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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밀산시위 제1임서기-지희겸 (池喜谦)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5월10일 09시41분    조회: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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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지희겸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최채 등 우수한 당원간부들을 배출했으며 현시기에도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지도하에 수많은 조선족 당원간부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며 기여를 하고 있다. 본지는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여 초심을 잃지않고 사명을 명기하자는 취지에서 조선족당원간부들의 선진사적을 조명하는 기획보도 '당을 따라 달려온 영광의 세월'을 펴낸다. 이번 기획보도를 위해 밀산시에서 배출한 우수한 조선족당원간부들의 사적을 집필하여 보내준 밀산시 맹고군 전 부시장, 밀산시조선족문화관 피금련 당지부서기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을 기대한다.

  -편집자

 

 

  중공 밀산현위 제1임서기- 지희겸

  1927년 7월, 제1차 국공합작이 파렬되면서 3년간의 성세호대하던 대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중국혁명의 생사존망의 긴요한 관두에 중국공산당은 시국의 변화에 따라 중국혁명의 중심을 적의 력량이 박약한 농촌으로 옮기고 혁명세력을 확충하며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무장투쟁과 근거지 건설을 중심으로 한 로농무장할거의 국면을 건립하여 최종적으로 중심 도시와 전국혁명의 승리를 쟁취할데 대한 방침을 제정하였다. 이 방침의 지도하에 1930년9월, 중공만주특위에서는 무장투쟁근거지를 개척하고 쏘베트정권을 건립하기 위하여 지희겸, 장산해, 최영갑 세사람을 밀산에 파견하였다. 그때 지희겸의 나이는 28세였다. 지희겸의 부친 지장회가 밀산 당벽진의 거주민이였으므로 지희겸은 아버지 신변에 와서 농사짓는다 는 명의하에 녕안에서 당벽진으로 건너와 당조직 창립활동을 개시하였다.

  당벽진은 인구류동이 빈번하고 번화한 상업가를 가진 중쏘민간무역 통상구로서 조선족 거주호수가 90여호 되였다. 지희겸의 부친 지장회는 조선초기의 항일독립운동단체 연변의군부의 창립자중 한사람이였다. 20년 대초 연변지구에서의 조선무장독립운동이 좌절당한 후 그는 벙어리로 가장 하고 당벽진에 와 은신하고 있었다. 지희겸은 당백진에 도착한후 아버지를 도와 밭일을 하는 한편 비밀리에 군중속에 심입하여 쏘련사회주의제도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중앙쏘베트정권 그리고 중국로농홍군을 선전하면서 인츰 사업국면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황계흥, 김산해, 권상우, 한희, 최영준, 채기봉 등 조선족진보청년들을 당원으로 발전시켰다.

  1930년10월 말, 중공만주특위에서 특파원 박광서를 밀산에 파견하여 제1기 밀산현위를 세우고 지희겸을 현위서기로, 장산해, 김산해, 황계흥, 채기봉, 최영준, 한희를 현위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중공밀산현위가 성립된 후, 지희겸은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전현 인민들에게 일떠나 군벌을 타도하고 토호렬신을 소멸하며 쏘베트정권을 세울것을 호소하였고 밀산추수폭동을 계획하였다.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당벽진, 오도강, 이도강, 일촬모, 룡왕묘에 다섯개의 당지부가 세워 졌는데 지희겸이 당벽진당지부서기를 겸임했다. 이와 동시에 현위에서는 행동위원회를 세우고 무장폭동을 준비하였다. 행동위원회 주임은 지희겸 이 맡았다. 현위에서는 12월11일, 광주폭동 2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세개 분대로 나뉘여 이도강, 오도강, 룡왕묘에서 밀산폭동을 일으키고 밀산보안 단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계획했다.

  12월20일, 김산해가 먼저 분대를 거느리고 룡왕묘에 있는 박춘길의 집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군중기초가 박약했고 준비가 불충분했 으며 게다가 조직이 엄밀하지 못한 등 원인으로 밀산행동위원회의 폭동 계획은 일찍 폭로되였으며 나아가 밀산폭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12월21일, 밀산현공안국국장 김운산은 지희겸, 김산해, 최영준, 강시 우 등에 대한 긴급수배령을 내렸고 각 공안분국과 밀산보안단에서는 조선족마을을 세밀히 수색하고 폭동혐의가 있는 자들을 체포할데 대한 긴급 명령을 발포했다.

  당벽진에서 기타 분대와 회합하려던 북만특위순시원 박광서, 행동 위원회주임 지희겸과 기타 행동위원회 위원들은 밀산공안군경과 보안퇀의 돌연적인 습격을 받았다. 긴급한 관두에 박광서, 지희겸, 지우근 황계흥 등은 당벽진을 떠나 쏘련경내로 전이했다. 미처 전이하지 못한 24명의 참가자들이 밀산공안국군경과 보안퇀에 체포되였다.

  밀산행동위원회가 조직 발동한 이 폭동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중국공산당의 령솔하에서 반동군벌통치를 뒤엎고 인민민주정권 쏘베트정 권을 건립하려는 한차례 시험으로서 민중들속에서 커다란 정치영향을 일으켰다. 사건발생 후, 길림성정부에서는 즉시 전부의 폭동관련인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동시에 밀산조선인학교를 페지하였다. 밀산현정 부에서는 계엄령을 내리고 일체 야간오락활동을 금지하였으며 현성 출입시 꼭 증건검사를 진행했다. 더우기 조선족에 대해서는 조사와 감시가 특히 심했다.

  지희겸, 황계흥 등은 폭동 두주일 후, 쏘련으로부터 비밀리에 당벽진에 돌아왔다. 그러나 당조직은 이미 엄중한 파괴를 당했고 밀산보안단과 군 경들의 경비가 삼엄했으며 성안의 조선인에 대해 매일 수사를 진행했다. 백색공포하에서 밀산의 혁명활동은 전례없는 곤난과 위험에 부딪치게 되 였다. 지희겸, 황계흥 등은 심시숙고를 거친 후 밀산을 떠나 보청, 호림, 요하 등지로 가서 혁명공작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점점의 불꽃도 료원의 불길로 타오른다. 비록 지희겸이 조직한 밀산 농민추수폭동은 모험과 준비부족으로 좌절당해 료원의 불길로 타오르지 못했지만 밀산흑토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혁명의 불씨를 남겨 놓았다.

  지희겸은 1903년 11월1일,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서부평동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가을, 여덟살 나던 해 조선국내의병운동에 참가하였던 아버지 지장회가 일제의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연길 하남 하관툰으로 이주해 아버지가 교편을 잡던 한문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5년 봄, 가정경제난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일을 하다가 1924년 3월, 녕안현 길림성 국립 제4 중학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맑스주의와 손중산의 삼민주의를 접촉하게 되였고 과외시간을 리용하여 많은 진보적 서적들을 열독했으며 사상이 진보적이고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일년 후, 강동주의 소개로 만주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 하였으며 점차 평범한 농촌청년으로부터 우국지사로 성장하게 되였다.

  1927년7월, 지희겸은 한차례의 집회에서 조선공산당인 리창희를 만났고 리창희의 소개로 만주공산주의청년회원으로부터 조선공산당 (ML 파)에 가입하게 되였다. 1928년3월, 연변조선공산당(ML파)이 소집한 연변 각지 청년대표대회에서 지희겸은 동만청년총동맹위원, 연길현련맹위원장 으로 당선되였다.

  지희겸은 조직의 파견을 받고 녕안에 와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중국한인청년동맹제8구책임자로, 조선공산당만 주총국북만제2도 책임자로 당선되였다. 1930년9월,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요구에 따라 녕안에서는 조선공산당을 개조했다.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려문빈과 황기범의 소개로 지희겸은 조선공산당원으로부터 중국 공산당원으로 신분을 전입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밀산에 파견받았다.

  1931년3월, 지희겸은 할빈북만특위로 사업회보를 가던 중, 밀산 소목릉하에서 반역자 김형근의 밀고로 밀산보안단에 체포되였다. 지희겸은 감옥에서 군경과 보안단의 혹독한 형벌을 받아 온몸이 성한데 없었으며 갖은 고생을 다했다. 8월에 지희겸은 할빈에 압송되여 중동철도호로 군사령부 회신처 제3감옥에 감금되였다. 1931년 "9.18"사변 발생후 함께 갇혀 있다가 먼저 석방되였던 한풍신 등의 담보로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 출옥 후, 할빈총공회의 당단서기를 맡고 있다가 1931년 12월, 주하현 특위서기를 담임하였고 1932년 여름에 중공만주성위에서 주하현에 대표를 파견하여 주하현위를 설립할 때, 중공주하현위서기로 임명되였다. 1933년 4월, 주하현공청현위 조직부장 백성기가 변절하여 지희겸은 우지미 김석휘의 집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였다. 처음엔 할빈에 압송되였다가 그해 8월에 조선 신의주형무소에 압송되여 3년 도형을 언도받았다. 복형 중 일본천황이 아들을 낳아 형기 9개월 감형 특사를 받았고 1936년1월, 복형 만기로 석방되여 연길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1944년10월, 지희겸은 종교파벌 분쟁으로 인기된 "청림고"사건의 혐의로 부친 지장회와 함께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여 일본인이 조직한 "봉사대"에서 강제로역을 하게 되였다. "봉사대"에서 로역에 시달리다가 1945년4월, 연변해방 림박에야 무죄석방 되였다.

  1945년8월18일, 쏘련 홍군이 연변에 진주하였다. 갖 해방된 연변은 만신창이 되여 복구를 기다렸고 정치형세는 혼란하여 지주, 토호렬신, 한간, 매판관료 등 일제잔여세력들이 무정부상태의 기회를 빌어 형형색색의 반동 조직과 기구를 세우고 반동무장대를 조직하여 반동세력을 확장하였다. 당 시 연길시에서는 학만정을 위수로 하는 한줌도 못되는 반동정객들이 《중국국민당연길현당부》를 세우고 집정당으로 자처하며 호령을 내려 민족모순을 조작하고 혁명질서를 파괴했다. 엄중한 정치형세하에서 지희겸은 기치가 명확했고 보다 큰 원견과 담략으로 미래를 구상했으며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최문호 등과 함께 연변로농청총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들의 주요목적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하루 일찍 일제잔여세력을 제거하고 각종 반동세력의 음모전복활동을 방지하며 효과적으로 혁명질서를 유지하 려는데 있었다. 그해 9월19일, 연길에서 연변로농총동맹대표대회를 소집 하였다. 로농총동맹 회원수는 3만여명으로 연길, 화룡 두개 현의 대표만 해도 600명이 되였다.

  회의에서 지희겸은 집행위원회 조직위원으로 선출되였다. 9월23일, 지희겸은 홍군로간부 강신태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재가입하였다. 9월 25일, 중공연변위원회가 성립되였다. 위원회서기는 동북항일련군에서 파견한 홍군로간부 강신태가 담임했고 지희겸이 중공연변위원회 선전위원직을 담임했다. 9월말, 중공연변위원회의 위탁을 받고 연변로농청총동맹 집행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확대회의에서 지희겸은 연변민주대동맹 을 설립할데 대해 진술하고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금후 우리는 친일잔여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대다수 사람을 기반으로 하며 통일전선을 견지하는 민주련맹국가를 건립하여야 한다. 이 국가의 성질은 신민주주의여야 한다. 오직 신민주주의 국가제도만이 오늘 중국의 실제에 부합되며 오직 이 제도를 실시해야만 외국침략자를 몰아내고 봉건세력, 파쑈압박을 소멸할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변로농청총동맹집행위원회 확대 회의에 출석한 전체 대표들은 토론을 거쳐 일치하게 연변로농청총동맹을 해산하고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을 설립할데 대한 결의안에 동의하였으며 14항 개조강령을 반포하였다. 회의에서 지희겸은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위원장으로 당선되였다.

  연변민주대동맹이 성립된 후, 지희겸은 만강의 열정과 헌신적인 혁명 정신으로 민주대동맹의 기타 위원들을 거느리고 지방무장을 조직하고 인민 정권을 건립하며 토비무장과 일제잔여세력 숙청, 전선지원 등 사업들을 효과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연변지구의 온정과 발전에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민맹 각 조직에서는 연변자치군과 배합하여 삼도만, 대흥 구, 천교령 일대에서 토비숙청투쟁을 전개했다. 그번 토비숙청에서 300여 명의 토비무장을 해제하고 연변지구의 토비소란을 평정했다. 토비숙청 중 13명의 민맹전사들이 희생되였다.

  1946년6월, 연변의 토비숙청이 기본상 결속되였다. 지희겸은 연길현 춘흥구 토지개혁사업에 참가했으며 토지개혁공작대 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공작대원들을 거느리고 각 마을과 농호에 심입하여 선전공작을 전개 하면서 군중들을 발동하여 먼저 식량을 꾸고 곡물수량을 조사하는 등 운동을 벌렸다. 토지면적을 다시 측량하고 지주의 여유곡식밭을 빈고농 들에게 나누어 주어60%의 농민들이 토지, 성축, 식량을 분여받게 하였다. 1946년 11월, 길림성위 제2차 군중사업회의 후, 각지에서는 빈고농단을 세우고 지주를 투쟁하고 밭을 나누는 토지개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다. 절대 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토지, 식량과 재산을 나누어 주어 농민들 의 생산적극성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연변지구의 농업생산 발전과 재정경제의 근본적인 호전에 튼튼한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1948년 2월, 그는 조직의 배치로 연변일보사에서 번역사업을 하였고 그해 10월, 연변의학전문학교 교도주임을 담임했다. 1949년 4월부터는 선후로 연변대학의학부 교무과장, 사범학원력사교연실 강사, 부교수로 사업했다. 주요저작으로는 《중국조선족간사(공동저술) 》 《조선고대사강의》《조선고대사》《중국정사조선전주해》등이 있었다. 후에 1959 년부터 련속 연변조선족자치주정협 2, 3, 4, 5기 위원회 부주석, 길림성정협 상무위원을 력임했다.

  지희겸은 1983년6월, 80세를 일기로 연길병원에서 별세할 때까지 23년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 정협위원회 부주석직을 담당했다. 그는 정협사업을 열애했으며 모든 정력을 정협사업에 몰두했다. 고령의 년세에도 적극적으로 정협활동에 참가하여 수많은 조사보고를 친히 집필했으며 사업발전에 건의와 대책을 올렸다.

  지희겸의 일생은 정치가, 교육가, 사회활동가로서의 분투의 일생이였다. 정치가로서 한때 력사적원인으로 비록 당적을 취소당하였으나 자기의 리상과 신념을 지켜나갔으며 공산당을 옹호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며 조국을 사랑하고 그 어떤 곤난앞에서도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교육가로서 비록 정규적인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고심한 노력과 참다운 연구로 연박한 지식을 소유한 학자로 되였으며 조선고대사연구에 조예가 깊고 우수한 인재들을 많이 육성 해냈다. 사회활동가로서 비록 력차의 정치운동에서 운동의 대상으로 되여 간난신고를 치렀지만 드팀없는 신앙과 강의한 품격 그리고 광명정대한 인격과 진리를 지키는 신념을 고수하였다. 1남3녀의 아버지로서 비록 자녀들에게 물질재부는 물려주지 못하였으나 보귀한 정신재부를 남겨주 었다. 지희겸의 자녀들은 사업과 생활중에서 조직에 그 어떠한 요구도 제출하지 않았으며 역경중에서 떳떳이 자기의 힘으로 인생행로를 개척해 나갔다.

  끝없는 창공을 날아예는 매처럼 인생의 큰 무대에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실천해가는 것은 영원히 지희겸의 분투목표였다.

  맹고군 저 피금련 역/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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