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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59]이름난 중국조선족 음악활동가 박장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7월24일 15시59분    조회: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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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박장수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59](박장수편1)

오늘부터 저희 특별기획프로에서는‘중국조선족 음악계의 큰 심부름군'으로 널리 알려진 박장수선생의 음악조직활동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박장수선생은 60년 예술생애에 40년을 조직자 인생을 살아온 분입니다. 그는‘수레를 끌고 비탈을 오르는’로고를 치르면서도 굴함없는 의지로 각종 조선족 음악예술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우리 나라 음악계의 최고 전문가 대상인‘금종상’조직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박장수선생의 민족음악에 대한 굳은 신념과 불타는 사랑, 굴함없는 의지와 아낌없는 헌신정신, 그가 쌓은 경험과 지혜는 우리 민족 음악예술무대의 불멸의 멜로디로, 음악예술발전의 드팀없는 디딤돌로, 우리들의 훌륭한 귀감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중국음악계의 유일한 최고 전문가대상 '금종상' 조직상 수상자 박장수.

프로필

1941년생, 국가 1급 배우 중국공산당 당원.

1961-1979년 연변가무단 배우 공청단총지 서기, 정공과장

1979-1981년 연변문련 비서,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부비서장

1981-1997년 연변문련 부비서장, 당조성원,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2-3기 부주석 겸 비서장

1997-2003년 제4기연변음악가협회 주석

1999년 중국음악가협회 제5기 리사

1989-2012년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상임부회장 겸 비서장(법인대표)

2012-현재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명예회장

주요 수상경력:

2002년 제2차중국음악 ‘금종상’조직상(음악활동가상) 수상

2013년 《중국조선족교향음악작품선집》(신호 박장수 주필) 제3차중국출판 정부상 수상

 

음악소년의 어린시절

올해 내 나이가 80세인데 인생을 회고해보면 예술인생 60년에 음악조직사업을 40여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음악조직사업에 드팀없이 종사할 수 있은 근본원인은 정부 각계의 지지와 음악계의 단결 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는 외에도 개인인생관으로 놓고 말하면 평생 그 어떤 어려움에(봉착해)도 물러서지 않고 꿋꿋이 일할 수 있는 강인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965년도에 모주석과 주덕, 주은래 등 당과 정부의 지도자를 만난 그때로부터 한평생 사회주의와 인민을 위해 복무하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바꿔말하면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평생 당과 인민을 위해 살겠다는 굳은 결심이 나로 하여금 계속 시종일관하게 사업할 수 있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내가 지난날 살아온 일들을 일정한 폭을 가지고 말하려 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조선 함경남도 함흥군의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는데 12세 때에 부친을 잃고 1931년도 21세 나는 해에 도보로 걸어 중국의 흑룡강성 목단강으로 왔습니다. 목단강에 정착한 뒤 자동차운전기사도 하고 목수질도 하고 나중에는 간장공장에서 기술일군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저는 1941년 목단강에서 태여났고 1945년도 광복이 난 다음 외가집이 룡정 덕신구 용암촌 청림동에 있어 거기로 이주했습니다. 이듬해 덕신으로부터 돈화현 관지구 신탈아참에 이주했습니다.

청년시절의 박장수.

겨울인데 그 곳에 가 보니 집이라는 것이 땅막이였고 구들돌 대신 나무판을 깔았기에 구들에서 불이 나 어린 아이가 화상을 입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부터 농사를 지었지요. 거기는 사람들이 살지 않은 미개척지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이 대단히 좋았지요.

이듬해 봄에 집을 짓고 사는데 마을주위에 노루가 내려오면 작은 노루는 쫓아버리고 큰 노루는 잡아먹기도 하였어요. 강에 가서 물에 침을 뱉어도 물고기가 떼를 지어 몰려들 군 하였어요.

이 곳은 국민당들이 철퇴할 때 던지고 간 폭탄이나 탄알들이 아주 많았지요. 그걸 가져다 강에다 한방 터치우면 스물 몇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몇 함지를 걸여다 잘 먹었지요. 농사도 잘되고 했는데 그 곳의 최대결함이 수토가 대단히 나빴지요. 그래서 뼈마디가 붓는 지방병이 많이 생겼는데 나와 누나는 그곳을 떠나 외가집에 가서 1년간 공부를 했어요.

 

연변예술학교 학생시절.

그리고 1950년도에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돈화에 이사를 와서 돈화 제2소학교에 다녔지요. 1954년도에 돈화2중시험을 쳤어요. 입학비례가 6대 1이였는데 입학했어요. 그해에 우리 누나도 연변1중에 붙었지요. 두 오누이가 상급 학교에 붙었다고 온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지요.

돈화로 온 다음 아버지는 농촌에 있던 수레를 가져다 시내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돈벌이가 너무 안되여 때로는 소먹이도 대기 힘들었어요. 먹을 식량도 없어 어머니가 밭에 나가 감자이삭을 주어다 먹으며 상당히 어렵게 살았지요.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는 또 맹장에 걸려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 나를 수술해준 송림병원의 최원장이 매일 아침 자기 집 우유를 배달하고 우유를 먹으며 영양보충을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매일 식전에 3, 4리 되는 대마로라는 곳으로 우유를 배달하였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영양보충 시키려고 개 한마리를 샀는데 쌀이 없어 련속 개고기만 먹자니 힘들었던 일이 잊혀지지 않았지요. 

고생 많은 어머니(앞줄 왼쪽)를 평생 모신 한가족.

평소에 밥이라는 걸 별로 먹어보지 못하고 검실검실한 밀가루로 떡국을 만들어 먹었는데 한사발에 떡이 몇개 없었지요. 내가 떡국 몇개를 먹고 나면 다른 식구들은 국물만 마시며 이런 정도로 살았어요.

1954년도 말에 돈화 시내에서 농촌동원이 있었어요. 시내에서 살길이 없어 돈화현 한장향 신설툰에 가서 한 농민 집 우사칸을 손질하고 거기서 살았어요. 아버지가 목재판에 돈벌이를 간 후에 녀동생이 하루는 점심을 급히 먹다가 체해서 숨이 떡 막혔어요.

엄마와 내가 둘이서 아무리 애써도 안되니 5리 되는 한장향병원까지 동생을 업고 죽기내기로 뛰였어요. 한 1리도 못 가서 다섯살 짜리 녀동생이 나의 등뒤에서 머리를 뚝 떨구는 것이였어요. 동생이 죽은 다음 엄마와 둘이 울다가 다시 동생의 주검을 업고 돌아 오던 그 길에서 기가 딱 차던 일, 엄마는 기절해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여 겨우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이 소식을 아버지는 목재판에서 듣고 뜻밖의 타격으로 정신이상이 왔어요. 아버지께서 고통스러워하던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리고 그 길로 세상 떴지요. 아버지마저 없는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학교에다 휴학을 내고 농사질을 시작했어요. 그때 나이가 어린데다 몸이 약하고 단련이 없어 농사를 짓기가 말이 아니였지요.

삼태산(신설툰)이라는 곳은 또 고산지대여서 무상기가 짧아 봄에 일찌기 논농사를 짓지 않으면 근본상 수확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하여 농사를 하는 것이 봄에는 기본상 논밭이 얼음이 채 녹지 않은 데서 장화도 없이 맨발 바람으로 일했지요. 석가래질을 하는 줄당기기를 하면서도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몰라요.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 그냥 농사질을 했지요.

그때 중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일요일이면 집에 왔다가 학교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일하다가도 혼자 물도랑에 앉아 고민하군 했지요. 그때 시내물이 졸졸 흐르는 도랑물가에 앉아서〈마을에 돌아온 중학생〉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군 하였지요.

막내동생(오른쪽)과 함께.

참, 그때 4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집에서 부리던 소가 죽어 넘어가고 어린 녀동생이 내 등에서 죽고 아버지까지 사망하다 보니 우리 집은 쫄딱 망했지요. 그런 재난이 또 어디에 있겠어요. 막내동생은 깔깔한 좁쌀가루에 소금을 넣은 안죽을 잘 먹지않아 여위다 못해 눈만 커다랗게 뜨고 높은 문턱을 짚고 울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렇게 우리 집이 농촌에서 큰 재앙를 입게 되자 돈화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우리 집을 시내로 데려 오기로 했어요. 한 마을에 살던 한 집에서 나를 데려다 그 집에 있게 하면서 중학교에 다니게 하고 두달 후에 어머니를 모셔왔지요. 어머니는 최원장이 소개를 해주어 조선 고아원식당에서 일하게 되였어요. 어머니가 새벽에 출근하고 저녁 늦게 돌아오게 되니 내가 밥을 지어 동생을 먹이고 보모집에 데려다 주고 학교로 갔지요.

돈화는 겨울에 흔히 령하 30도 이하였지요. 그 추운 겨울에 혿옷을 입고 털모자도 없이 학교를 다녔어요. 아침에 세수를 한 누기있는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학교를 가군 하였는데 봄이면 귀가 시꺼멓게 껍질이 벗겨지군 하였어요. 신도 새 신이라고는 신어 보지 못했어요. 중학교 숙사에서 학생들이 해진 신을 버린 것을 주어서 신었는데 우는 성해 있어도 밑바닥은 닳아떨어져 자꾸 돌이 들어와 몇발작 걷고는 털어내고 하면서 걸어다녔어요.

이런 정도로 곤난한 속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정신적 의지를 키웠어요. 특히 아버지는 정신이 돌아온 후 뜸을 너무 떠서 화독으로 세상 떴어요. 아버지가 세상 뜰 때 어머니와 우리를 불러 앉혔지요.

“아무리 곤난해도 자식들을 꼭 공부시켜 출세를 시키거라!”아버지께서는 띄염띄염 신신당부하고 사망하셨어요.

아버지의 이 말씀은 내 전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요. 그래서 꼭 공부를 잘해 가난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가정을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게 굳게 다지게 되였지요.

연변가무단시절 동료들과 함께.

여름방학이 되여 길림성소수민족중학생문예콩클이 연길에서 있었어요. 그때 최우수상을 탄 네명중에 나도 있었지요. 그후 예술학교 성악반에서 나를 받겠다는 통지가 왔어요. 예술학교에 와서 김태희 교장을 만났더니 나더러 노래를 해보라고 하는 것이였어요. 내가 노래를 부르는데 마지막까지 다 듣고난 교장선생은 “이제부터 너는 우리 예술학교학생이니 공부를 잘 하거라”라고 하시는 것이였어요.

그런데 그때는 강철로동을 하는 때라 처음 집을 떠난데다 로동만 하니 안착이 안되여 다시 돈화2중으로 돌아가겠다고 학교에 제기했어요. 그러니 교장선생님이 히죽이 웃으며 잘 생각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그후 열흘도 안되여 학교에서 총무주임을 시켜 돈화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을 연길로 이사시켰어요. 어머니를 먼저 예술학교 식당에서 일하도록 하고 후에 가무단에 보내 식당일을 하도록 배치를 해주셨어요.

이에 크게 감동을 받게 된 나는 사업을 잘하여 꼭 보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어요. 그리하여 공청단 활동에서나 각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사업하였지요. 총적으로 예술학교생활에서 열심히 살겠다는 일념으로 적극적으로 학습하고 사업하면서 공청단 서기까지 했지요.

1961년도 7월달에 연변예술학교 제1기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연변가무단에 배치받았어요. 가무단에서는 주요하게 국가나 외국 지도자 접대공연 외에는 도시공연보다는 농촌공연이 더 많았어요. 이불짐을 메고 30명, 40명씩 되는 배우들이 길을 걸으며 옛말을 하기도 하고 농촌에 가서 무대가 없어 바깥에 로천무대를 만들거나 우사칸을 정리해서 무대를 만들고 온돌공연을 하면서도 그 열정은 식을줄 몰랐어요.

1965년 8월, 소수민족청년참관단 성원으로 인민대회당에서 모주석의 접견을 받던 나날 천안문앞에서.

1964년 10월에 연변가무단 공청단(조직)이 총지로 비준받은 다음 나는 전직 총지 서기로 있었어요. 그때 우리 가무단의 공청단활동이 잘되여 기관단위로부터 여러 차려 표창받았지요. 그래서 1965년도 8월에 전국참관을 조직할 때 내가 길림성소수민족청년참관단 성원으로 뽑히여 천진, 상해 , 광주, 북경 등 7개 도시를 돌며 두달 반 동안 참관했어요.

국경절날 국경관례대에 올라 처음으로 모주석과 주은래 , 주덕 등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을 멀리에서라도 볼 수 있었지요. 10월 10일, 인민대회당에서 모주석 등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는데 어찌나 격동되고 인상이 깊었던지 집에 와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나와 같이 이렇게 가난한 청춘과부의 아들로서 당과 모주석, 사회주의가 없으면 오늘과 같은 영광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절대 있을 수 없다 . 그러니 이 영광을 평생 자신을 희생하면서 당과 인민,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하는 것으로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굳게 다지게 되였지요.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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