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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 시인의 신나는 문학인생; 인(瘾), 끊을 수 없는 연(缘)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3월3일 10시21분    조회: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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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우 시인의 신나는 문학인생

인(瘾), 끊을 수 없는 연(缘)
 
 
웨이하이시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의 유명한 시인 김철우씨를 말하자면 인차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인(瘾)이다.
 
“낼모레 내 나이 팔순이오. 이젠 그만 써야지. 주책이야.”
 
어제 이런 말씀을 해놓고 한두달 후면 어느 지면에 또 김 시인의 근작시가 발표되군 한다. 여러해를 그렇게 겪은 때문인지 이제는 별로 믿지 않는다. 문학인(瘾)에 포박된 김 시인이 아무리 뛰느라 해봤자 어느 분의 손바닥이겠지 싶다.
 
인(瘾)이란 쉽게 말하면 중독이고 광기이고 고치기 어렵게 굳어버린 습관이다. 병질엄 부수가 딸려 있는 것만 봐도 별로 정상적인 일은 아닌 듯 하다. 마약인에 길들여졌다, 담배인이 박혔다 하는 말처럼 부정적인 현상에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한번 맛들여지면 고질병으로 고착된다는 막무가내 인식이 진하게 앞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좀 괜찮은 일에도 ‘인(瘾)’이란 글자를 덧보태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봉사인이 도졌다’는 표현은 언론의 선동질일 확률이 높고 ‘여행인이 발작했다’는 호방한 인생을 즐기고 싶은 사람의 멋스러운 핑계일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골프매니아들이 쩍하면 ‘골프인이 당긴다”고 투덜대는 건 수천금을 탕진하는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는 거처럼 들린다. 그만큼 봉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으로 규정되는 것을 바랄리 없고 여행이 삶의 전부인 사람도 ‘인’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신사운동인 골프가 ‘인’에 끌려간다면 별로 저급해 보일 것도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인(瘾)’을 수식해도 전혀 천박하거나 징그럽게 느껴지지 아니하고 따라서 겉치례나 자기변호처럼 생각되지도 않는 일이 꼭 하나가 있다. 
 
문학이다!
 
문학은 취미생활이라면 취미생활이고 직업이라면 또 직업일 수도 있겠다. 재미로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이어가니까. 밥벌이를 시켜주지 못하지만 한번 발을 담그면 자칫 평생을 고행승처럼 거기에 매달려서 떨어지지 못한다. 억수로 힘든 만큼 성취감도 대단하다. 그리고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것도 아니지만 한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 자평하게 된다. 
 
말그대로 문학인(人)의 문학인(瘾)이다. 그리고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연(缘)이다.
 
 
아버지는 행동으로
 
인생을 배워준 스승
 
김철우 시인은 1944년 길림성 훈춘시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7남매 중 셋쨰로 태어났다. 제일 맏이가 누님이고 그 아래로 남자 형제 다섯이 세살 터울로 주렁주렁 있었고 막내가 또 여동생이었는데 김 시인은 그중 세째였다. 
 
아버지는 열두살 때부터 소년공으로 훈춘역에서 막로동을 했다고 한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몰랐지만 힘이 장사인데다가 심성이 바르고 골기가 있어 노동자들 속에서 위신이 꽤나 높았다. 
 
한번은 아버지와 가까이 지내던 한 노동자가 고된 일에 지쳐 잠간 주저앉아 쉬다가 일본인 역장에게 들켜 피투성이 되도록 채찍에 호되게 얻어맞았다. 생계를 위해 심한 모욕과 모진 매를 이겨내며 하루하루 참아왔던 아버지는 눈앞에 벌어진 참혹한 현실을 보면서 더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사람을 이 지경으로 때리는 법이 어디 있소?”
 
“너도 맞고 싶어? 게으름을 피우는 인간은 짐승처럼 두들겨 패야 정신이 든단 말이야.
 
일본인 역장은 아버지에게도 채찍을 휘둘러댔다. 아버지는 욱 올리솟는 혈기를 참을 수 없어 한손으로 날아오는 채찍을 휘어잡으며 다른 손을 내밀어 역장의 멱살을 거머쥐기 무섭게 땅바닥에 둘러메쳤다. 저만치 내동댕이 쳐진 역장은 죽은 듯 쭉 뻗어진채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아차, 큰일 쳤구나!)
 
그 길로 집으로 달려간 아버지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어둠을 타서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는 배운 건 없었지만 민족심이 대단했고 나라 잃은 백성의 억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김철우 시인은 자신의 오늘은 아버지의 격려와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문학인(瘾)은 준비된
 
자에게 절로 주입된다
 
훈춘을 떠나서 그들이 자리잡은 곳은 용정시 로두구 렴명촌이었다. 원래 기꼴이 장대한 아버지는 농사일에 막힘이 없어 그들 가족은 무리없이 새고장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김철우 시인은 이곳 로두구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와 용정시고등학교에 입학하여 3년을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을로 돌아온 그는 렴명촌소학교 민영교사로 채용되면서 장장 34년이라는 교육자 생애를 걷게 되었다. 
 
그무렵은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이 갓 발발한 시기로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격앙적이었다. 
 
마침 학교에 박덕준이란 교사가 있었는데 그가 쓴 시가 연변일보에 자주 발표되었었다. 중학시절부터 소설책 읽기를 즐기여 책만 손에 쥐면 밤이 새는 줄 몰라 가름등잔이 줄어든다면서 어머니한테 자주 경을 맞았던 김 시인은 가슴에 일찍 싹튼 문학의 씨앗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민족의 자랑찬 인재로 커달라던 아버지의 부탁이 큰 힘이 되었다.
 
시인의 고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67년  김 시인의 처녀작 시 <무쇠처녀전투대>가 연변일보에 발표되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렇게 한번 박힌 문학인은 점점 중독으로 번져갔다. 김 시인은 열정이 백도로 끓어올랐고 밤낮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몰랐다. 시상을 익히다보면 밥 먹는 것마저 까맣게 잊어 아내의 잔소리를 늘 귓등에 달고 살았다. 덕분에 여러 신문과 잡지에 김 시인의 글이 자주 선을 보였다.
 
“그때 김경석 선생님이 연변일보 문예부 편집으로 계셨는데 내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 시원고뭉치를 들고 직접 렴명학교까지 찾아오시기도 했어요.”
 
김경석 선생님이 자신의 처녀작을 발표해준 편집이기도 했다면서 김철우 시인은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중국 속담을 곁들이며 눈을 슴벅이기도 했다. 
 
빗바람은 의지와 실력을
 
다지는 고험
 
그러나 얼마 후부터 이런저런 시련이 닥쳐왔다. 김철우 시인의 작품이 여러 문예지에 자주 등재되면서 우선 학교 내에서 본직사업을 외면하고 부업을 하고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바람에 교장한테 여러번 불려가서 단단히 혼쭐이 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많이 민감했던 시기라 자칫 상상할 수 없는 후과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뒷덜미가 서늘해진 것도 잠간, 며칠 못가서 글병이 또다시 도져 교장의 귀띰과 경고를 까맣게 잊은채 장밤을 패면서 원고지를 긁적거리군 했다.  
 
“왜 글쟁이한테 영감이란게 아주 중요하잖아요. 눈 깜박이는 사이에 도망가는 그 넘을 붙잡아두는게 더 절박했거든요.”
 
사실은 교장도 입으로 드센척 했지 실제로는 글쟁이라고 눈을 감아주고 뒤를 많이 봐주었다며 김 시인은 회심의 웃음을 지었다. 
 
진정한 위기는 그 후에 다가왔다. 그것도 두번씩이나 찾아왔다. 
 
개혁개방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변에서 이래저래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부러웠던 김 시인은 한번은 연길에 가서 옷장사를 한답시고 설치다가 크게 밑지고 빚구렁에 빠졌었다.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빚군때문에 6년동안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글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글쟁이로서의 수련을 단단히 했다고 김 시인은 말한다. 
 
간신히 빚을 덜고 한숨을 조금 톺는 중에 새로운 고험이 닥쳐왔다. 하나님이 김 시인의 문학혼을 혹독하게 검증하려고 그랬던지 이번에는 큰병이 그의 육신에 찾아들었다. 병마와 싸우기를 꼭 10년, 문학인생으로서는 가장 황금기인 중년의 한창 나이에 필을 놓아야 했던 김 시인은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서 아쉬움으로 냉가슴을 앓군 한다. 
 
“글이 막 쏟아져나올 시절을 헛되이 낭비하고나니 인생이 다 귀찮아지더라구요.”
 
1994년 김 시인은 근무하던 학교에서 퇴직하고 2005년에 자식을 따라 웨이하이시로 이주해왔다. 그간 빚도 남김없이 갚고 몸도 많이 추스러졌다. 그러자 문학인(瘾)이 또다시 슬그머니 다가와 추파를 던지며 유혹했다. 김 시인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한사람의 인생에 16년이 몇번이나 있을까. 그 빼앗긴 16년을 보상 받아야 했다. 
 
다행히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운(韵)이 따라줬고 시율(律)도 절로 맞춰졌었다. 
 
 
 
문학인은 차려진 운명대로 사는 거
 
 
 
경건히 우러르던 푸른 산이
 
이마 낮은 언덕에
 
고요로운 슬픔으로 누으셨다
 
 
 
살길 찾아 떠나간 사람들
 
흘러간 세월처럼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는데
 
외로운 담배불
 
고향 지켜 고독하게 반짝인다
 
 
 
흙냄새에 거멓게 절은 한생
 
가난에 핥기워
 
좀 먹은 가죽처럼 얼룩져도
 
청송 닮아 의젓하다
 
 
 
허룸한 헛간의 구석에
 
주인 잃은 쪽지게
 
가느가란 다리로 떠인 추억
 
먼지만 두툼하다
 
 
 
푸른 하늘 끝까지 함께 갈
 
버거운 그림자
 
비소리 그리워 목마르다.
 
 
제5회 중국조선족효사랑글짓기 공모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김철우 시인의 <아버지>란 시다. 
 
그만큼 아버지는 김 시인한테 든든한 산이고 마음의 고향이었으며 의젓한 청송이었고 특히 평생을 뒤쫓고 따라야 할 ‘버거운 그림자’였다. 어쩌면 숙명 같은 것으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缘)이었다. 시 쓰기가 인(瘾)이라면 아버지는 연(缘)이기에 김 시인은 오늘도 차례진 운명대로 시줄을 긁적인다. 
 
 
눈물이 바다를 이루면
 
불효죄가 용서될까
 
 
 
죄 없는 푸름을 빨아먹고
 
살점에 뼈까지
 
우려 내여 모조리 삼켜버려
 
흙이 되신 부모님
 
 
 
철 못든 건 죄 아니라 하지만
 
가슴 속에 맺힌 옹
 
차라리 채찍되어 이제라도
 
시원히 후려치면
 
이다지 괴롭진 않은 것을
 
 
 
세상에 셈이 드는 약이 있어
 
무지를 깨치면
 
나 같은 놈들도 후회 않고
 
웃으며 살련만
 
 
망부속이 되면은 잊혀질까
 
천고의 죄 버리고.
 
  팔순이 가까워오는 시기에 왜 <불효자의 넉두리>를 썼을가를 음미해보면 김 시인의 숙명을 짐작하게 된다. 
 
글쓰기 유효기간이 훨씬 지났다며 입버릇처럼 자조하는 김철우 시인, 수백수 시 발표작 중에 아무리 살펴봐도 떳떳하게 세상에 내놓을 작품이 없다며 겸손하게 손사레를 치는 김철우 시인, 연세가 들수록 글쓰기의 어려움을 새삼스레 터득하게 된다면서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살아보자고 말씀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오늘도 필을 드는 김철우 시인은 앞으로도 주어진 문학인의 운명대로 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해안선뉴스 / 장학규 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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