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텔레비죤방송국 조서광 기자
갑자기 들이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페염 사태후 일상을 잃은 사람들은 외출자제의 답답함, 불안과 공포속에 쌓여있을 때 기자들이 방역 최전방에서 보내오는 가장 진실한 현장보도는 희망의 불씨가 되였으며 전 세계에 중국의 힘을 과시하였다.
취재현장을 종횡무진하는 기자들 중 방역복에 “서광이 보인다!”란 글발을 쓴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조선족 기자 조서광은 각별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는 그의 이름인 동시에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만의 기호였다.
2월초 조서광 기자가 무한취재를 떠나던 시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페염사태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무한 ‘봉쇄’, 춘절 년휴 연장, 학교 개학 연기, 재택근무 등 특단의 조치가 잇따랐지만 매일 신규 확진자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극한 상황인 2월 3일 조서광 기자는 무한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바깥출입도 자제하던 상황에서 무한취재가 두렵지 않았습니까?”
“물론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젊었기에 면역력은 문제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적인 방호를 잘 하기만 하면 바이러스 전염을 차단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역병의 몸살에 부대끼는 도시의 모습은 기차에서 상상했던바보다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하늘은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뿌옇게 뒤덮이고 음침한 날씨였다. 매서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기차에서 내리는데 렬차원이 큰소리로 “힘내세요!”하면서 그들 취재팀을 응원해주었다.
려객들로 붐비던 기차역광장에도 그들을 마중나온 차 몇대가 보일 뿐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만 도처에 웅크리고 있었다. 거리는 인적이 끊겼고 상가들은 모두 휴장중이고 이따금씩 응급차가 도로를 오갈 뿐이였다.
그는 무한에 도착한 그날부터 호북에서 세번째로 확진환자가 많은 황강 취재를 시작으로 매일 과부하로 일했다. 방역 최전선 기자로서의 책임감으로 어깨의 짐은 한결 무거웠다. 급증하는 환자를 제때에 수용할 수 있는 병원시설의 부족과 병상 대기중에서 진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의 고통, 가족들의 안타까움,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그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했다. 매체의 감독기능을 발휘하여 방역사업으로 하여금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이끌어야 했다. 그는 방창병원, 동제병원 등 중증환자를 수용하는 전담병원을 취재하였으며 인력과 장비 부족, 안전조치 미흡, 바이러스 감염위험 등 불안감을 이겨내면서 환자를 치료하고 생명을 구조하는 “역행자”들의 영웅적사적을 써냈다.
그가 만난 간호장 고람은 50여세의 동북녀성이다. 병상에서 온종일 방역복을 입고 있는 고람은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몸에서 열기가 올라오면서 보안경에 김이 서려 시야도 금방 흐릿해진다. 그러나 침착하게 환자의 호흡기를 꽂고 밀착진료에 몰입하고 있는 간호장 고람은 알고보니 2003년 사스와 2008년 문천대지진의 최전방에서 생사의 고비를 몇번 넘나든 사람이다. 사스 때 ICU병동 간호를 맡은 그는 얇은 격리복을 입고 면사마스크 네개씩 착용하고 진료하였지만 사스에 감염되지 않고 사스를 전승하지 않았는가 하면서 락관적이였다.
“두렵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위험하지 않습니까?” “괜찮아요.”……간호장의 “괜찮아요!” 이 한마디는 마력마냥 주위 사람들에게 신심을 가져다주었다. 장기간 병실에서 환자들의 간호를 맡으면서 육체적인 피로는 물론 수시로 감염될 수 있다는 정신적 압박감도 대단했지만 간호장의 침착한 태도는 기타 의료진에 무언의 힘이 된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무한은 위기극복의 본보기로 되였으며 영웅적 무한인민은 무수한 미담을 전했다. 조서광 기자는 재치있는 필치로 그들의 사적을 기사화하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어서요.” 조서광은 무한에서 만난 택배원, 배달원, 사회구역 서기, 제대군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였다고 한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감염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방역 제1선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영웅들이며 그들의 숨은 노력으로 무한시민들의 일상생활이 보장되였으며 이번 방역의 승리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썼다.
4월 초 봄빛이 무르익고 벗꽃이 만발할 때 무한은 70여일간의 ‘봉쇄’가 해제되였다. 조서광 기자는 무한인민들과 함께 이 력사적인 시각을 맞았으며 함께 전염병 예방통제 저격전의 승리를 환호하였다. 상가들은 속속 영업을 시작했고 생산재개, 직장복귀되면서 무한은 또다시 생기를 찾았다. 조서광 기자는 4월 25일까지 전염병 예방통제 최전방에서 하루에 몇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도시락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취재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5개월간 남극과학고찰 수행
조서광은 2003년 료녕성 철령시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대학 신문학학부에 입학하였다. 북경대학 신문학학부에서 본과를 이어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없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 입사하였다. 4년간 평양주재 기자 경력, 5개월간 남극과학고찰 수행기자 등 남다른 다양한 경험과 경력을 쌓으면서 베테랑 기자로 성장한 그는 이번 사태가 발생한 후 자진하여 호북취재팀에 합류하였다.
무한에서 돌아온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하고 싶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한으로 떠날 때 부모님들께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라도 늦게 알려 그만큼 걱정을 줄여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송 탐방 기자이다 보니 부모님들은 텔레비죤에서 그가 무한으로 취재나간 것을 알게 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적 없는 조서광 기자는 이번 취재임무를 훌륭히 완성하였으며 기자의 초심과 사명을 훌륭히 실천하였다.
그는 80여일간 무한취재중 친인을 잃은 가족들, 완쾌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직관적으로 체험하게 되면서 평범한 삶에서 오는 여유와 순간순간의 행복을 더욱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라고 했다. 이 봄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리유이다.▣(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서정옥 편집/리호남 조판/ 한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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