건 도박사는 없었겠네요.

"한국 바둑이 변방으로 분류되던 시절이에요. 한·중·일 가운데 꼴찌라 상대도 안 해줬고. 그래도 한국에선 제가 선두 주자였으니 세계 수준과 격차가 얼마인지 궁금했습니다. '망신만 면하자'는 생각이었어요."

―누굴 만나도 기죽지 않는 승부사인데.

"어차피 숙명이잖아요. 바둑을 약자하고만 둘 순 없고 언젠가는 강자와 붙게 돼 있어요. 저는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최선을 다한다. 열심히 둔다'밖에 몰라요."

―4강전에서 '이중 허리' 린하이펑(林海峰)을 2대0으로 누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고요?

"조훈현이 질 거라는 예상이 무성했어요. 오기도 있었지만 마음을 비웠죠. 서울에서 열린 4강전에서 승리하고 해설장에 갔더니 팬들이 기립 박수를 했습니다. 찡해져서 우승할 때도 안 흘린 눈물이 그만, 하하하.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기사들은 이기든 지든 복기(復棋)를 합니다.

"바둑의 길에 들어선 다섯 살 때부터 지고 이기고는 인생의 일부였어요. 한 번 이겼다고 해서, 또 졌다고 해서 끝이 아니잖아요. 복기는 자기반성 시간입니다. 집에 가서 끙끙거리느니 승자에게 물어보는 게 더 나아요. 이긴 사람도 다르게 갔으면 어땠을까 궁금하고요. 흑돌과 백돌로 그 '가지 않은 길'을 놓아보는 거예요."

―자서전 '고수의 생각법'에는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고 썼더군요.

"아플수록 복기해야 합니다. 승자는 무엇을 보고 패자는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짚어봐야죠. 진 날에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쓰라려도 우리는 복기를 합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하니까.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정치인으로서도 복기를 하나요.

"솔직히 배지 달고 얼마 안 돼서 절감했어요. 정치는 내 길이 아니구나. 바깥에서 배운 게 생각부터 언행까지 여기서는 다 안 맞아요. 이건 바둑도 아닌데 무조건 상대를 이겨야 해요. 다른 정당 주장도 더러 옳은 게 있을 텐데, 당론은 '무조건 반대'고 의원은 따라야 합니다. 헐뜯고 말 바꾸고 사과 받아내야 하고, 타협이 없어요."

―조국 전 법무장관 청문회는 하느니 마느니 하다 타협했잖아요.

"한국당이라 이런 말 한다고 하겠지만, 검찰이 바봅니까? 배우자가 받는 의혹이 열 가지가 넘어요. 새벽에 연구실에서 PC 들고 나오며 옷까지 갈아입고 범죄 냄새가 나잖아요. 검찰에선 '황제 수사'를 받았고. 법 이전에 상식, 염치 문제예요. 저라면 '나는 몰랐다. 내가 안 했다'가 아니라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하고 끝내요. 장관을 할 생각조차 안 했겠죠. 이런 상식이 정치판에서는 안 통하더라고요."

―의원 되기 전엔 몰랐나요?

"이 정도일 줄은요. 어느 사회나 지켜야 할 선이 있잖아요. 정치는 알면 알수록 정나미가 떨어졌습니다."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조훈현 9단은 “인공지능(AI) 알파고가 등장한 뒤 바둑에서 낭만과 재미가 사라졌다”며 “초반에는 9급이나 9단이나 똑같다”고 말했다. 지난 2일 녜웨이핑과 벌인 잉씨배 30주년 기념 대국에서 진 뒤엔 “오랜만이라 집계산도 안 되고 얼떨떨했지만 재미있게 뒀다”고 했다. 좌우명은 무심(無心)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관전하던 정치, 선수로 뛰어보니

조 9단을 정치로 이끈 사람은 원유철 전 원내대표다. 바둑계에서 부탁할 일이 많아 종종 찾아갔는데 "선수로 직접 뛰어보라"며 그를 인재로 영입한 것이다. 조 의원은 지난해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한 바둑진흥법을 업적으로 꼽는다. 바둑 단체 지원과 바둑 경기장 조성, 바둑의 날(11월 5일) 제정, 연구 활동과 국제 교류 지원 등을 담고 있다.

―바둑진흥법 말고 보람이라면.

"솔직히 말하면 제가 있을 자리가 아녜요. 다른 사람이 들어왔으면 정치적으론 더 나았을 거예요. 저는 바둑계를 위해 오랜 숙제를 했을 뿐이고요. 송구하지만 불출마 선언하길 잘했다 싶어요. 요즘 다들 공천받으려고 고생합니다. 의원회관에서 제가 가장 속 편한 의원 같아요."

―정계 진출은 그럼 악수(惡手)였나요.

"(착점을 고민하는 표정으로) 악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바둑계에서 한 사람쯤 하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어요. 역설적이지만 해보니 한 번은 할 만하다 싶고."

―생리에 안 맞는데도요?

"일단 경험하면 두 번 세 번 하고 싶은 게 의원이에요. 대통령 빼고는 무서운 게 없어요. 바둑계 최고라 해도 누가 감히 총리한테 '총리!' 외치며 몰아붙이나요? (기분을 좀 냈는지 묻자) 저는 그렇게 안 살았어요. 서울역 노숙자나 청와대 주인이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선 다들 금배지에 목을 매요. 지난 총선 땐 800명이 몰릴 만큼 비례대표 경쟁도 치열했어요(그가 14번을 받았다)."

―한국당은 박찬주 전 대장을 영입하려다 시끄러웠고 이자스민 전 의원은 정의당으로 건너갔습니다.

"문제가 있어요. 박 전 대장 부부는 재판이 다 끝난 게 아니고, 갑질 논란이었잖아요. 깨끗하게 해결하고 나서야죠. 이자스민 전 의원은 이민자를 대변하는 듯이 보이지만 정치엔 욕망이 투영돼 있어요. 정말로 못살게 군 게 아니라면, 기회를 준 정당에 의리를 지켜야죠. 의원들이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요."

―조 의원도 비례대표로 이용됐거나 소비됐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표가 됐든 화제가 됐든 당에 득이 되니까 인재로 영입하는 거예요. 이용하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지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제1회 잉씨배 결승 5번기는 조훈현에게 불리했다. 수교 전 중공(中共)에서 1~3국을 뒀는데 직항도 없어 홍콩을 거쳐 가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호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감옥 같았다"고 술회했다.

―1국을 이기고 2~3국을 내리 져 벼랑 끝에 몰렸습니다.

"최근에 평양 다녀온 한국 축구와 비슷한 거예요. 제가 손흥민은 아니지만 그런 조건에서 좋은 성적 내겠어요? 당시 중국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심신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둑을 그르쳐요. 대국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진 거예요. 다행히 4~5국을 싱가포르에서 두면서 풍향이 바뀌었어요."

―우승 상금 40만달러는 지금 봐도 거액인데.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조훈현(왼쪽)과 녜웨이핑이 격돌한 제1회 잉씨배 결승 2국. 아래 사진은 조훈현이 1989년 9월 잉씨배 우승 후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 한국기원
"승리를 내게 준다면 상금은 양보하겠다는 생각을 수천 번 했어요. 돈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애 엄마가 어차피 뺏을 거니까(웃음). 하지만 우승은 영원히 내 것이죠."

―조 9단은 줄담배와 금연초로도 기억됩니다.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저는 늘 담배를 피우고 있어요. 하루 다섯 갑이 필요했으니. 대국 습관처럼 꺼내고 피우고 끄고 손가락에 없으면 다시 꺼내고…. 끊은 건 (이)창호한테 타이틀을 다 빼앗겨 대국 수가 확 줄어든 탓도 있습니다. 또 금연 구역이 늘어나고 제재가 심해졌어요. 1995년 미국에 놀러 갔는데 10시간 넘게 기내에서도 못 피우고. 흡연이 더 고역이었죠. 성질이 나 확 끊었어요."

―평생 가장 잘한 일은 뭡니까.

"제일 큰 영광은 잉씨배 우승, 가장 잘한 건 금연(웃음). 가족은 전관 왕보다 금연 성공을 몇 배 더 기뻐했어요."

"바둑도 정치도 실수 줄이기 싸움"

조훈현은 잉씨배 4국을 앞두고 '불리하지만 절대 쉽게 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까스로 반집을 이겨 마침내 5국. 돌을 가려 흑을 쥔 그는 2국과 4국에서 쓴 포진을 다시 들고나왔다. 고집한 까닭을 묻자 "왜 안 되는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한 판으론 알 수 없다"며 "중간 과정이 문제지 초반 몇 수가 꼭 나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정치도 그럴지 몰라요. 고향 목포에서 출마하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목포에서 바둑 좋아하는 사람은 다 내 편이겠거니 했는데, 기사 조훈현을 좋아할 뿐 정치인 조훈현에게 표를 주진 않아요. 거꾸로 깎여요(웃음). 정치와 바둑은 달라요."

―결국 3대2로 잉씨배를 차지했는데.

"대국하며 녜웨이핑 얼굴을 봤는데 저보다 더 굳어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바둑이 편해졌어요. 그런데 우세를 의식하자 잡념이 들어오고 수가 안 보이는 겁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죠. 중국은 녜웨이핑이 이길 줄 알고 샴페인 터뜨릴 준비를 끝낸 상태였어요. 그 파티를 제가 망쳤죠. 우승으로 한국 바둑을 세계에 알리는 임무를 마쳤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습니다. 이제부턴 제자(이창호)가 해주겠지…."

조훈현은 귀국하고 김포공항에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집에 도착하니 15세 여드름투성이 이창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1984년부터 한 집에 산 제자는 이듬해부터 스승의 타이틀을 하나둘 빼앗기 시작했다. '바둑 황제' 조훈현은 1995년 무관(無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언젠가 창호한테 무너질 수도 있다고 예감했나요.

"바둑은 강자가 나타나거나 나이 먹어 약해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사실상 시간문제예요. 창호에게 지기 전까지는 떨어본 적이 없어요. '패배가 이런 것이구나'를 깨닫는 과정이었죠. 어차피 빼앗길 타이틀이라면 제자가 가져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처음에도 무(無)에서 시작했으니까, 바닥에서 올라갈 일만 남았잖아요(웃음)."

―바둑을 이기려면 묘수가 필요한가요?

"아뇨. 실수가 적은 쪽이 승리해요. 명국은 묘수가 많이 나온 대국이 아니라 나도 상대도 실수를 하지 않은 대국입니다. 실수를 덜 하는 게 중요하기는 정치도 똑같아요. 한국당이나 민주당이나 잘해서 표 얻는 건 없잖아요. 누가 누가 더 못하나 경쟁하는 식이죠."

―그럼 국민이 정치에 걸 희망은 뭡니까.

"글쎄요. 민심을 제대로 읽어야 해요. 정치인들이 복기도 하고 반성도 하면 좋으련만. 제가 들어올 때부터 친박·비박이 싸웠는데 지금도 그런 기미가 있어요. (과거에는 초선 의원들이 정풍 운동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정풍이고 뭐고 먹히질 않아요. 여기도 계급이 있어요. 6선, 7선 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고수고, 저 같은 하수야 말주변도 없고 끼어들 수도 없지요."

―대통령이나 여당에서 이탈한 표심이 한국당으로 건너오진 않고 있는데.

"실수를 되풀이하기 때문이에요. 최순실 재판은 아직 안 끝났어요. 조국 사태도 더 큰 게 터지지 않는 한 내년 총선까지 갑니다. 민주당이 승리한다면 '나라가 이대로 가도 괜찮다'는 뜻인데 과연 국민이 그렇게 생각할까요? 제 형세 판단으로는 한국당이 필패라거나 열세는 아녜요."

―우파가 총선에서 이기려면 어떤 수를 둬야 하나요.

"구태를 벗어야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어요. 총선은 중도층 가져가기 싸움이에요. 그들이 의심을 거두도록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야죠. 잘하진 못 해도 실수 안 하는 건 할 수 있잖아요."

―최다승 기록(1949승)을 보유 중인데, 가끔은 치열한 프로의 바둑을 두고 싶을 것 같습니다만.

"그럴 땐 인터넷 바둑을 두는데 단수(單手·한 수만 더 두면 돌이 잡히는 상태)가 안 보여요. 서러운 일이죠. 4년 쉬었더니 실력이 더 녹슬어 곧장 바둑판으로 돌아가기도 어렵겠어요. 전성기 땐 1년에 100승이 쉬웠는데 엄살이 아니라 이젠 1년에 10승도 버거워요. 보통 사람도 생존 경쟁을 하지만 바둑 기사는 더 적나라하고 구체적으로 해요. 과거의 영광만 가지고 살 순 없으니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조훈현은 바둑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머릿속에선 누구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지난 4년을 복기해달라 했더니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며 "인생이라는 바둑의 일부분"이라고 했다. 타고난 승부사로 불렸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보니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더라"며 그가 덧붙였다.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해 내 길을 가야죠. 죽을힘 다해 싸웠다면 그것으로 이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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