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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족 2세 영화감독 김성우는 누구?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월21일 09시33분    조회: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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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성우

재일조선족2세 영화감독 김성우

“안녕하세요. 김성우입니다.”

첫 만남이 관객과 감독으로였다. 비공개상영회가 있은 와세다대학 오노기념강당의 스크린 뒤쪽에서 방금전까지 영상조절을 하던 한 젊은이가 무대에 올라 관중석에 인사를 하고 있었다. 월급과 스케줄이 불규칙하면서도 영상세계에 젊은 꿈을 의탁하고 있는 아시스턴트로 보였던 그가!

김성우, 나이 스물여섯살, 영화감독으로 떠올리기엔 너무 젊었고 스탭 한명도 거느리지 않은채 혼자인 그가 다큐멘터리영화 <핏줄>의 감독이였다. 게다가 스크린속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엄마.

연길시 중앙소학교 담임이였던 김선생님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김성우이다. 매일 친구들과 싸웠고 선생님은 늘 성우를 탓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선생님의 닥달을 견디느라 싸움만 반복했던 기억밖에 없다는 성우에게는 그 시절이 그닥 즐거운 추억만은 아닌듯 싶다.

“그땐 외할머니가 엄마인 격이였습니다”

외가집 가족사진

세살때 엄마가 일본류학을 떠나게 되였고 성우는 의사였던 외할머니한테 맡겨졌다. 다섯살때 부모가 리혼을 하게 되면서 화가였던 아버지와는 전혀 련락이 안되였다. 한해에 한번씩, 그것도 일주일밖에 못보는 엄마는 성우에게 스타와 같은 존재였다. 남들처럼 자나 깨나 보고 싶은 엄마얼굴인데 엄마는 일주일이상 성우곁에 있을수 없었다. 친구들과의 싸움이 잦았던 그 때 늘 선생님과 할머니한테 반항했다는 성우는 자기의 중앙소학교시절을 ‘저항’의 시작이라고 개괄지었다.

열살때 엄마가 성우를 데리러 왔다.

“참 다행히 우리 엄마는 날 버리지 않았어요”

“엄마가 어떻게 자식을 버려요?”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성우임이 틀림없다. 여직 엄마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사는 성우이다.

엄마따라 일본으로

작은 성우에게 애니메이션의 나라 일본은 천국으로 여겨졌다. 외할머니와 헤여지는것쯤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일본의 동북지구인 미야기켄(宮城県) 센다이시(仙台)에 정착했다.

일본에서의 소학교 3학년, 모든것이 생소했다. ‘김성우’ 이름자로만으로도 소수자였던 성우는 어리벙벙해져 버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왜 웃고들 있는지, 알수가 없었던 그는 또다시 옛버릇이 살아났다. 어렸을때처럼 싸움으로 말했고 싸움으로 자기를 지켰고 싸움으로 친구를 사귀고 싸움으로 친구를 잃었다. 덕분에 엄마가 매일이다싶이 학교에 불리워 다녔다.

왕따를 당하기 보다 왕따를 하는 축이였다. 당연히 친구가 없었던 그때부터 소설책이 유일한 친구로 남았다. 고독해서 읽기 시작한 소설이였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고독을 익히는 격이 되였다. 어린 소학생이 기억하는 고독은 어느때부터인가 자존심과 오기로 바뀌였다. 열심히 공부하여 중학교부터 고중까지 마칠수 있는 이른바 ‘귀족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김성우 감독

대부분 의사, 변호사의 자식들인 부자학교에서 자기와 잘 어울리지 않는 학교분위기에 숨이 막힐때가 많았다. 검도(剣道)에만 열중했던 중학교시절이였지만 그래도 그때 사귄 친구들중에 인재가 많이 나왔음을 뒤늦게 영화를 찍으면서 깨달았다는 성우이다.

전국적범위내의 검도대회를 목표로 매일 분주했던 덕분에 2년을 무난하게 다닐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에서 패배한 울분(자신을 향한 것이였다)은 상상외로 컸다. 또다시 불뚝불뚝 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던 성우는 하지 않아도 될 고중입시에 기분을 내몰기로 작정하고 3학년때 중학교를 자퇴하였다.

결국 제1지망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바로 옆에 있는 학교에 진학한다. 그 학교를 선택한 리유는 제1지망학교앞을 매일 지나면서 도달하지 못한 자기의 오점을 짚고 3년을 견디자는 엉뚱한 오기였었다. 3년동안 정신적으로 자아를 괴롭히며 뭔가를 바로 잡자고 모진 생각은 하면서도 선생님의 강의를 귀등으로 짬만 나면 세계문학서적을 뒤적이였다. 결국 3학년에 이르러 독학의 길을 선택한 그는 불등교생으로 되여 버린다. 그때부터 짬짬이 소설을 써서 친구들한테 돌리기도 했는데 그것을 성우는 초기 창작이라고 말한다.

독학으로 성우는 니이카다켄리츠대학(新潟県立大学)에 입학하여 철학과 문학을 배웠다. 영화잡지에 영화소개를 쓰는 일을 하기 시작했던 그는 대학교 3학년때 영화를 찍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장기휴가를 받은 그는 졸업론문용으로 자기의 루트를 찾는 영화인 <핏줄>의 전신인 <성우>를 찍기로 마음 먹었다. 론문 테마는 <영화에서의 리얼리티(현실성)>였는데 론문답변시에는 15분간의 미완성 다큐영화였다. “두가지 론리적인 문맥을 설정하여 그것이 개개로 결렬할때 현실성이 태여나게 한다”는 주제의 론문이였다.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그린 성우의 초상화를 찢는 장면을 설치하여 갈등하는 자신과 작가로서의 자신을 부딪치게 하여 결렬시킴으로써 그때 관객을 끌었다 한다.

정체성의 고민

20살때 성인이 된 자기를 뒤돌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성우, 자기속에서 한걸음 발전을 가져 온것이 바로 영화였고 필요한 자금을 절약하기 위해 자기가 피사체로 되였던 성우였다. 그는 ‘주관카메라’로 살던 삶을 ‘객관카메라’로 살기 시작했다. 그 카메라속에는 일본인은 물론이고 조선족인 자신이 들어 있었다.

상영회에 조선족들이 많이 온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성우는 다문화적, 다언어적인 환경을 배제하지 않는 현재 도꾜 등 지구와는 달리 센다이지구에서 자기는 거의 특별한 존재였다고 했다. 그러한 환경때문임은 물론, 저항을 하는데 힘을 빼느라 조선족에 대한 집착은 거의 없이 살아 왔다는 그다.

인격의 차이인지 조선족적인 요소의 차이인지는 잘 모르지만 세상은 늘 다른 눈길을 주었다. 일본인으로 자신을 포장했다고 해서 일본인이 되는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순도”를 론할 정도로 확연하게 일본인보다 감각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앞섰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였던지 기억에는 없지만 긴 시간을 들여 큰 산을 넘고 난 후의 기분이였다. 물론 주위의 일본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였지만 ‘다음에는 또 뭘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한동안 했었다.

이름이 츠노다류이치(角田龍一)로 바뀌면서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고 성우 또한 외국이주자들은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헌데 재일코리안 민족학교에 갔을 때에 또다른 차별을 느꼈다. 제일 쉬운 일본어가 아닌 조선말로 대화하려 애쓰는 친구들을 보았다. 자기가 제일 밑바닥에 있는 것 같은, 자기한테는 존재하지 않는 감각을 거기서 보아 냈고 비집고 들어 갈수 없는 사람벽을 느꼈다. 하지만 구태여 그것을 허물려 하지 않은 자신도 거기에 있었다는 성우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관찰자인 자신을 발견한 성우는 무의식중의 핏줄, 뿌리감각의 작동을 받았을 수도 있다. 조선민족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한국영화에 끌리우는 점만으로도 그렇다.

아버지

어렸을때 외할머니와 함께

외할머니를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연길에 간 성우는 헤여진지 18년이 된 아버지를 찾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 과정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찾아 몇번이고 한국으로 간다. 빚 재촉에 시달리는 생소한 아버지였지만 도발적이고 절망적인 유모아, 허무하고 차갑고 암담한 아버지의 분위기가 좋았다는 성우이다. 그 원인이 현실 풍경의 덕이였다면 그 풍경은 바로 피줄인 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삼촌, 사촌들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들과 성우간의 대화를 생동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아버지를 알아가고 리해하는 과정과 피줄을 파헤치는 과정을 감독자신이 일본에서는 번질 기회도 없는 연변말로 끌어 가고 있다. 제일 중요한것은 세계적으로 조선족에 대한 다큐멘터리영화로는 첫 작품으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개봉까지의 길

잠시나마 세상물정과 류행을 떠나 있는 시간이 필요한 영상작가로서의 김성우는 2018년에 교토의 유명한 사원(寺院)인 다이도쿠지(京都・大徳寺)에 서생으로 들어 가게 된다. 고독이 생기는 그곳은 작가로서 너무 고마운 곳이였다. 거기에서 80여시간에 달하는 <핏줄>의 소재들을  73분 다큐멘터리영화로 편집하는데 근 반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떠돌아 다니는 승려들의 수행종목으로 ‘움직이는 좌선(座禅)’이라고도 불리우는 매일매일의 고된 청소를 통하여 무상(無常)의 진리를 깨달았다. 결국 사원안의 현실을 너무 깊게 알게 된 성우는 파문(破門)을 하고 말지만 식물들과 벌레들을 보며 계절을 감지했던 그 고독의 맛은 잊을수 없게 되였다. 그래서 사원을 나온 요즘에도 교토의 어느 산중에 거처를 잡고 ‘매일 생명을 걸고 산짐승들과 함께 조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완성된 작품 <핏줄>은 이미 다섯차의 일본국내 및 국제 영화제에 작품을 선보였고 <기대되는 신인 감독상>도 받았다. 비용때문에 필리핀에서 열린 세부국제영화제에는 영화만 보냈고 열망중인 한국의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는 선택받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하고 불안에 꽉 찼던 ‘자아’를 버리는 노력도 많이 한 김성우감독은 손안의 <핏줄>을 더 멀리, 더 넓은 세상에 보내기 위한 극장개봉에 도전하기로 했다.

촬영제작은 개인전이고 극장개봉은 단체전이라 한다. 제작을 할때보다 지금이 더 바쁜 감독이다. 포스트제작, 현장뛰기, 매체선전활동과 유명인사의 사인받기, 최종 편집마무리까지 모든것을 혼자 담당해야 하는 그는 우선 거기에 드는 백만엔 좌우의 비용을 교토의 번화한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로 벌어야 했다. 당장 시급 1200엔의 로동으로 100만엔을 벌어야 하는 현실속에는 자기만이 할수 있고 꼭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는데 잠시 중단할수밖에 없었다며, 인생의 지름길을 갈망하게 되더라고 지난 일을 떠올렸다.

세도나이까이(瀬戸内海), 태평양쪽,동북,일본해쪽을 한바퀴 발로 뛰면서 영화관을 찾아 자체선전을 해왔고 처음에는 세명의 관중밖에 없었던 자주상영회도 북경에서의 상영회를 포함하여 이미 20회를 넘겼다. 결과 영화배급회사가 결정되였고 올 3월에 일본의 7개 영화관에서 관중들과 만나게 된다.

극장개봉에 대하여, 제작비 몇십억을 쓴 영화와 몇백만을 쓴 영화가 하나의 스크린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것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김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관람자수 만명을 돌파하는 꿈을 꾸고 있다. 그것이 일본다큐멘터리영화의 현재 운명이라 한다.

고맙고 미안한 사람들

엉뚱하게 영화를 찍겠다는 자기를 허락하고 지지해 주신 교수님들, 그리고 처음으로 영화를 구상하게 된 프랑스살롱과 흡사한 대중술집 <소쿠라테스>와 거기에서 우연히 만나 여태껏 도움을 받아 온 시노다아키라(篠田昭) 니이가다시 전임시장이 제일 처음 떠오른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음악을 담당해준 중학교때의 친구인 바이올리리스트 고코스나오(郷古廉)와 프로듀서를 맡아 준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이며 극작가, 연출가인 야마가히로유키(山賀博之) 두분한테는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보수없이 두 유명인에게 손을 내밀었던 <핏줄>이였기 때문이다.

피줄들

예술가 남편을 두었던 연유로 아들이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생리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것이라는 엄마.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직은 생각지도 않고 밤낮으로 영화에만 빠져있는 성우를 막으려고 “그럴 예정이면 집에서 나가라”고 으름장을 놓는 엄마와 갈등하면서 친구들 집과 공원을 거점으로 지냈던 성우, 그때 엄마가 많이 울었을 것이라고 쑥스러워 했다. 지금도 엄마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것은 여태 어릴때부터의 질긴 성격과 고집 덕분에 중도에 좌절하지 않은 자기를 잃을 것 같아서라 한다.

아버지는 또다시 련락두절이 되였지만 어디선가 변함없는 삶을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는 아들 성우, 이 영화때문에 김씨가족에서 배제될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웃는 성우, 지난해 12월에 외할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도꾜에서의 상영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칸센안에서 접했는데 외할머니를 영상으로 남긴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했다.

“앞으로는 적어도 1억엔을 넘는 비용의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몇백만엔 비용의 영화때문에 1년 혹은 몇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아요. 차라리 좋은 영화를 찍기 위해 돈을 버는데에 1년간을 투자함이 옳은듯 싶습니다”

임금지불을 제대로 할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다는 크고 당찬 꿈앞에 놓인것은 중압과 도전과 약속없는 현실이다. 각종 제한을 받는 인간창조의 기간은 더없이 짧은것으로서 일각을 다투며 종말에 가까워질수도 있다는 조급함을 젊은 김성우감독을 보며 느꼈다. 부디 재일조선족 2세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핏줄>이 관객 1만명을 넘을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에 ‘우리 모두’의 피줄인 성우가 ‘영화의 지름길’에 하루빨리 오를수 있게 해달라는 또 다른 갈망을 어딘가에 얹어 본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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