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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동심의 영원한 연극쟁이ㅡ초동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1월13일 10시31분    조회: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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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룡순(초동).
초동은 중국조선족연극 100년의 견증인

초동(草童)이라 이름하고 해방전부터 ‘미친듯이’연극에 심취하신 분이 계신다. 새싹처럼 시들지 않고 생생한 푸르름을 지킨다는 예명(艺名)의 뜻을 빌어서인지 90세를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초동의 모습은 그처럼 씩씩하고 당차고 멋스러웠다. 세월은 쉬임없이 흘러가고 연극은 초동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졌지만 연극쟁이 초동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김룡순(초동).

‘도시거지'의 연극 입문

1940년 늦가을의 어느 하루, 훈춘의 연극애호가들이 한 자그마한 연극 련습실에서 오디션이 한창이다. 새하얀 피부에 코날이 유난히 오똑하고 눈빛이 례사롭지 않은 한 남자애가 긴장해서 바들바들 떠는 다른 애들과는 달리 여유작작 시험관 앞에 나선다. 위압감이 약간 느껴지는 실눈의 시험관이 남자애더러 거지행각을 해보라고 하면서 사과를 깎아 껍질을 땅바닥에 휙 던져버린다. 시험관 앞에 선‘거지'가 무조건 땅바닥의 사과껍질을 덥썩 집을 것이라고 점 찍으며 또 그걸 얼마나 맛나게 먹는지를 사람들은 벌써 눈에 담아본다. 그런데 웬걸,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남자애는 왼손 식지와 엄지로 사과껍질을 살짝 주어들고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짓더니 오른 발을 들어 배틀면서 허공에 탁 차버린다. 그 동작 또한 꽤나 세련되고 유머스러워 구경군 모두가 통쾌한 웃음을 날렸고 그 속에 끼여서 웃어대던 시험관이 실눈을 찌푸리고 넌지시 묻는다.

“왜 주어먹지 않고 차버리느냐?”

“전 도시거지 행세를 했습니다. 거지래도 도시거지니까, 신사다운 멋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촌 구석 거지라면 다르지오. 자, 보십시오.”

남자애가 바닥에 버려진 사과껍질을 집요하게 눈박아 본다. 조금 후 황황한 눈길로 좌우를 살펴보다가 사과껍질을 덥썩 집어서 먼지를 살살 닦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과껍질이 입안에서 질펀하게 씹힌다. 너무 만족하고 행복한 웃음이 게발린 입가에 빨간 사과껍질 한 쪼각이 유표하게 붙어있다. 손으로 쓰윽 입을 닦더니 입가의 사과껍질 부스레기를 조심스레 뜯어 입에 넣고 새김질하듯 열심히 씹는다....

시험장엔 또 한바탕 폭소가 요란한 박수소리와 함께 울려퍼진다. 실눈의 시험관이 손가락에 힘주어 남자애의 볼록한 이마빼기를 딱 뜅긴다. "열일곱살이라고 했지? 쳇, 웃기는 친구군, 됐다. 래일부터 극단에 나와라!". 그가 바로 김룡순, 후날의 예명-초동이다.



오다노비드(小田坤)와의 인연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항일전쟁이 끝난 후의 어느날, 일본동보영화촬영소(日本东宝电影株式会社)의 감독 오다노비드와 배우 35명이 우연한 기회에 당시 김룡순이 갓 입사한 훈춘연극사에 초빙되여 연극작품을 연출하고 연기를 지도하게 되면서 연변의 다른 지역에 비해 원래부터 활발하였던 훈춘의 연극분위기는 한층 고조에 오르게 되였다.

오다노비드는 실로 훌륭한 예술감독이였다. 훈춘에 머무는 동안 그는 연극연출을 담당하는 한편 직접 극본을 창작하고 극중의 주역을 맡아 출연하기도 했다. 1945년 말 그가 일본어로 창작하고 김원주가 조선어로 번역하여 무대에 올린 연극 《상해의 밤》은 훈춘에서 7일동안에 14회 공연을 올렸고 번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특히 연출 겸 주인공을 맡았던 오다노비드의 연기가 너무 생동하고 감명적이여서 관객들이 크게 감동한 건 물론이고 함께 무대에 올랐던 다른 연기자들도 너나없이 격동을 금치 못하였는데 김룡순도 례외가 아니였다. 하지만 김룡순의 감동은 오다노비드의 훌륭한 연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를 더욱 자극한 건 배우들의 긴장을 풀어주어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부추켜주고 각종 정서기억과 파묻혔던 정열을 때 맞춰 불러일으키고 분산되여 있던 여러가지 연극적 요소들을 질서정연하게, 멋지게 구슬처럼 한줄에 죽 꿰는 마술사 같은 연출 재능이였다. 그때로부터 김룡순은 오다노비드가 연출하는 모든 작품에 열심히 출연하는 한편 그의 연출작업에 각별한 흥취를 가지고 어깨너머로 연출 방법과 솜씨를 눈여겨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오다노비드는 훈춘에 머무르는 동안 주로 연극작품을 연출하고 희곡을 창작하는 외 또 연극리론도 강의하고 배우의 무대분장법도 가르치고 무대세트 제작방법을 가르치는 데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러나 머지 않은 장래에 귀국해야 할 상황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또한 훈춘연극의 발전을 위해 연극연출가 양성이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것도 명백히 알고 있었다. 연극구성 요소가 희곡, 배우, 관중이라면 이 세가지 요소를 한데 묶어 인도하고 완미한 조합을 이루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가 연출가임을 알고 있는 오다노비드는 애초부터 예리한 안목으로 배우 한명 한명을 주시했고 마침내 한 사람을 점찍어 내기에 이르렀다. 온몸을 불살라 연기에 몰입하고 어떤 역할을 맡아도 강마르지 않게 생동하고 신들리게 연기를 펼치는 한 젊은이, 식을줄 모르는 창조열정과 엉뚱하면서도 진지하고 창의력이 남다른 김룡순, 그의 남다른 개성이 오다노비드의 시선에 들었다.

오다노비드는 김룡순에게 의도적으로 연출의식을 부어넣기 시작했다. 그를 불러서 작품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창조, 인물관계, 무대의 행동선 그리기 등등, 그리고 또 무대세트와 음향, 조명 등에 대해서도 소견을 들어보기도 했다. 오다노비드의 깊은 의도를 눈꼽만큼도 알아채지 못한 김룡순은 자기 흥에 겨워 손짓발짓 해가며 작품을 해석하고 엉뚱하게 연극장면의 처리에 대해서도 여차여차 했으면 좋겠다는 둥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드디여 오다노비드 일행이 훈춘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고 오다노비드 역시 마음 준비를 굳히기에 이르렀다. 훈춘 연극인들은 비어질 연출가 자리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앞으로 연출가가 없는 연극을 어떻게 만들어나가고 극단은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실로 막막하기만 했다.

오다노비드가 말을 꺼냈다.

“내가 떠난 후 연극 연출을 맡을 사람을 추천하겠습니다.”

모두들 의혹에 찬, 그러나 기대 어린 눈길로 조용히 오다노비드를 바라보았다.

“김룡순이 어떻겠습니까?”

놀란 건 극단의 배우들 뿐만이 아니였다. 김룡순 자신이 오히려 더욱 놀라서 입이 쫘악 벌어졌다. 좌우를 둘러보니 일본 음악대학 졸업생, 도꾜대학 졸업생, 로어통역관 등 학벌이 엄청 높은 사람들 그리고 북경, 서울, 할빈 등 지역에서 연극활동을 했던 쟁쟁한 젊은이들이 줄줄이 둘러섰는데, 자기는 겨우 소학교 6학년을 마쳤을 뿐이고 연기 경력도 그들에게 비하면 어미보살 앞의 새끼보살 격이 아닌가?

연극 연출이란 말에 마음이 허궁 들려 잠간 흥분했으나 곧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오다노비드는 여러 가지 사실을 실례로 들면서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연극에 대한 광분에 가까운 열정이 필요한 연출가 작업에 김룡순이 적합하다고 재삼 강조했다. 마침내 오다노비드의 강력한 추천은 우렁찬 박수로 통과되였지만 김룡순은 아직도 어정쩡한 그대로였다. 멍하니 서있는 김룡순을 바라보던 오다노비드가 다시 말을 꺼냈다.

“김룡순이란 이름자가 별로 재미없는데 연출가로서 사명감을 느낄 수 있고 사람들한테서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뜻 있는 이름- 초동(草童), 어떻소? 초는 풀 초, 동은 어릴 동, 초동-”. 미래 훈춘의 연극 연출가를 위해 오다노비드가 김룡순에게 예명까지 미리 지어놓은 것이였다.

1946년 3월, 오다노비드 일행은 훈춘을 떠나갔고 거지행각으로 연극에 입문한 김룡순은 순식간에‘연출가 초동',‘초록빛 동심을 가진 조선족연극의 지킴이'로 변신해 그 당시 훈춘 연극의 거의 전부의 작품을 혼자서 연출해냈다.

그 후 이런저런 사정과 지역적 환경, 력사적 원인으로 초동은 단 한번도 전문연극단체에서 사업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연극을 그토록 사랑했고 피끓는 청춘을 연극에 깡그리 바치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한평생 연극예술과 연을 끊지 않고 살아왔다. 해방전과 해방 초기를 선후하여 초동이 몸을 담그고 골간으로 있었던 곳은 《애문동지사인민연극사》,《훈춘현문예공작대》, 《훈춘현담가대소형문예선전대》, 《량수향과외극단》, 《남산촌과외극단》, 《훈춘현문예공작단》, 《훈춘진극단》, 《계림향조선족극단》, 《훈춘현조선족과외극단》 등 무려 10여개 과외연극단체들이다. 그곳에는 연출가 초동의 진한 연극사랑이 슴배여 있으며 그가 연출을 맡아서 무대에 올렸던 수많은 연극작품들은 조선족연극의 보귀한 유산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 방미선(좌측)이 2010년 초동을 취재하고 있는 장면.

중국조선족 연극 100년의 견증인

연극예술과 초동과의 기이한 만남과 끈끈한 인연은 그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주기도 하고 괴로움과 아픔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17살에 연극에 입문하여 수많은 연출작품을 세상에 남긴 연극쟁이 초동은 자기의 인생마저도 강파른 비탈길로 톺아오르듯 아짜아짜한 련속 드라마로 연출했다.

그 당시 오디션을 거쳐 극단에 들어간 초동이 맡은 첫번째 임무는 연극홍보였다. 희한한 차림새에 유머스런 동작을 곁들여 연극 보러 오라고 목이 터지라고 소리치면 아이들은 엎어질 듯 마구 달려왔고 어른들은 별난 홍보자를 다 본다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 바람에 연극관객이 부쩍 늘었고 또 워낙 천성이 익살스럽고 락천적인 그가 있는 곳에는 웃음소리가 그칠 새 없어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초동은 연기를 하고 싶어 속이 근질거려서 선배배우들이 연극연습을 시작할 때면 그들 배우의 대사를 자기가 먼저 전부 외워버렸고 공연막이 오르면 셀레이는 마음은 벌써 무대에 가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지나도 하고픈 연기는 시키지 않고 그냥 자질구레한 심부름과 허드레 일만 시키는 게 아닌가,

연극이 좋아서, 연기를 해보려고 극단에 들어왔는데 맨날 잔심부름이나 시키니 너무 밸이 꼬였다. 그로 인해 초동은 연극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극단생활에 염오를 느껴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한동안 극단을 떠나기도 했는데 연극은 밤하늘에 순간 나타났다가 스러지는 별똥마냥 초동이를 슬쩍 비껴가고 말았다. 그때 초동의 나이 18세…

훈춘이 해방되자 김영수 등 극단의 배우들이 초동을 찾아와서 한껏 구슬렸다.

“야, 해방을 맞았으니 인제는 합심해서 멋있게 연극을 한번 해보자. 초동이 넌 연극을 너무 좋아하지 않는가? 연극에 재간도 많고, 극단에 네가 없으니 통 재미없단 말이야!”
초동은 피식 웃었다. 전쟁이 끝나 철도가 페허로 되여 원래 하던 기관사 직업도 떼웠으니 사실 당장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하긴 기관사 노릇을 하면서도 연극공연은 죄다 찾아다니면서 보아온 초동이였으니… 초동에게 있어서 연극은 이루지 못한 꿈이기도 했다. 그 꿈을 쫓아서 초동은 다시 극단에 들어오게 되였고‘초동'이란 이름으로 연극인생을 다시 이어가게 되였다.

초동은 한동안 연극활동을 부지런히 하면서 경험도 얼마간 쌓고 연출기술도 익혀갔다. 그러나 예나제나 연극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았고 1950년에 이르러 경제난으로 극단은 더는 버티지 못해 해산되고 말았다. 앞날이 묘연하여 방황하던 차 마침 금방 연극에 맛을 들인 리영근 (후에 연변연극단 배우, 중국의 가장 권위적인 상인 문화연기상을 수상, 중국 조선족배우 중 유일하게 국무원수당금 획득)과 김양송 (후에 훈춘문공단 저명한 연극배우 겸 연출) 등이 초동을 찾아와 연극을 배워달라고 칭얼거리면서 초동이가 이끌어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연극을 해보겠노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하였다.

연극신동 리영근과 김양송을 바라보며 초동은 또다시 연극을 할 결심을 내렸고 해외에서 용케 가져온 《심청전》 《춘향전 》 《량반전 》 등 여러 가지 극본으로 본격적인 연극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때는 마침 영화관과 극단이 함께 극장을 사용하면서 영화와 연극을 동시에 상연하였는데 매번 영화를 방영하기 전에 연극 한편을 공연하여 그 수입은 반반으로 하고 공연값은 상대적으로 싸게 했다. 그 바람에 수입도 짭짤하고 영화나 연극이 모두 활기를 띠였는데 초동이가 11년이란 짧은 기간에 몇십편의 연극에서 연출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초동이 연출한 연극작품을 알아보기로 하자.

1946년: 연극《갱생》리근영 작, 초동 연출
1946년: 연극《애정과 금전》리근영 작, 초동 연출
1946년: 연극《8백호 갑판선》김영수 작. 초동 연출
1946년: 연극《북경의 밤》김창만 작, 초동 연출
1946년: 연극《마도의 려명》김원주 작, 초동 연출
1947년 연극《강제병》김창만 작, 초동 연출
1947년: 연극《피값》 의용군 작품, 초동 연출
1947년, 연극《나의 고향》김원주 작, 초동 연출
1947년 연극《옥중의 승리》김원주 작, 초동 연출
1948년: 연극《태양을 기다리는 사람들》리기영 작. 초동 연출
1949년: 연극《불길》 고철 작, 초동 연출
1949년: 연극《돌아온 산 사람》리영근 작, 초동 연출
1950년: 연극《일가일심》번역극, 초동 연출
1953년: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양반전》등 초동 연출
1954년: 고전극《김삿갓》초동연출
1956년: 연극《굴원》 곽말약 작, 초동 연출
1956년: 연극《양산성》조선고전극, 초동 연출
1957년: 가극《백일홍》 조선민간극, 김철 개편, 초동 연출

만약 그때 그 기세로 연극행진을 계속했다라면 초동은 지금쯤 아마도 연극쟁이가 아니라 중국조선족연극의 첫 연출가로, 걸출한 연극예술가로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또 한번 초동과 술래잡기를 벌였고 그번의 게임에서 초동은 또 한번 쓰디쓴 고배를 마셨다.

그 후 세월이 정말 많이 흘러갔다. 연기 오디션장에서 당차고 유머스러웠던 홍안 소년 초동이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허리가 갑삭 숙여진 88세의 황혼이 되였다.
어쩌면 연극예술은 초동이를 선택했으나 초동은 연극예술을 지키는 지혜가 모자랐고 인간의리는 초동에게 가까웠으나 그로 하여금 연극의 슬픈 막을 내리게 했다.

고령이 된 초동에게 있어서 연극을 몸으로 풀어낼 수 있음은 생의 평범한 즐거움을 초월한 극적 환희와 행복이였고 연극과 몸을 부비지 못하면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괴로움은 육신의 아픔을 초월한 사무치는 정신적 고통이였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연극을 에워싼 지난 날의 갖가지 아름다운 추억들이 자랑찬 길동무로 되여 초동을 마냥 즐겁고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초록빛 동심의 영원한 연극쟁이 초동선생은 지금은 이미 저승에 갔지만 중국조선족연극 100년의 견증인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2010년 4월 초고, 2020년 11월 수개)

길림신문  글 방미선(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이미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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