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3.8특집] 자랑스런 항일련군 녀전사 리재덕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3월9일 08시58분    조회:175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재덕

 

항일전쟁시기 가장 처절하고 간고했던 동북전장에서 싸운 동북항일련군에는 녀전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고 경력이 가장 풍부하며 영향력이 가장 크고 기여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전우들사이 평판도 가장 좋은 사람은 녀전사 리재덕이라 할 수 있다.

리재덕((1917-2019)

리재덕은 1917년 12월 29일 조선 평안남도 개천군에서 태여났다. 

부친 리상희(李相熙)는 가족을 데리고 중국 동북 봉천성 안동(지금의 료녕성 안동)에 망명했다. 일찍 반일에 뜻을 두었던 리상희는 1923년에 조직의 명령에 따라 홀몸으로 다시 일제 통치하의 조선으로 나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불행하게 일본 경찰들에게 체포되였다. 그후로 종무소식이다가 일제 옥중에서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친 김성강(金成刚)은 아주 강직한 녀성으로 남편을 잃었지만 억척스레 생활하면서 시어머니를 공경하고 딸을 훌륭하게 키웠다. 이들 가족은 흑룡강성 가목사시 탕원현의 조선인 마을에서 살았다.  

일찍 중국 남방에서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공산주의자 최용건이 탕원현에서 공산주의사상을 선전하고 비밀리에 당조직을 발전시켰다. 김성강도 비밀리에 당조직에 가입하였고 당시 송동모범학교(松东模范学校)에서 공부하던 리재덕도 어려서부터 공산주의사상을 접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리재덕은 일찍 소선대에 가입하고 이어 공청단에 가입하면서 나어린 항일투사로 성장했다. 

 1933년 추석에 일본헌병들이 갑자기 나타나 탕원현 학립진(鹤立镇)의 조선인 마을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헌병들은 마을사람들을 다 집결시켜 놓고 반역자가 가리키는 대로 공산당원들을 한명한명 잡아냈다. 중공 탕원현 서기였던 배치운(裴治云)을 비롯해 12명이 붙잡혔다. 리재덕의 모친 김성강은 탕원현 당위원회 위원이였기에 배치운 서기와 함께 더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며 당의 비밀을 엄수하였다. 악독한 일본헌병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는 이들을 모두 생매장했다. 

 12명 렬사의 희생은 백성들의 항일의지를 무너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항쟁의식을 더 불타게 하였다. 

부모를 다 잃은 16살 리재덕은 당조직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고 탕원항일유격대에 가입하게 되였다. 

리재덕은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피복창에서 일했다. 

1937년에 이르러 일제는 동북항일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집단부락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부락마다 엄격히 통제하고 집집마다 관리하면서 유격대와 백성들의 관계를 철저히 차단했다. 놈들은 실 한오리, 쌀 한알도 유격대에게 주지 않기 위해 혈안이 되였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병력을 끌어모아 공산당 유격대와 련계할 경우 온 마을을 다 도륙내고 다 불태우며 모든 물건을 다 빼앗는 이른바 “삼광(三光)”술책을 실시했다. 

이시기 항일부대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동북 동토대의 령하 40도에 달하는 혹한을 이겨내야 했고 굶주림을 달래야 했으며 수시로 다가오는 적의 습격을 막아내야 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는 항일련군 전사들은 모두가 총에 맞아 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를 가지고 틈을 노리다가 침략자들을 타격하였다. 

리재덕은 훗날 이때를 회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처럼 어려운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허기지고 힘들어도 자기는 절대 앉거나 누워 쉬지 않았고 계속 이를 악물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거나 동료들을 돌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허기지고 힘들어 비틀비틀하다 그냥 쓰러지면 대부분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이 시기 리재덕은 항일련군의 무선전 전문가인 우보합(于保合)을 알게 되였고 조직의 도움하에 이들은 그 어려운 시기 조촐한 혼인식을 갖고 혁명적 부부로 되였다. 

1939년에 항일련군은 거듭되는 타격을 받았다. 항일련군 3군 4사 사장이 희생되였기에 우보합이 림시로 부대를 거느리게 되였다. 이들은 우세한 적의 공격을 피해 조직의 허락을 받고 쏘련경내로 진입했다. 

쏘련 극동군 부대에 재 편입된후 리재덕은 무선전 공부를 했고 스키 훈련과 락하산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때론 잠복활동도 했다. 리재덕은 수차 소부대를 따라 흑룡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와 적정을 살폈고 적의 군사기지를 파괴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16살 꽃나이에 전투에 참가한 리재덕은 13년이라는 항쟁을 거쳐 드디여 반파쑈전쟁의 승리를 맞이하게 되였고 새중국의 탄생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 어려웠던 시절 사진 한장 남기지 못했던 리재덕은 1946년 광복절을 맞으며 정성드려 사진 몇장 남였다. 

가족사진

항일전쟁시기 리재덕 부부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지만 최종 딸 하나만 살아 남았다. 

1950년에 그는 조직의 배치에 따라 국가정무원 비서청에서 기요부문의 비서로 일했고 주은래 총리의 도장을 도맡아 관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사연으로 하여 리재덕은 그때까지 중국 국적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1953년에 그는 정중히 신청해 공식 중국공민이 되였고 그후 전국인대상무위원회 판공청에서 일을 보았다. 

1957년 리재덕 부부 

  퇴직후의 모습

  리재덕이 남긴 회억록 

 퇴직후 리재덕은 북경 통주에 살면서 행복한 만년을 보냈다. 

조선에서 태여나 만주에서 싸웠고 쏘련 극동에서 훈련을 받은 리재덕의 한생은 풍부하고 영웅적이다. 

리재덕 항일전쟁시기 공헌으로 중국에서 존경받고 대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항일련군시절의 인연으로 조선에서도 국빈대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쏘련 극동군 시절의 기여로 1995년과 2005년 로씨야 조국보위전쟁승리 훈장을 두번이나 받았다. 

2019년 102세로 자랑찬 한생을 마쳤다. 

중국조선어방송넷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45
  •   항일전쟁시기 가장 처절하고 간고했던 동북전장에서 싸운 동북항일련군에는 녀전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고 경력이 가장 풍부하며 영향력이 가장 크고 기여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전우들사이 평판도 가장 좋은 사람은 녀전사 리재덕이라 할 수 있다. 리재덕((1917-2019) 리재덕은 1917년 1...
  • 2021-03-09
  • 항일로전사 리민의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고층건물에 에워 쌓인 단독주택이였다. 철문을 지나 뜰에 들어서자 금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주택을 두른 회색의 담에는 글귀를 새긴 대리석이 광고판처럼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읽어보니 전부 항일련군과 관련된 시구와 노래, 이야기였다. 동북의 산과 들...
  • 2015-06-11
  • 90세 전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88여단 전사 이민 고층건물에 에워 쌓인 단독주택이었다. 철문을 지나 뜰에 들어서자 금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주택을 두른 회색의 담에는 글귀를 새긴 대리석이 광고판처럼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읽어보니 전부 항일연군과 관련된 시구와 노래, 이야기였다. 동북의 산과...
  • 2015-04-09
  • 항전승리 70돐 기념 특별기획 - 항일련군의 20명 조선족녀걸들 (2) /리 함 1         최희숙 화상사진   1937년 3월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6사사령부에서는 김정숙을 장백현 도천리에 파견하여 도천리를 거점으로 하강구일대의 부녀사업을 지도하게 하였다. 김정숙은 활동범위를 도천리와...
  • 2015-03-09
  • [기획2]놈들의 말꼬리에 머리태 끌리워 화형당한 최계옥렬사 건국 65주년 맞이 특별기획보도-《81년만에 공향에 돌아온 항일녀전사의 충혼》 제1편 조선인들이 비교적 집중적으로 모여 산 차조구(지금의 안도현 석문진)일대는 19세기말부터 항일의병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였다. 박영철선생의 외가집은 바로 차조구 동흥...
  • 2014-01-03
  • ‘예술구국(藝術救國)’. 이 짧은 문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조성환 선생이 독립운동 동지였던 한흥교의 아들인 항일음악가 한형석에게 ‘예술을 통해 나라를 구하라’며 내려준 훈구다. 먼구름 한형석은 한일강제병합이 강행됐던 1910년 2월 21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불운한 해에 태어난 ...
  • 2013-11-18
  • 김백산, 조선족, 1920년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태여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온 그는 10세부터 형님과 함께 길림성 화룡현 황진리툰,투도구일대와 액목현 옥산툰, 북대양툰 등 지역에서 잡일을 하는 한편 일본개척단에서 농사를 지었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이 승리하자 군중들은 김백산을 자위대장으로 선...
  • 2013-09-05
  • 석희만은 연변대학 미술학부의 창시자이자 조선족 서양화단을 이끈 선구자의 일원이다. 아울러서 그는 중국현대미술의 변화와 전개라는 력사적인 맥락에서 주목되는 화가이며 미술교육가로 명망이 높다.   석희만은 거의 한세기에 걸친 파란만장한 인생과정에서 격변하는 력사적사건들과 미술사조를 거치면서 중국조선...
  • 2013-08-20
  • 《어머니》,《밀림은 푸른 바다 나는 갈매기》, 《연변목가》,《진달래》…중국조선족들한테는 너무나 귀에 익은 가요들이다. 주옥같은 이 명곡들의 탄생비화를 운운한다면 단연 이 한사람을 빠뜨릴수 없다. 그는 바로 중국조선족음악계의 거장으로 존경받고있는 안국민이다. 그는 국가1급 지휘이자 유능한 작곡가로...
  • 2013-08-01
  • 당대 중국조선민족음악의 정초자의 한사람인 작곡가 정진옥을 사람들은 천재적인 음악가라고 부른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들은 우리 민족 음악사의 영원한 멜로디로, 그가 남긴 음악주장은 후세대의 앞길을 비춰주는 불멸의 등대로 오늘도 찬연한 빛을 뿌리고있다. 전투장의 군악대 대장 정진옥은 1926년6월 조선경상남도...
  • 2013-07-30
‹처음  이전 1 2 3 4 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